경제활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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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지 『나라경제』 1992년 2월호 


 지금 우리 경제계는 정치적, 사회적 역경 속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의 힘겨운 전환의 문제를 안고 있다.

먼저 경제운영이 정부주도에서 시장주도형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소리는 높다. 그러나 과거 정부주도 시대에 만들어졌던 제도 및 법령이나 경제운영 스타일은 아직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기업인의 생각과 태도 또한 구태의연하여 정부와 기 업계 사이에 인식의 간격과 마찰이 커지고 있다.

둘째로 가장 심각한 전환기의 진통은 노사관계에서 보아왔다. 민주화의 물결을 탄 노조운동은 근로조건의 개선을 가져온 적극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에 격렬한 노사분쟁, 집단적 이기주의, 근로기강의 해이를 가져옴으로서 기업경영에 심한 충 격을 준 것도 사실이다.

셋째로 우리는 보호주의에서 시장개방으로 전환을 꾀하고 있다. 그러나 농업과 서비스 부문, 그리고 경쟁력이 약한 일부 제조업은 외제공세에 밀리면서 날로 거 세지는 국제적 압력에 반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넷째로 우리의 산업구조는 노동집약형에서 기술집약형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우 리의 기술능력이 부족하여, 일본으로부터 새 기계를 들여오는 것이 기술혁신의 주 요 수단이 되고 있어 대일 무역수지 역조가 가중되고 있다. 이러한 전환기에 처하여 고임금, 고물가, 인력난으로 제조업이 국제경쟁력을 잃게 되었고 바야흐로 경제난국이라는 소리가 높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업들은 이 시련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하고 있고 앞으로도 자구노력을 계속할 것이니 바로 이 점이 변화에 적응력을 발휘하는 시장경제체제의 원동력이자 강점이다. 문제는 그러한 적응노력을 지원하는 기업환경 정비가 병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정부는 전환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경제의 활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또 수많은 정책제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면 경제 활력은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기업이 신나게 뛸 수 있는 기업환경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기업의 활력이 곧 경제의 활력임을 생각할 때 이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이지만 풀어야 할 문제가 너무 많다보면 당면과제의 초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런데 "한국과 같이 사업하기 힘드는 나라는 없다"라는 탄식의 소리가 국내외에서 들려온다. 물론 일본, 홍콩, 싱가포르, 대만과 비교해서 하는 말이다. 왜 그럴까? 기업들이 바라는 환경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얼른 말하자면 사업하기 쉬 운 환경이라 하겠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몇 가지 조건을 들 수 있다.

첫째로 기업은 가급적 자유로운 환경을 요구한다. 정부의 과도한 간섭과 규제와 불합리한 정책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지하경제가 발달하든가 아니면 기업가의 기능인 '창조적 혁신'의 노력이 위축된다. 대만의 인구는 우리의 반밖에 되지 않으나 무역에 참가하는 기업수는 우리의 2배 이상이다. 이 차이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는 데 그중 하나만 든다면 대만에서는 기업하기가 보다 용이하고 자유롭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수많은 기업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일어서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는 가운데 20여 개의 가전제품과 잡화 등에서 세 계 제일의 수출국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로 기업은 믿는 곳이 있어야 한다. 정부를 믿을 수 있어야 하고 특히 법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편의 때문에 법이 사문화(선거법, 정치자금법 등등) 되는 것도 문제이고, 합법적인 것도 여론재판에 밀려 행정적 응징의 대상이 되는 것도 문제이다. 법의 기강이 서지 않으면 기업은 행동의 기준을 잡기 어렵고 정부 와 장래를 믿을 수 없게 된다. 예컨대 탈세방지를 위한 세무사찰을 행정적 상벌 (賞罰) 수단으로 남용하면 권력에게 잘 보이면 탈세도 용인되고, 잘못 보이면 합 법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기업에게 주게 된다. 시정해야 할 일이 있으면 법을 고쳐서 바로 잡도록 할 것이지 법에 저촉되지 않는 일을 행정력으로 탄압하면 기업은 믿을 곳이 없어진다. 법치주의는 자유경제체제의 근간이다.

셋째로 기업은 정책의 일관성과 안정성을 원한다. 기업의 세계에는 거미줄 같은 거래질서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은행이 고객들의 돈줄을 끊어버리면 당하는 기 업들의 낭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영향은 거미줄 전체에 파급된다. 당국자들은 이 사실을 유의치 않고 붓끝 하나로 쉽게 정책을 선회하지만, 그것은 기업경영의 최대의 적인 '불확실성'의 원인이 된다. 정부가 사태변화에 따라 정책을 변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정부 스스로가 문제를 만들어 놓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책을 급선회하는 일은 힘써 피해야 한다. 지나간 경험에서 얻는 교훈은 급격한 정책선회를 필요로 하지 않도록 평소에 건전한 거시정책의 테두리를 세워 놓고 그것이 무너지지 않도록 굳건히 지켜나가는 것이 최상의 정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우리 당국자들이 이 세 가지 점을 염두에 두고 자기소관 업무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본다면 이 나라에서 기업하기 힘든다는 이유를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교통난, 수송난은 말할 것도 없고 현실에 맞지 않는 법령과 규제, 무리 한 가격통제, 불필요한 행정절차, 고위 관리자의 빈번한 교체, 과도한 경제력집중 등은 몇 가지 예에 불과하다. 정부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자기도 못한 일들을 후 진들에게 강요하는 일이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그러나 공직자 들이 기업과 근로자 가 힘들어 하는 사정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서 그것들을 조속히 풀어 주는 일들을 계속한다면 우리 경제는 틀림없이 활력을 회복하고 또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하물며 지금과 같은 전환의 시기에는 기업의 자기조종과 적응을 쉽게 하기 위한 환경정비가 모든 문제 해결의 초점이 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