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고난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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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8월 9일 중앙경제신문 창간호 


 

불교의 설법에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는데 오늘의 경제적 어려움은 지난날 우리가 지어 낸 일들의 응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자기는 마치 국외자처럼 세상을 비관하는 버릇이 있는 데 바로 여기에 우리 고난의 씨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경제의 각 부문마다 오늘의 문제를 남의 탓으로만 치부하는 한, 함께 고난을 겪으면서도 거기에서 아무런 자각이나 교훈도 얻지 못하고 앞으로도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조, 기업, 정부가 지난 수년 간의 쓰라린 경험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를 잠시 돌이켜 보고자한다.

노조

먼저 노조의 경우부터 생각해 보자. 우리는 과거 몇년간 극심한 노사분규를 겪었고 명목임금이 크게 올랐다. 거기에서 근로자가 얻은 것은 확실히 있다. 노조의 세력과 교섭력이 강화되었고 많은 경영자들이 노사관계를 크게 반성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잃은 것은 없는가? 임금은 올랐지만 그 후에 물가가 올라서 실질임금은 종전보다 크게 나아진 것이 없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높은 임금과 제품의 불량률 때문에 외국 고객을 잃게 되고, 결국 회사가 도산하여 일자리를 잃은 근로자가 속출하고 있기도 하다.

이 시점에서 노조가 배워야 할 교훈이 두 가지 있다. 첫째로 한 솥에서 밥을 먹는 기업내에서 적대적인 투쟁이 없으면 제 몫을 챙길 수 없다는 선동에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한다. 기업주가 근로자의 동반자라면 협상 테이블에서 대화로 문제를 풀어 나가야지 처음부터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좌익 혁명운동 흉내를 내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때로는 단체행동도 하고 파업도 해야 되겠지만, 서구적 대립과 투쟁보다는 동양적 신의(信義)와 화합이 보다 인간답고 건설적인 개선의 길이라는 것은 만고불역(萬古不易)의 진리가 아니겠는가. 물론 사용자측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보람있는 해결을 위하여 노조측이 해야 할 몫이 있는 것도 분명하다.

둘째로 다소 이론적인 이야기가 되겠는데, 노조는 명목임금을 올릴 수 있는 힘은 있어도 실질임금을 올릴 힘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가령 노조가 노동생 산성을 초과하는 명목임금을 '전취' 하였다 하자. 기업주는 노조의 요구를 들어 주고 그 대신 제품가격을 인상하면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조들이 노동생산성을 초과하는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또 대부분의 기업들이 그를 위하여 제품가격을 인상하면, 대부분의 물건가격, 즉 물가수준이 오르게 되고, 이렇게 되면 힘겹게 올려 받은 명목임금의 실질가치는 삭감되고 마는 것이다. 결 국 임금이 노동생산성을 초과하면 물가상승을 통하여 그 실질가치를 노동생산성 수준으로 접근시키는 것이 시장경제의 자율기능이자 운동법칙이니, 이것은 누구도, 물론 정부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정부는 물가상승을 억제하기 위하여 응급책으로 공공요금과 공산품가격을 통제하고 통화긴축을 강행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오늘과 같은 불황을 가져오고 실업사태를 빚어내게 된다. 정부나 경제학자들이 노동생산성과 동떨어진 고임금이 근로자에게 별로 도움이 안된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진국의 성숙된 노동조합은 이 점을 이해하고 또 노동생산성이 연율 두 자리 수로 증가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교섭에 임할 때 처음부터 무리한 임금인상률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물론 인플레가 임금 아닌 다른 요인 - 예를 들면 통화증발 - 때문에 일어났다면 노조가 임금가치의 잠식을 보상받기 위하여 간혹 두자리수의 인상률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문제이다.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격렬한 노사분규와 고율의 임금상승을 경험하였는데 그것이 지금 겪고 있는 물가고, 수출부진, 국제수지 악화 그리고 불경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노조가 인정할 수 있다면 그리고 과도한 임금인상이 반드시 높은 실질임금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 쓰라린 경험은 값진 교훈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업

다음에 지금 기업들이 처해 있는 곤경은 가히 알 만하다. 87년 이후 많은 기업들은 증권투기, 토지투기, 아파트 투기에 말려들었다. 어느 경우에나 투기적 가격상승은 반드시 붕괴(崩壞)국면을 맞이하게 마련인데, 붕괴국면에서는 그것들의 매매가 어려워진다. 매매가 어렵다는 것은 돈이 돌지 않고 이자 부담이 가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지나 증권이 본업이 아닌 기업들이 투기에 손을 댔다면 그로 인해 본업 경영에 심한 자금압박이 왔을 것이고 거래기업 혹은 관련기업들에게도 그 영향이 파급되었을 것이다. 물론 투기에 휘말린 기업들은 전체 기업 중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1989년에 토지상의 자본이득이 GNP의 35%, 총근로소득의 84%에 해당하는 액수에 달했다니까 (토지공개념위원회 연구보고서), 여기에 증권투기로 인한 소득이전까지 합친다면 그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로 인하여, 일확천금한 졸부들의 과소비와 왕성한 건설, 건축경기가 경제성장률을 7% 이상으로 높였지만, 이러한 '거품경제'의 거품이 꺼져 버리고, 수출마저 저조한 오늘에 있어서는 기업 전체가 불경기에 휘말리게 마련이다.

하기야 투기는 기업경영의 한 요소라 할 수 있고 또 시장경제의 묘(妙)라고 할 수도 있다. 앞으로 가격이 오를 것을 내다보고 지금 증권을 사 모으는 투기자가 있음으로 해서 증권가격 하락이 견제되고, 앞으로 증권가격이 내릴 것을 예상하여 증권을 내다 파는 투기자가 있기 때문에 증권시장의 과열이 견제된다. 이러한 평준화 작용은 곡물, 석유, 금속 등의 선물거래에서도 볼 수 있고 이것이 바로 투기의 사회적 효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경영의 견지에서는 과도한 투기행위는 실패할 확률이 크고 특히 고리의 차입금을 투기에 투입하는 것은 무모한 경 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투기를 떠나 기업 전체가 지금 깨달아야 할 교훈은 따로 있다. 기업이 살아남고 발전하자면 가급적 변화의 추세를 예견하고 그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 일찍이 슘페터는 기업가의 직능을 이노베이션 혹은 창조 적 혁신에 두었는데 지난 수년만큼 기업가의 창조적 혁신이 중요한 때도 없을 것이다. 민주화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노사관계를 정립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외국의 보호주의와 국내시장 개방압력, 중국과 아세안의 추격,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경제 각면에 스며드는 정보화·국제화의 물결 등등 급변하는 기업환경에 대 응하여 기업들은 기술혁신과 품질향상, 신상품, 신시장의 개발 등에 전력을 기울 여야 할 때였다. 그런데 우리 대다수 기업들이 과연 그러한 창조적 혁신의 기능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경제가 침체하고 기업경영이 어려워지면 기업인들이 정부의 실책과 무책을 비 난하고 나서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공통된 현상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경제 가 성숙된 민주사회일수록 정부가 기업을 위하여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다지 많지가 않다. 우리의 경우 옛날의 개발초기에는 정부가 창업기의 기업을 부추기기 위하여 적은 일, 큰 일을 돌보아 주었고 또 거기에서 문제가 생기면 기업편에 섰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부는 그렇게 할래야 할 수도 없고 또 하여서 도 아니된다. 지금의 정부는 기업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 각층의 다양한 욕구와 이 해관계를 조정하는 중립적 위치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의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기업이 자유롭게 기업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경제 전체의 질서와 건전한 정책 테두리를 견지(堅持)하는 일이니, 오히려 기업계 스스로가 그러한 역할변화를 강력히 요구하고 나서야 한다. 그것이 자율화의 참뜻이기 때문이다.

정부

다음에 정부가 배워야 할 교훈도 많은 것 같다. 먼저 중장기 종합계획의 기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로, 항만시설의 심한 적체를 사전에 대비하지 못한 이유를 깊이 분석하고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국제수지의 흑자관리가 어떠한 문제를 야기했고 그것이 어떤 경로로 증권투기, 토지투기의 가열을 가져 왔는지도 후일을 위하여 세밀히 분석, 기록해 두어야 한다. 특히 강조할 것은 지난 수년 간의 사태는 정부가 섣불리 시장기능에 간섭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주가(株價)하락이 정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여 중앙은행 발권력으로 주가를 뒷바침한 것이 그 일례이다. 결국 주가하락은 막지 못한채 통화증발로 인한 인플레 압력을 가중시켰고, 그 후유증을 처리하기 위하여 중앙은행이 또다시 증권회사에 특융을 해야 하는 악례를 만들지 않았던가. 우리나라의 경우 증권시세는 무엇보다 내외 경제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니 만큼, 그 엄청난 돈을 차라리 제조업의 생산성 향상에 투입했더라면 경제호전에 도움이 되었고 증권시장에도 좋은 영향이 갔을 것이다. 결국 무분별한 시장간섭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보여 준 값비싼 교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에 주택정책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아파트 가격통제와 추첨제도는 무주택 서민층을 위한 제도라고 하지만, 그러한 시장간섭은 아파트 투기의 불을 부쳐 결국 서민들에게 불공평을 강요하였으며 드디어는 아파트의 과잉공급 상태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차라리 시장의 수급상태를 반영하여 가격이 형성되도록 내 버려 두고, 그 가격에 포함된 과다한 초과이윤을 세금으로 흡수하여 서민을 위한 임대주택기금을 조성하는 장치를 만들었다면 그러한 폐단은 회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할 일이 있다. 경제는 복잡한 부분으로 구성되는 유기체인 만큼 어떠한 특별정책을 추진하고자 할 때에는 관련 부문에 미치는 충격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그 일례로 200만 호 주택건설은 그 규모가 큰 것인 만큼 물자수급에 관한 연관분석(聯關分析)이 필요했었다. 덮어 놓고 이 사업을 밀다 보니까 건축자재 인력부족에 봉착했고, 가격과 임금상승을 부채질하여 가뜩이나 어려운 제조업을 더욱 압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필자가 정부에 있을 때에도 이러한 과오를 범 한 일이 있는데 앞으로는 대규모 사업계획을 추진할 때에는 반드시 연관분석을 시도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또 한가지 유사한 예는 토지정책에서도 볼 수 있다. 투기를 억제하기 위하여 비업무용 토지에 세금을 중과하는 취지는 좋았지만, 그때 문에 기업들은 중과세를 회피하기 위하여 무리한 건축투자를 하게 되었고, 그것 역시 건축과열과 함께 물가와 임금상승에 기여하는 한편 오늘에 와서 기업의 자금난과 경기침체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 방법밖에 없었는지 사 후적으로나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목적과 취지가 좋더라도 자유기업주의와 시장의 원리를 무시 하는 방법을 채용하면 의외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신고전파(新古典派) 경제학의 아버지 A. 마셜은 이코노미스트는 언제나 따뜻한 가슴과 냉철한 이성을 가지라고 경고한 것이 아닐까.

이상에서 노조, 기업, 정부가 다같이 반성할 사항들을 지적하였는데 다행히도 이 삼자의 자각적 노력으로 우리 경제는 지금 필요한 방향으로 조정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경제성장률 점차 안정 궤도로 낮아지고 있고, 국제수지도 개선의 기미를 보이고 있으며, 물가는 아직도 불안 요인들이 있기는 하나 그런 대로 위험 수위는 아닌 것 같다. 금리가 드디어 내림세를 보이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불경기의 심도를 알 수 있다. 하여튼 금리인하는 매우 바람직한 조정방향이다. 그러나 오늘의 불경기는 지난날 우리 스스로가 뿌린 씨를 거두는 인과응보의 과정인 만 큼, 각자가 과거의 경험을 거울삼아 필요한 자기조정을 계속하면 머지 않아 회복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