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원과 한국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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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12월 7일, 조선일보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선언에 이어 정부가 발표한 정부조직 개편 안은 대체로 여론의 환영을 받고 있다. 건설부와 교통부를 통합하여 공공시설의 건설과 유지-관리 행정을 일원화하고, 정보화시대의 요청에 따라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하고, 통상과 산업정책의 주소를 분명히 하고, 관광사업을 문화체육부로 이관한 것 등은 시의 적절한 결단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사람들의 주목의 초점은 아무래도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하여 재정경제원으로 개편한 점에 놓여져 있는 것 같다. 이것과 관련하여 한가지 생각해 볼일이 있다.

과거 고도성장기에 두 부처를 운영해 본 필자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경제기획원은 경제개발 수요 때문에 확장적인 성향이 있는 반면에 재무부는 업무 성격상 경제안정을 중시하는 보수성향이 두드러졌다. 당시는 개발우위의 시대인지라 재무부는 고군 분투하다가 안정화의 방위선이 무너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래도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사이에 견제와 균형 (check and balance), 나쁘게 말하면 대립과 마찰의 관계가 있었기에 그나마도 상대적 안정을 위한 정책적 테두리가 유지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세계화의 도전에 직면하여 재정과 금융정책 기능을 통합하고 정책조정기능을 강화하기 위하여 두 부처가 합쳐진다는 것은 발전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성장과 안정, 확장과 긴축, 경제적 합리와 정치적 편의 사이의 긴장과 상호견제작용이 앞으로는 필요 없는 것일까? 보기에 따라서는 어차피 앞으로는 천하 대세가 성장보다 안정을 선호하고 있고, 특히 개방체제하에서는 안정적 거시정책을 견지하지 않으면 국제수지에 가시적인 타격이 올 것이기 때문에 재정경제원은 균형된 정책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성장이냐 안정이냐 하는 따위의 논쟁은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질 것이라고 낙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경제에는 주기적 경기변동이 있는 법이고, 장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사항이 많기 때문에 대응 정책에 관하여 의견이 갈라지는 경우가 있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 있어서도 경기국면에 대응하는 금리정책, 통화정책 등에 관련하여 긴축이냐 확장이냐, 금융적 처방이냐 재정적 처방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행정부와 중앙은행사이의 견해가 대립하는 경우를 본다. 일본이나 다른 선진국의 경우도 마찬가지. 미국의 경우 중앙은행 (연방준비은행) 총재의 임기는 7년이고, 행정부로부터 비교적 독립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안정우선의 정책을 견지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러한 제도적 장치에는 중앙은행과 행정부사이에 견제와 균형 관계가 있기를 바라는 창건자 들의 지혜가 숨어 있다. 이점을 떠나 나라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정치적 편의 때문에 경제적 합리성이 희생되는 위험과 폐단은 언제나 있다. 우리의 양곡기금 관리도 그 예에 속한다. 이 경우에 은행 총재의 법정 임기보장 등으로 중앙은행이 정치권에서 비교적 떨어져 있을 수 있다면, 정치권에서 오는 통화 팽창 압력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재정경제원은 정치적 압력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의 통합에 관한 매스컴의 일차적인 반응은 재정경제원의 권능이 막강해 지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어쨌든 재정경제원은 경제정책의 중심부로서 막강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제 부총리는 재무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재무부에 속했던 정책 수단들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 바람직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각부 처의 요구와 정치의 압력을 소화해야 하는 재경원이 확대주의로 기울어질 위험을 지니게 된다.

병원에서는 주치의가 환자의 병상을 진단하고 치료방법을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외국의 병원에서는 다른 의사들의 "제2의 의견"을 듣도록 의무화하는 경우가 있다. 막강해지는 재경원에 대하여 "제2의 의견"으로 맞설 수 있는 상대기관을 둘 필요는 없는 것일까? 비록 그것이 부총리의 조정부담을 크게 한다 하더라도 경제안정을 위한 안전장치로서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정부조직 개편과 함께 한국은행의 역할과 기능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한다. 그 동안 중앙은행 독립론이 몇 차례 부침 하였지만, 권한 다툼이나 位相론의 차원이 아니라 재정경제원의 일방적 확대정책을 견제하는 안전장치로 그 기능을 보강해 보자는 것이다. 혹자는 중앙은행이 아니더라도 재경원 내부, 외부여론, 국회 등의 견제 작용이 있을 터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할지 모르나, 그러한 산발적, 비조직적 견제와 명확한 책임을 규정한 제도적 견제관계는 효과면 에서 같지 않을 것이다. 모처럼 탄생할 재경원을 반기면서도 노병의 노파심에서 한마디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