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대통령에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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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신년호 중앙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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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륜과 우선순위

도하의 신문에는 매일 같이 대통령 당선자에게 이것 저것 바란다는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새삼 그분에게 무엇을 당부한다는 것은 쑥스러운 일 이다. 그분은 이미 선거 기간에 사회 각계각층이 바라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하여 공약을 제시하였거나 자신의 견해를 밝혔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 많은 공약들을 어떻게 정리하여 실현성 있는 국가경영 계획으로 통합하느냐에 있을 것이다. 신임 대통령은 앞으로 그의 정리된 경륜과 시정방침을 국민 앞에 천명하겠지만, 경륜이란 국가경영에 관한 지도자의 우선 순위 감각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 만큼, 국민들의 집약된 소망이 우선적으로 반영될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우리의 새로운 대통령은 국민들의 소박한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루 빨리 교통지옥에서 벗어나고 싶다.--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싶다.-- 나의 자동차와 나의 집을 가지고 싶다.-- 도시민이 부러워하고 의지하는 농민이 되고 싶다.-- 만사에 사리와 공평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싶다.-- 통일된 조국을 보고 싶다.-- 무엇보다도 깨끗한 정치를 보고 싶다... 이러한 국민들의 기본적 소망들에 비한다면 수많은 단편적인 공약들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바라건대 단편적인 공약은 미루어 두고 우선 국민들의 집약된 소망에 부응하기 위하여, 수많은 난관 앞에 당선자 특유의 돌파력이 발휘되기를 기대한다.

위정재인 (爲政在人)

확실한 경륜과 함께 그것을 구현하고자 하는 열화(熱火)같은 의지를 품고 있는 지도자는 인재를 고르는데 심중하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적재를 적소에 쓰면 문제의 태반이 해결된다는 것은 경영을 경험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수긍이 간다. 대통령 당선자의 인사정책에 정치적 또는 개인적인 사정이 개입하게 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두가지 사항만은 유의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첫째로 차관 이하의 공무원의 배치에 있어서는 전문성을 무시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이미 우리 공무원의 전문가적 자질은 인근 경쟁국들에 비하여 현저하게 낙후된 상태에 있고 이대로 가면 국제화시대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적절히 처리해 나갈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지금은 전문 지식과 경험을 중요시하는 인사정책이 특히 중요한 때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직업공무원제도를 확립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정치가 흔들려도 안고(安固)한 직업공무원제도가 기능하는 한 일상적 국가경영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이니 공평하고 합리적인 인사제도를 확립하여 공무원의 사기와 책임감을 높여야 할 것이다. 너무나 빈번하고 무원칙한 인사로 행정전반의 능률이 저하되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 바란다.

민생안정과 정치개혁

신임 대통령이 직면한 긴급한 과제의 하나는 선거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는 일일 것이다. 국민들은 앞으로 정계개편을 둘러싼 당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또다시 국회는 공전을 거듭하고, 행정부는 긴급한 민생문제를 앞에 놓고도 속수무책으로 있는 사태가 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어차피 정치적 동요와 불안은 불가피할 것인데 신임 대통령은 예견되는 사태를 조속히 수습하여 정치적 안정을 회복할 수 있기 바란다. 물론 이것은 대통령 혼자만의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정치인 모두의 자제와 협동이 불가결하다. 원컨대 정치인들은 또다시 국민들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기 바란다. 이나라의 최대 문제점이 정치의 후진성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정치는 거짓과, 기만과, 부정부패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렸고 우리사회의 도덕적 타락의 근원이 되어 왔다. 이것은 실로 중대한 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한 21세기의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보잘것 없는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바라건대, 돈이 적게 들고 깨끗하고 생산적인 정치를 구현하겠다는 대통령 당선자의 공약이 기필코 실현되기를 기원한다.

기업환경의 개선

경제문제가 선거의 주요 쟁점이 되었지만, 단순히 확대정책으로 선회할 시기는 아닌것 같다. 우리경제는, 노동력공급상의 애로, 임금의 상승압력, 국제수지의 제약, 물가불안의 상존 등을 고려할 때 선진국형 저 성장 궤도로 이행해야 할 단계에 놓여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시각을 견지하면서 지금 침체상태에 있는 경제활력을 회복하자면 무엇보다도 기업환경을 정비하는 일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기업환경이란 기업경영에 영향을 주는 국제적, 국내적 요인들로 형성되는데 지금 우리 기업들을 둘러싼 내외환경이 너무나 불리하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기이(奇異)한 것은 현안중의 경제개혁과제가 허다한데, 선거전(戰)에서는 그 어느 하나도 주요 후보자들 사이의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통령 당선자는 선거에서 걸러지고 투표로서 위임된 개혁방향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이제부터 그의 개인적 소신을 굳혀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이것은 우리 정당정치 내지 선거문화의 후진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인데, 그렇다 보니 정권 교체기에는 기업들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한층 가중될 수밖에 없게 된다. 비근한 예로, 실명제를 실시할 것인지 아닌지, 30대 재벌에 대한 간섭이 더해질 것인지 덜해질 것인지, 토지정책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어느 정도로 농업과 서비스시장을 개방하는 것인지, 경제제도, 법령, 운영 방식 등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기업으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사항이 너무나 많다. 이러한 불확실한 여건들이 기업들을 둘러싸고 있는 한, 기업들은 확실한 영업정책을 세울 수 없고, 기업의욕도 솟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불확실성은 기업경영의 최대의 적으로 간주되는데 그것을 최대한 불식하자면, 가급적 속히 새 정부가 현안문제들에 대하여 한치의 의문도 없게 정부의 방침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방침을 천명했으면 그것을 끝까지 변경하지 말아야 한다. 정책의 일관성이 없으면 정부에 대한 신뢰가 없어지고 그것 자체가 또한 불확실성의 요인이 된다. 정부가 기업계의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정책 운영에 있어서 기업계가 하자는 대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로는 업계가 반대하고 싫어하는 정책이라도 강행해야 하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다만 그러한 정책을 시행하자면 그 목적과 결과에 대하여 신중한 판단이 선행되어야 하고, 확신이 서면 정부는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해마다 같은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 하다가 별로 실효도 없는 단편적인 조치로 국면을 호도 하면 그후에도 시비는 계속되고, 기업은 항상 미 확정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기업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정부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불확실한 상태에서 방황하는 것보다 차라리 정부의 확고한 방침 하에서 그에 적응하는 노력을 하는 편이 오히려 편할 것이다. 기업은 일시적 불이익을 받더라도 불확실한 정책보다 확실한 정책을 선호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체제 정비

대통령 당선자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겠다고 공약하였다. 경제운영에 있어서 정부의 역할을 축소 조정하고 민간부문의 자율과 책임을 확대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그 공약을 지지한다. 사실상 새정부가 서둘러야 할 일 중의 하나는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국내체제를 쇄신하는 일이다. 옛날의 경제상태와 국제환경을 전제로 만들어진 제도, 법령, 관행이 반드시 오늘의 경제상태와 국제환경에 맞을 까닭이 없다. 그 동안 정부에서 추진해 온 행정개혁 작업의 실적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절차간소화나 인허가업무의 형식적 하부이양의 범역을 넘지 못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제환경과 시장경제체제를 깊이 동찰 하는 차원에서 제도와 정책을 재검토하고 수정하는 작업이 추진되어야 한다. 특히 금융부문의 개편과 자율화에 대하여는 일대 영단이 필요하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각종 법령의 개폐작업을 일거에 처리하기 위하여 각 법률의 개정안을 하나의 법률--예컨대 경제 개혁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담아 국회의 의결을 얻은 일이 있다. 우리도 신속한 개혁방법을 찾아야 한다.

재정운용.

도로, 항만등, 사회시설의 극심한 애로가 우리의 생활을 어렵게 하고, 수출상품의 국제경쟁력을 약화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사회간접시설의 대폭적인 확충이야말로 최우선 과제의 하나인데 자원 부족이 항상 문제가 된다. 이점에 관련하여 재정운용에 관한 대통령의 경륜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통치자가 재임 중에 기념비적 사업을 하고 싶어하는 충동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80년대에 너무나 그 방면에 자원을 소모했고 그 인과응보로서 오늘날 사회시설의 극심한 애로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화려한 전시적인 사업에는 일체 손대지 말고 교통, 상하수도, 환경보호, 위생시설등 국민의 기본수요를 충족하는 사업과 경제개발을 촉진하는 사업에 자원배분을 집중 시켜야 한다. 정치인들은 당연한 일이지만 언제나 선거를 의식한 선심사업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정부예산을 살펴보면 잡다한 선심사업이나 전시성 사업에 적지 않은 자금이 확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기야 어느 나라에서나 경제적 합리주의를 관철하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지만, 그럴수록 대통령의 확고한 소신과 영도력이 견제적 역할을 해야 한다. 만약 대통령이 재정운용에 있어서 정치적 편의주의로 기우러 지고 경제적 타당성이 적은 정치적 요구에 쉽게 타협한다면 재정은 물론 국가경제상의 손실은 매우 클 것이다.

지도자와 결단

이상에서 신임 대통령과 그의 정부가 당면한 몇 가지 기본 과제들을 생각해 보았는데, 실은 문제를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각종의 사회적 정치적 난관에 부디쳐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들이 대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주장은 좀처럼 굽히지 않고 협력하기를 거부하면서도 지도자의 결단력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많은가 하면, 정책 결정의 수혜자는 지도자를 치켜올리는 반면 불이익을 받는 측은 그를 매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나라에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해결해야 하고 해결하자면 궁극에는 누군가가 결단을 내려야 하며 그래서 상위자와 지도자가 있는 법이다. 우유부단과 결단은 종이 한 장의 차이지만 그것이 국가경영에 미치는 효과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국민들은 결단의 지도자를 우러러본다. 결단으로 불이익을 받는 사람조차도 세월이 지나가면 그러한 지도자를 평가하는 사례를 우리는 흔히 본다. 미국의 어느 전직 대통령이 "인기 있는 대통령이 되기보다는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