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오늘과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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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4월 24일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강연


 

한국경제의 오늘

때는 바야흐로 개방화 시대, 민주화 시대 그리고 정보화 시대라 한다. 줄여서 삼화(三化) 시대라 할까. 이 3중적 변화 속에서 한국경제는 새로운 진로를 찾아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는 그동안 성장궤도를 잃지 않았고, 1985∼94년 간 평균 8%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해 왔다. 우리 경제가 그만큼 튼튼한 성장기반과 탄력성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인데 그러나 여러 가지 전환기적 문제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표면에 나타난 문제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나 삼화현상이 문제의 성격과 의미를 바꾸어 놓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고의 목적은 당면문제의 새로운 성격을 드러내고 아울러 한국경제의 장래를 내다볼 때에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국제수지

우리경제의 최대 약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구조적 국제수지 적자라고 말하고 싶다. 요즈음 수입 사치품의 범람과 관광바람 등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만약 국제수지가 흑자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 국제수지의 동향을 보면 1986∼1989년에 모처럼 이룩했던 흑자현상은 불과 4년으로 끝났고, 1990년이래 적자기조를 보여 오다가 작년에는 88억 달러이라는 사상 최대의 적자를 기록하였고 금년에도 2월말 까지 이미 33억 달러의 적자를 보이고 있다. GNP의 2∼3%에 적자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할지 모르나 그 배후에 가려진 전환기의 문제점들은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과소비

먼저 이른바 과소비가 문제인데 국민들의 향상된 소비수준과 외제 선호가 수입개방을 계기로 하여 직간접으로 과다한 수입 수요를 유발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상이다. 한동안 부동산투기로 일확천금한 졸부들이 정신없이 돈을 쓰는 풍조도 이에 가세해 왔다.

개방체제하에서 소비증가가 경제에 미치는 효과는 과거의 보호주의체제하에서의 그것과 다른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옛날에는 화폐소득이 생산능력 이상으로 증가하면 그것은 물가상승으로 나타나고 따라서 실질소득은 그다지 올라가지 않는 결과가 되고는 했다. 즉 물가상승이 실질소득과 생산능력 사이의 균형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나 수입이 자유화된 오늘에 있어서는 수요가 있으면 수입이 따르게 되고 물가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 다만 수입이 여의치 않은 농산물과 서비스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예외가 될 수 있다. 물가가 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달가운 일이지만 국가적으로는 국제수지에 악영향을 준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개방화 시대에는 경제 운영에 있어서 국 제수지 관리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

그러면 과소비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 개방화, 민주화 시대이니 개인들의 소비행위를 직접적으로 규제할 도리는 없다. 그러나 정부는 임금을 비롯한 화폐소득의 과잉상승을 예방하기 위하여 통화관리를 철저히 하고, 노사협상에 경제논리를 도입하도록 지도하며, 저축을 장려하기 위한 세제 금융상의 조치를 유지 또는 강 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필요하다면 경제성장률을 하향조정하는 정책적 성숙 성을 보여 줄 때도 되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국제수지, 인력난, 물가동향 등을 감 안할 때 작년의 11% 성장은 과대한 감이 있다.

환율과 금리

국제수지를 개선하자면 수출을 늘려야 하나 여기에도 개방화에 따른 새로운 문제가 있다. 정부는 외환거래를 점차로 자유화해 오고 있는 터인데, 물론 이것은 필요한 정책방향이다. 그런데 국내금리가 국제금리의 거의 2배나 높은 상황하에서 외환거래를 자유화할 때 금리차를 노리는 외국의 단기자본 유입을 막기 어렵다. 실제로 작년에도 외국인 증권투자(89억 달러)를 포함해서 145억 달러의 외국 단기자본이 유입되었고 그로 인하여 환율(달러 값)은 연간 1.8%가 하락하였다(자료 : 한국은행). 환율이 떨어지면 국내기업의 외채상환 부담이 경감되는 면이 있으나 수출은 불리하고 수입은 유리해진다. 국제수지가 흑자일 때에는 환율(달러의 원화가격)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나 우리의 경우에는 만성적 적자에도 불구하고 환율이 떨어지는 데 문제가 있다. 다만 외국자본이 들어오면 국제수지 적자를 메꾸는 금융조작이 쉬워지고, 국내금리를 다소 내리게 하는 이점은 있다.

원래 현행 변동환율제는 환율이 외화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오르내리고 그를 통하여 경상수지를 자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고전적 이론에 입각하여 IMF 협약으로 채택된 제도이다. 그러나 세계 각지의 주요 금융시장이 컴퓨터 통신망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시장처럼 작동하는 오늘에 있어서는, 국제 유동자금이 각국의 금리변동에 반응하여 시시각각으로 일국에서 타국으로 이동하고 그를 통하여 해 당국 환율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환율이 국제 경상수지보다 단기자금이 동에 따라 변동한다면 국가간의 경상수지 불균형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오늘의 국제통화제도가 직면한 문제인데 지금 이 문제가 한국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국내 고금리가 문제의 근원인데, 고금리는 오랫동안 우리나라 경제의 난점으로 지적되어 오다가 이제는 환율을 왜곡하여 국제수지 균형을 어렵게 만든다는 2중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정부는 단기자본 도입에 따른 환율 왜곡 현상을 완화하기 위하여 해외송금과 외국여행을 부분적으로 자유화하여 들어 온 외화를 다시 밖으로 내보내는 정책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부득이한 일이지만 결국 금리를 지 급한 외채를 비생산적 해외송금이나 외국여행에 써버려야 한다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 국제수지가 흑자인 상태에서 그러한 자유화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여튼 이제부터는 선진국의 중앙은행처럼 금리와 환율을 연계적으로 관리해야 하며 그러한 관점에서 - 다른 관점도 있지만 - 한국은행의 기능과 위치를 재검토 할 때라고 생각한다(이 점에 관해서는 별고 재경원과 한은 조선일보 1994년 12월 7일)이 있음

산업구조의 방향

우리 산업구조의 수입의존도가 너무 높아서 만성적 국제수지 적자의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은 새롭고도 오래된 문제이다. 특히 수출투자의 대일 수입 유발이 문제인데 최근 한국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장기적으로는(1975∼90년 간) 수입유발계수(輸入誘發係數)가 조금씩 하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한다. 그러나 아직도 컴퓨터, 사무기기, 가전 및 통신장비, 정밀기기, 전자기기 부품, 자동차, 산업용 기계와 같은 중화학공업 핵심부문의 수입유발계수가 가장 높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점에 관련하여 우리는 반도체 개발과 수출에 크게 성공했지만 앞으로 반도체가 그 생산에 필요한 관련 기계나 그를 사용하는 제품의 국산화로 연결되지 못하면, 그 장래를 낙관하기 어렵다는 것이 외국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결국 기술개발을 통하여 자본재 및 수출용 소재·부품의 국산화와 수출에 주력하지 않으면 국제수지 적자구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결론이 된다(한은정보, 1996년 3월호, pp.16∼28)

한편 한국은행 자료에 의하면 90년의 우리나라 산업구조는 대체로 70년대의 일 본 산업구조와 비슷하다. 1990년의 우리나라의 제조업 비중은 49.5%인데 이것은 1970년 일본의 49.6%와 거의 같고 서비스 산업도 한국의 32.5%(1990년)와 일본의 33.7%(1970년)는 거의 같다. 한국경제는 일본에 비하여 아직도 20년이 뒤떨어져 있다고 할까……

이상과 같은 문제점을 생각할 때 우리가 앞으로 더욱 역점을 두어야 할 공업은 대별하여 두 가지 분야가 아닌가 한다. 첫째는 중화학공업 혹은 중장물(重長物) 제품분야이고 둘째는 소재와 부품분야이다. 자동차, 철강, 트럭, 건설장비, 발전기, 선박과 같은 중장물에 대한 수요는 중국 및 기타 후진 지역의 개발이 진행될수록 계속 증가할 것인데 선진국은 이 분야에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으므로 우리가 끊임없이 품질을 개량해 나간다면 시장 확보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소재와 부품에 관해서는 첨단산업일수록 부품의 종류가 많고 모델의 변화가 심하므로 경 영의 신축성이 높은 중소기업의 소량 다품종 생산체제가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중소기업을 기술집약적 소재와 부품생산으로 유도하여 국 내는 물론 외국의 첨단산업에 공급할 수 있는 체제로 재편하는 것이 오늘의 가장 시급한 과제라 할 것이다. 우리 중소기업 중에는 이미 앞을 내다보고 이 분야에 진출한 기업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한편 대만의 중소기업들이 미국 NASA에 정밀부품을 공급하고 있고, 각종 첨단기술을 이용하여 전자제품, 사무기기, 완구, 운 동기구 등의 경공업 분야에서 아세안 NIEs를 리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중소기업의 위기

그런데 지금 중소기업의 부도율과 폐업율이 사상 최고라 한다. 당국자의 말에 의하면 폐업율이 높지만 개업율도 상당히 높다고 한다. 그렇다면 개방화의 충격으로 구조조정을 위한 신진대사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으나 반면에 중소기업들이 제조업을 버리고 서비스 업종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제조업은 힘들어서 못 하겠고 서비스업으로 돌아볼까 한다는 중소기업자의 말을 종종 듣는다. 중소기업이 제조업 특히 수출산업을 외면한다면 이것 또한 국제수지 악화에 보탬이 될 것이다. 정부는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하여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소기업 들은 언제나 자금난을 호소하는데 자금난은 경영난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닐 경우 가 있으므로 그 배후에 있는 경영난의 실체를 파악함이 중요하다. 기술, 인력, 판로, 제품선택 등에 관한 근본문제를 알아내고 그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자금지원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나는 중소기업의 미래상을 상상해 본다. 금방 덴마크가 머리에 떠오르는데, 덴 마크는 전형적 농업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NATO에 공급되는 군용 항공기 (F16) 부품의 큰 부분(약 40%)을 이 나라 농촌에 깔린 중소기업들이 생산한다고 한다. 덴마크의 중소기업은 소수 특화업종에서 최고급품을 만드는 전략으로 크게 성공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지난 3월 26일 83세의 생애를 마치고 작고한 데이비드 파키드가 생각난다. 그가 동업자 빌 휴렛과 스탠포도대학이 위치하는 팔로 알토市의 조고마한 차고에서 전 자제품 개발에 착수한 것이 오늘의 유명한 휴렛패커드사의 시발이요, 세계에서 유 명한 캘리포니아주 실리콘 밸리(전자공업단지)의 요람이기도 했다. HP의 성공담 은 중소기업에게 몇 가지 중요한 시사를 준다. 첫째로 두 사람은 이 회사의 이름을 결정할때 H가 먼저냐, P가 먼저냐를 동전을 던져서 결정한 후 오늘날까지 동 업자의 약속과 신의를 지켜왔다. 둘째로 소량 다품종체제로 첨단기술제품을 만들어 오늘의 성공을 가져왔다. 셋째로 스탠포드 대학의 프래드 터맨 교수와 손잡고 스탠포드 비즈니스 파크에 제일 먼저 입주한 후 다른 중소기업들을 유치함으로써 실리콘 밸리를 건설하는 데 지도적 역할을 했고 산학협동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끝으로 그는 감원 해고를 한 일이 없고 종업원 지주제를 제일 먼저 실시한 기업 주의 한 사람이었고, 60억 달러 이상의 패커드 재단을 만들어 놓고 이 세상을 떠 났다. 닉슨 정부 때 3년 동안 국방차관보를 지내기도 하였지만 가장 재미없는 직 책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우리나라에서도 들을 수 있다. 필자가 원고작성에 사용하는 '한글'은 서울대학 학생들이 개발한 워드프로세서라는 말을 들었다. 이 제품생 산으로 그들은 크게 성공하여 유력한 회사의 주인이 되어 있다. 앞으로는 대학 졸업생들이 대기업의 회사원이 되는 것보다 새로운 지식과 안목으로 중소기업에 투 신하여 크게 성공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대학과 중소기업들이 힘을 합쳐서 우리의 실리콘 밸리를 창출하는 날이 와야 한다. 아니 올 것이다. 이러한 미래상을 바라 보고 지금은 업계와 정부가 산업정보의 전파, 기술지도. 신제품 개발, 판로개척 등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때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개방화 시대를 맞이하여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를 보는 눈이 달라져 가고 있다. 이제는 양자가 긴밀히 협력하지 않으면 어느 쪽도 살아남기 어렵다는 인식이 높아져 가고 있다. 개방화 시대에는 대기업이 경영자원을 국제적으로 배치하고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국제경쟁 일선에서 활약하고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생산과정의 일익을 담당하여 대기업의 세계적 경영전략을 뒷받침하는 상호 의존관계가 일반화할 것이다. 이점을 암시하듯이 지금의 이른바 경기의 양극화 현상(대기업은 호경기, 중소기업은 불경기) 속에서도 대기업에게 딸려 있는 소기업들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라는 말을 듣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관계는 어디까지나 대등과 신의를 바탕으로 해야 하 지만 현실적으로 강자와 약자 사이에는 불평등이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전횡(專橫)에 고난을 겪으면서도 거래관계가 끊길까봐 말도 못 하고 굴종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금융에 있어서의 불평등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그러므로 공정거래의 차원에서 정부의 엄격한 감시와 감독이 필요한데 지금의 실 정으로서는 공정거래법의 내용이 불충분하고 행정의 손이 중소기업 보호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일본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불평등 관계 가 없는 것은 아니나, 대체적으로는 상호 신뢰가 두텁고 대기업들은 기술개발과 정에 관계 중소기업을 참가시키는 등 중소 계열기업을 가족처럼 보살피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본의 계열화가 외국기업의 참여를 방해한다고 하여 미국의 거센 반발을 받고 있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끈끈한 유대관계가 일본산업의 경쟁력을 키워 온 비밀이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의 중소기업은 예나 지금이나 자금난을 절규하는데 오늘의 민주화 시 대에는 정부가 제아무리 금융기관에게 자금지원을 종용해 보았자 은행들은 담보 가 없고 위험부담이 큰 중소기업을 기피하고 있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다. 차라리 금융기관이 중소기업의 신용도에 따라 차등금리를 적용하도록 내버려 두면 오히려 중소기업으로 자금이 더 흘러갈지 모른다.

그런가 하면 대기업은 날이 갈수록 융자받기가 쉬워진다. 대기업, 특히 재벌 기업집단은 경영의 건전성이나 자산상태보다, 그룹 내 금융기관 소유와 강력한 자금 조달 능력 때문에 부도 날 염려가 없고, 따라서 은행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고객이 된다. 당연히 재벌기업으로 대출이 편중되고, 대출이 편중되니까 재벌은 더욱 비 대화하고, 재벌이 커지니까 금융력은 더욱 커지고…… 이러한 상승적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가운데 중소기업은 융자받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정부는 공정거래법, 독점규제법, 은행법 등을 통하여 기업집단에 대한 편중융자에 제동을 걸고 있기는 하나 공정한 금융질서 확립을 위하여 좀더 효과적인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하기야 개방화가 이러한 상태를 완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 앞으로 금융시장의 개방화가 진전됨에 따라 대기업들은 해외에서 저리자금을 조달하는 길을 찾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국내금리도 점차로 낮아지고 중소기업들도 융 자 받기가 좀더 쉬워질 것이다. 다만 대기업들은 국내은행의 지급보증 없이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야 한다.

대기업과 재벌

개방화에 따라 대기업 혹은 재벌기업을 보는 눈이 달라져 가고 있다. 먼저 개방화 시대에는 대기업의 규모와 범위의 경제성(Economy of Scale and Scope) 을 무시할 수 없다. 선진 각국에서 기업합병을 통한 기업조직의 대형화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제는 경영자원을 전 세계에 배치하여 생산, 선전, 유통면에서 세계적 차원의 최적화를 추구하는 판인데 그것은 대기업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에게도 소수나마 대기업이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라 할 것이다.

대기업이라 하면 누구나 재벌을 생각하게 되지만 대기업과 재벌은 구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선진국에는 대기업은 많지만 재벌은 적거나 거의 없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한국통신, 한국전력, 포항제철 등은 대기업이지만 재벌은 아니다. 재벌은 족벌 중심으로 기업집단을 소유하고 산하기업을 통괄적으로 지배하는 기업조직을 말 함인데 선진국에서는 세대교체와 상속을 통하여 점차 독립적인 기업 군으로 해체되어 왔고 우리의 재벌도 점차로 같은 경로를 밟게 될 것이다. 그를 촉진하기 위하여 기업공개, 자본과 경영의 분리, 산하기업간 내부거래의 제한, 여신한도제, 중소기업 업종에 대한 참여규제 등의 정책이 실시되고 있는데, 특히 재 벌은 문어발식 다각경영을 지양하고 전문분야에 경영자원을 집중하여 경쟁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한편 이러한 대책과 병행하여 재벌 창업주들이 좀더 기꺼이 그리고 쉽게 공익 사업에 참가할 수 있고, 그를 통하여 창업의 공로와 사회적 봉사가 선양될 수 있는 사회적 풍토와 제도적 장치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이에 관련된 일이지만, 사회복지정책은 정부의 전유물이거나 정부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민간부문의 자발적인 참여와 창의적인 사업을 통하여 사회복지 수준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정부는 민간부문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하여 조세정책을 활용할 수 있는데, 정부 당국자들은 세수 감소이유를 들어 조세 감면에 인색한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정부가 직접 복지사업을 경영한다면 조세 감수 이상의 손실을 보게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차라리 민간 출연에 매력적인 조세 특전을 부여하여 민간, 특히 재 벌로 하여금 복지사업에 참가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국민 복지수준 향상의 지름길이 될 것이다.

한국경제의 내일

이상에서 삼화의 변화 속에서 우리 경제가 직면한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는데, 거기에서 우리는 삼화가 오래되고 낯익은 문제들에 대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동시에 우리의 난점들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을 보아왔다. 그렇다면 한국경제의 장래 또한 새로운 의미를 가질 것이다. 먼저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의 새로운 의미를 생각해 보자.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하자

남북관계를 둘러싸고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치 관계가 미묘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중국, 러시아, 몽골에 이어 북한도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다만 시간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78년에 경제개혁을 시작한 중국은 그동안 급속한 성장을 계속하여 지금의 추세로 가면 21세기 초에 그 경제규모가 미국을 능가하게 될 전망이다. 중국 공식통계에 의하면 1991년의 중국의 1인당 GNP는 370 달러로 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의 가격은 시장가격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으로 평가한 GNP는 크게 저평가 되기 마련이다. IMF는 국제 구매력 평가를 적용하여 1,450달러로 추정하였고, 전 세계은행 주임경제학자인 로렌스 서머스는 2,500달러로 추정한 바 있다. 후자의 추정을 따르면 중국의 GNP는 2004년 경에 그리고 전자의 추정을 따르면 2010년 경에 미국을 능가한다는 추정이 된다. 1)

동부시베리아 지역은 아직 발전 궤도에 올랐다고 할 수 없으나 풍부한 자연자원을 가지고 있어 경제적 잠재력은 대단히 크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경제대국 일본이 있고 서쪽에는 거대한 중국 경제가 있고, 남쪽으로는 성장과 발전의 불이 붙은 동남아시아 지역이 있고, 북쪽으로는 시베리아가 우리 국토에 근접해 있다. 그야말로 우리나라는 동북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우리의 주변국가들이 발전할수록 한국의 경제적 역할은 시장, 교통, 산 업 각면에서 비약적으로 증대할 것이므로 이러한 지정학적 이점을 살려 나가는 것이 한국경제의 앞날을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특히 교통 측면을 보면 한반도는 해운, 육운, 항공에 있어서 전략적 위치를 차 지하고 있다. 해운에 있어서는 일본의 주요 항만은 일본 동해안에 위치해 있어서 중국으로 가자면 현해탄으로 우회하던가, 아니면 서해안의 소항인 니가다(新瀉), 쓰루가(津賀)항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반하여, 우리나라의 부산, 군산, 인천항은 세계 각 지역에서 중국 동북부 및 시베리아로 왕래하는 선박의 중계지 역할을 할 수 있다. 육운에 관하여는 지난 3월 16일 ESCAP 지역경제협력위원회가 한반도, 중국, 몽골, 러시아, 카자흐스탄을 연결하는 동북아 횡단철도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키로 합의했다는 발표가 있었고, 같은 시기에 개최된 아시아 유럽정상회의 (ASEM)에서도 아시안 하이웨이(Asian Highway)사업을 적극 추진키로 하였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사업이 완성되면 한국이 아시아와 유럽을 해운과 육운으로 연 결하는 요충지가 될 것인데 여기에서 파생되는 경제적 효과는 매우 클 것이다. 항 공에 있어서는 일본과 경합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으나 공항의 편리도에 따라서 는 개발 중의 인천공항이 동북아의 관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지정학적 여건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21세기의 한국은 가장 역동적인 나라가 될 것인데 그러자면 중국은 물론 시베리아, 몽골 그리고 북한의 경제 개발이 촉진되어야 하고 또 그를 위하여는 서방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자본과 기술이 이 지역으로 대량 투입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는 아직 지역적 경제협력기구가 전무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1990년 이래 여러 국제 회의에서 '동북아시아 개발은행' 설립을 제창하여 왔는데 점차로 식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2)

우리 정부도 이 구상에 대하여 적극적인 검토가 있기 바란다. 다음의 논문들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의 좌표 -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

한국이 동북아는 물론 국제사회에서 적극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려면 먼저 한국 자체를 그에 적합한 모습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살기 좋고 사업하기 좋은 나라로 바꾸어 가는 것이다. 홍콩, 싱가포르에 왜 사업체가 모여들고 관광객들이 운집(雲集)하는가? 살기 좋고 사업하기 쉬운 곳이기 때문이다. 평화와 자유가 있고 사업하는 데 편리한 시설과 정책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국이 동북아에서 홍콩, 싱가포르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우리가 그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대만이 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대만은 동북아에 관한 한 지정학적으로 우리보다 불리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러한 구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를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자면 우선 사회간접시설을 대폭 확충해야 한 다. 조속한 시일 내에 지금의 교통지옥을 해소해야 하고 항만시설과 컨테이너 부 두를 대폭 확장해야 하며 영종도 신공항을 세계 최첨단의 공항으로 건설하여야 한다. 환경을 철저히 보존하여 그야말로 삼천리 금수강산을 되찾아야 하고 상하수도를 비롯한 생활시설을 확충하여 쾌적한 도시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러자면 장기에 걸쳐 집중적인 재정투자가 필요한 데 그를 위해서는 비생산적 전시사업 따위는 최대한 뒤로 미루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조간신문의 논단을 보 니 한 교수가 이렇게 쓰고 있다. 이미 시작한 사업인 영종도 공항과 경부고속전철은 예정대로 추진하여 물류비용을 줄여야 하는데도 아무도 제대로 챙기지 않는 반면, 새 정부 들어서서 이것저것 즉흥적으로 계획하는 사업은 많다. 정부는 이 충고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세계화의 구호하에 정부의 정책 스타일이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기업활동에 대한 불필요한 정부의 간섭과 규제가 많다는 소리가 높고, 사업하기 힘든 나라라는 내외의 정평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생각컨대 지도 자들의 경제 운용방식과 원칙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고, 일부 공무원들의 타성 때 문에 개혁이 늦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무엇을 규제하고 안 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데에서 풀어야 할 규제를 풀지 않는가 하면, 풀어서는 안 될 규제를 푸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사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계속 해서 정책과 제도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

세계화와 민족주의

우리가 진정으로 세계화를 원한다면 우리의 의식구조부터 바꾸어 나가야 한다. 세계화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측면이 있지만 그것은 국경, 민족, 국가, 국적의 의미가 점점 흐려져 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인류 역사는 민족, 국가, 계급 사이의 불행한 대립과 싸움으로 점철돼 왔고 그러한 싸움은 지금도 지구상의 이곳저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대세로서 민족과 국가의 경계가 흐려진다는 것은 동시에 민족과 국가간의 뼈아픈 과거를 새로운 세계관으로 용해해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대부분의 나라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지향하는 가운데 인류 공동체의 인식이 높아져 가고, 보편적 가치기준이 보다 명백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를 바로 세운다고 해서 불행했던 과거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에서 각성을 얻고 극복 함으로써 그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입으로는 세계화를 떠들면서 실제의 사고방식은 옛날의 민족주의 틀 안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예를 흔히 본다. 물론 우리의 민족주의는 지난날 항일 독립투쟁의 정신적 지주였고,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업을 앞에 둔 우리로서 민족관념을 버릴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물며 세계에서 보기 드문 민족적 단일성과 문화적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로서 어찌 민족적 긍지를 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세계화 시대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 혹은 식민주의 시대의 그것과 달라 야 한다. 국적과 국경을 넘어 세계를 무대로 활약해야 하는 판에, 불행했던 과거에 집착하여 민족감정을 외교관계에까지 끌어들이려 하고, 약간의 힘이 생겼다 하 여 배타와 허세를 일삼는다면, 국제사회에서 빈축을 사는 외에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동북아에서 밝은 미래를 열어 가자면 한말(韓末) 이래 한 반도에서 마주쳐 온 4강들, 즉 미국, 러시아, 중국, 그리고 일본과 선린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상호 이익을 극대화는 길을 택해야 한다. 예컨대 오늘의 민족주의는 지나간 역사에 대한 화풀이가 아니라 묵묵히 우리의 자강(自强)을 도모하고 우 리의 전통과 문화를 보편적 가치의 한국적 특징으로 살려 나가는 운동이어야 한 다고 생각한다.

남북통일에 대비하려면

요즈음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심상치가 않으나, 앞으로 가까운 장래에 통일이 오든 않든 북한으로 인한 경제부담이 증가하리라는 것은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북한에 약속한 원자력 발전소 건설비용(30억 달러 이상)도 그 일부이다. 이러한 특수사정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국제수지를 더욱 주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고로 서독은 오랫동안 국제수지 흑자를 축척해 오다가 1990년에 통일이 되면서부터 적자국으로 반전하였는데, 통일 직후 서독의 국제 경상수지의 추이 1989년 +1,080억 DM, 1990년 +761억 DM, 1991년 -329억 DM, 1992년 -391억 DM이며 독일의 재정적자도 1989년의 540억 DM에서 1990년의 1,240억 DM, 1991년의 1,340억 DM으로 격증하였다(출처: Deutsche Bundesbank, Monthly Report 각년). 막대한 흑자를 쌓아 두었기에 큰 곤란 없이 지내고 있다. 서독의 경험이 말해 주듯이 통일에는 내자뿐만 아니라 막대한 외자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통일 또는 통일과정에 대비하여 '남북협력기금'을 설치한 것은 그런 대로 뜻이 있으나 외화의 뒷받침이 없으면 큰 의미는 없다. 기금을 축적한다 하더라도 - 축적될지도 의문이지만 - 그것을 일시에 풀면 통화증발이 되고, 그로 인한 인플레 효과를 상쇄하자면 수입증가 = 외화지출이 불가피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에 대비하는 첫째 조건은 국제수지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밖에도 통일 또는 그 전단계에 대비해야 할 과제는 너무나 많다. 우리는 쉽게 통일 운운하지만 통일을 위한 군사적 통합, 정치적 통합, 경제적 통합, 그리고 문화적 통합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다. 질서있는 통합에 실패하면 큰 변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경제적 통합만 하더라도 결코 간단치 않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로 소유제도 특히 토지소유제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 독일과 동구의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 전환 경험이 참고가 되기는 하나 우리의 실정과는 거리가 있다. 독일과 같이 토지의 소유권을 원소유자에게 되돌려 주자는 주장이 나올 것인데 독일은 그렇게 하 였다가 크게 후회하고 있는 터이다. 남한에서는 경제발전 과정에서 급격한 지가상 승과 소수에 의한 소유독점이 있어 심각한 경제·사회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북한이 이 전철을 밟을 필요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자면 깊은 연 구가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통일이 되면 북한에서 총체적 개혁이 있어야 하겠지만 남한에서도 수정해야 할 일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그러한 문제들을 예견하고 우리 자신의 문제부터 풀어 나감으로써 북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 것이 곧 통일에 대비하는 기본이다.

우리 자신이 고쳐야 할 사항의 비근한 예를 하나 들기로 하자. 미구에 남북간의 환율이 문제가 될 것이다. 북한에서는 1달러대 약 2원이 무역환율이라 하는데 1992년 현재 공정환율은 1달러당 0.94원, 무역환율은 2.16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화폐가치는 북한 돈의 약 4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는 계산이 된다. 이는 우스운 이야기인데 하여튼 어떻게 환율을 정할 것인지 지금부터 연구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에 관련하여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 남한에서는 억(億)이니 조 (兆)이니 하는 화폐 단위를 사용하는데 이 천문학적 화폐단위를 북한 주민들은 어떻게 볼까? 이북 주민은 고사하고 우리 자신도 이 과대한 화폐단위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 그것은 돈의 가치를 경시케 하고, 계산을 어렵게 하고, 토큰이라는 의제화폐를 유통시키고, 회계 처리에 불편을 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모양이 좋지가 않다. 1994년의 GNP는 약300조, 금융자산 총액은 1,554조 원인데 조 다음에 오는 화폐단위가 경(京)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개방체제하에서 물가도 상당히 안정되었으니 이제는 원화의 디노미네이션 (denomination : 예를 들면 10,000원짜리 지폐를 100원으로 바꾸는 따위의)을 생각해 볼 필요는 없는 것일까? 이러한 평가 변경은 화폐개혁과는 전혀 다르다. 그 것은 공개적으로 사전에 예고하고 구 화폐와 신화폐를 교환하는 동시에 모든 문 서상의 금액단위를 고치는 외에 어떠한 변화도 필요치 않다.

일본이 360엔대 1달러의 환율을 유지하던 1970년대 중반에 그러한 디노미네이션을 거론한 일이 있고, 최근에도 재론된 일이 있는데 그에 수반되는 문제점으로는 끝수절상으로 물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일례로 10,000원을 100원으로 하면 10,059원짜리 물건이 100원 59전이 아니라 단수를 절상하여 101원으로 둔갑하여 0.4%의 가격인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국제수지 흑자가 누적되는 가운데 환율이 오늘의 100대 1선에 이르게 되니 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은 반감된 셈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러한 가능성은 바라기 어려운 만큼, 고액 화폐단위 사용의 문제점을 해소하고 앞으로 있을 남북간의 경제교류 내지 화폐통합을 고려하여, 다소의 문제점이 있다 하더라도 디노미네이션을 적극 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이상에서 통일에 관련된 과제의 몇 가지 예를 들었는데, 하여튼 우리는 경제 운 영에 있어서 항상 통일 전후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사전에 대책을 강구해 나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경제력을 배양하는 일이 중요한데, 그를 위하여 수출과 저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지금의 젊은이들은 구세대의 상투문자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국제수지 적자가 우리 경제의 기본적 약점으로 남아 있고 남 북통일 전후의 비용부담을 생각할 때 우리의 현재 경제력으로는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우리는 자만과 허세를 버리고 계속 땀흘려 일하고 저축과 수출증대에 힘써야 한다.

과학과 교육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은 우리의 머리와 근면의 덕택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21세기는 과학과 지식의 시대가 된다.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지식을 흡수하는 것도 벅찬 일인데, 거기에서 창발력을 발휘하여 남보다 한 거름 앞서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이 분야에서 선진국에 뒤떨어져 있음은 물론인데,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한 체제만은 갖출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체제를 갖추자면 우선 우리의 교육부터 개혁해야 한다는 각성에서 교육 개혁심의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개혁안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경제인의 입장에서 몇 가지 주문을 하고 싶다.

먼저 지금의 청소년들은 입시전쟁의 환경 속에서 단편적 지식의 암기에 쫓기다 보니 과학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하에서는 창의성이 없고 편협한 사회관과 세계관을 가진 인재들이 배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과거의 부실한 대학교육의 대가로서 일류 기업들은 재훈련에 막대 한 비용을 쓰고 있다고 불평한다. 교육방식의 일대 전환이 요구되는 까닭이다.

둘째로 우리 민족성의 약점을 극복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 약점의 하나는 서로 협력할 줄 모르는 데 있는 것 같다. 필자는 일본의 어느 정치 지도자로부터 농 담 아닌 농담을 들은 일이 있다. 한국인과 일본인을 1대 1로 맞붙이면 한국인이 이기지만 3대 3으로 붙여 놓으면 일본인이 이긴다라는 것이다. 바라건대 협력이 몸에 배고 체질화되는 교육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실질보다 외관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옛날의 선비들은 나물 먹고 이쑤시며 농사짓기를 거부했고, 오늘의 사람들은 실력보다 간판을, 인물보다 지연을, 품질보다 상표를 중요시하는 불합리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 팔짱 끼고 좋은 소리하는 사람은 애국자이고 각박한 현실을 타개하려고 흙탕물에 뛰어든 사람은 몸에 흙을 묻혔다 하여 매도되는 경우가 많다. 허세나 상징으로 위상이 높아진다고 착각하여 큰소리를 치거나 불필요한 돈을 쓰는 경우도 있다. 중국인들은 겉으로는 가난하고 속으로는 부자인데, 우리는 거꾸로 외화내빈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러한 우리의 문화적인 약점을 고치는 데에는 아무래도 국민교육의 도움이 필요하다.

끝으로 장인정신 - 요샛말로 한다면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에 관하여 한마디 하고자 한다. 우리 수출상품에 있어서 항상 끝마무리가 문제되어 왔고, 국내에서는 부실공사가 말썽이 되어 왔는데, 무엇이든 적당히 해 버리는 버릇을 고치지 않고서는 한국사람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2류에 그치고 말 것이다. 다른 나라의 미장이나 목수들은 일이 더디기는 하지만 일의 질은 완벽하고, 좀더 빨리 적당히 하라고 하면 화를 낸다고 한다. 자기의 직업과 기량에 대한 강한 자존심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직업에 귀천이 없고, 저마다 하는 일에 긍지 와 자존심을 갖는 장인정신이 산업에 충만할 때 한국은 경제대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장인정신을 길러 내는 데에 교육의 힘을 빌리고 싶다.

맺음말

이상에서 삼화(三化)시대에 직면한 우리 경제문제의 성격을 살펴보고 미래를 열어 가는 우리의 좌표를 그려보았다. 평범한 문제들을 내 나름대로 정리한 것에 불과한데, 전혀 언급은 없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해결하는 관리능력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정치권, 행정부 및 기업을 포함한 민간단체의 기능인데, 민간단체와 행정부의 관리능력은 그런 대로 자리가 잡혀 있다. 정치권이 가장 큰 문제인데 이번 총선에서 젊은 세대가 많이 당선되었다 하니 일단 기대를 걸어본다.

      


1) William H. Overholt, China the Next Economic Supower pp. 20∼21

2) D. W. Nam, "Changing Pattern of Economic Interaction in Northeast Asia", In Serach of a New Order in East Asia,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Burkeley, February 1990;
D. W. Nam, "The Prospect of Economic Cooperation in Northeast Asia", presented at the Conference on Economic Cooperation in Northeast Asia, Tianjin, September 1991;
D. W. Nam, "Multilateral Economic Cooperation in Northeast Asia", presented at the 5th Meeting of Northeast Asia Economic Forum, Niigata, Japan, Feb. 16∼18, 1995;
Hiroshi Kakazu, "Regional Cooperation and the Northeast Asian Development Bank", presented at the 5th Meeting of Northeast Asia Economic Forum, Niigata, Japan, Feb. 16∼18;
and Stanley Katz, "A Northeast Asian Development Bank", presented at the 6th Meeting of the Northeast Asia Economic Forum, Honolulu, Hawaii, January 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