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대국과 세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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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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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세계경제는 미국, 일본, EC 등과 같은 경제대국들의 성장 속도, 그리고 그들이 선택하는 국내정책 및 대외정책에 따라 그 동태가 결정되고 다수의 개도국들은 경제대국의 영향에 대하여, 그것이 비록 불리한 것이라 하더라도 -물론 유리한 경우도 있지만- 속수무책일 경우가 많다. 지금 한국을 포함한 많은 개도국들은 선진국의 보호주의의 압력하에서 심한 진통을 겪고 있는데 이것 또한 경제대국 특히 미국과 일본 및 EC의 경제사정과 그들의 정책선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본고의 목적은 미국의 국내거시정책(Macro Policies)이 대외적 보호주의 정책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설명 해보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에는 상대방의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1.미국의 무역적자

미국은 1981년이래 무역수지가 급격히 악화하는 국면에 접어들어, 지난해의 무역적자는 1200억 달러를 넘었고, 금년에는 1500억 달러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와 같은 무역적자의 누적으로 미국은 1919년 이후 처음으로 순채무국으로 전락되어 내년에는 순채무액이 10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미국의 무역적자는 몇몇 나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에 대해 무역역조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무역적자는 1976년부터 늘어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지난 수년간에는 대폭적인 무역역조가 계속되어, 그 나라의 수입과 경쟁하는 산업들이 일반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지금 미국에서는 여러 산업들이 비명을 울리고 정부에게 수입을 막아 달러고 요구하고 있는데, 그러한 산업들은 대개 일본의 높은 생산성과 신흥 공업국들의 저임금과 경쟁하기 어려운 산업들이고, 이 산업들이 심각한 경영난과 실업문제에 봉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미국의 국제수지 악화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논자에 따라, 과거 10년간 미국의 기술개발투자가 타선진국에 비하여 뒤떨어져 왔다는 것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고, 미국 근로자의 생산성의 저위를 말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일본과 몇몇 선진공업국의 비약적 진출에 따라 국제비교우위가 변화한 탓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보호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미국이 국내시장을 개방해 놓고 있는 반면에 미국의 교역상대국들은 무역장벽을 높이 쌓고 불공정거래를 일삼고 있는데 에 큰 원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의 지적들이 모두 옳다 하더라도 그 요인들만으로는 미국의 국제수지악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 결국 미국의 수출과 수입은 거래상대국과의 가격경쟁력에 크게 좌우되는데 가격경쟁력은 교역상대국 통화간의 환율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비교될 수가 없다. 따라서 무역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국내요인들이 환율에 어떻게 반영되느냐에 따라 사정은 크게 달라진다. 가령 위에서 언급된 미국의 생산 면에 불리점이 있다 하더라도 엔/달러 환율이 그것을 상쇄할 정도로 약세 화하면 미국기업들은 수출의 채산을 맞출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국내물가가 올라가서 수출이 불리해질 경우 환율을 올려서 (즉 우리 통화가치를 약세화하여) 수출을 촉진하는 경우와 마찬가지 이치이다. 그런데 미국의 달러의 가치는 약세화 하기는커녕 1981년 이후 계속 강세 화하여 지금은 그때에 비하여 30-40%가 고 평가된 상태에 있다. 이것은 교역 상대국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 수출품의 국제가격이 1981년에 비하여 30-40%가 비싸진 반면 수입품의 국내가격은 30-40%가 싸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하에서 미국의 무역수지가 계속 악화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미국정부 스스로도 1980-84년간에 증가한 미국 무역적자 850억 달러 중 600-700억 달러는 달러화의 과대평가에 기인한 것이라고 공언한 바가 있다.

이러한 달러의 과대평가에 힘입어 많은 나라들이 미국에 대한 수출을 늘림으로서 경기회복에 큰 도움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고 우리의 경우에도 미국의 경제회복과 달러의 고 평가 덕택으로 1984년에 대미수출이 30%나 신장할 수 있었다. 이점을 들어 미국의 어떤 논자는 미국은 과거 수년간 막대한 무역적자를 감수함으로서 다른 나라들의 수출신장과 경기부양을 도왔으니 결국 뜻한 일은 아니지만 "80년대의 Marshall Plan"을 실시한 꼴이 되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 대가를 감내 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2. 달러의 과대평가

그러면 미국의 달러가치가 급상승한 원인은 무엇일까? 달러의 교환가치도 다른 상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의 상대관계에 의하여 결정된다. 먼저 지난 수년간의 달러에 대한 수요는 주로 경상수지 적자 국 및 부채 국의 차입수요 및 각국의 유동성(현금) 준비를 내용으로 하는 것인데, 국제기관들의 추정에 의하면, 1982-84년간의 국제외환시장에서의 달러에 대한 수요는 년간 850-950억 달러 선을 밑돌지 않았다 한다. 그런데, 공급측면에 있어서는 1981년의 1190억 달러 수준에서 매년 감소하여 1984년에는 210억 달러로 감소하였다는 것이다. 수요는 대략 불변인데 공급이 격감하면 달러가치는 오르게 마련이다.

달러의 공급이 격감한 데에는 몇 가지 사정이 있다. 먼저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상업은행들이 개도국에 대한 대출을 기피한 사정을 들어야 한다. 세계경제의 불황으로 원유를 비롯한 제일차상품가격이 은행들의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크게 하락하였고 개도국의 부채문제가 심각해진 금융위기 하에서 개도국에 대한 대출은 극도로 위축되고 작년의 경우에는 대출보다 회수액(이자 포함)이 더 많은 지경에 이르렀다. 하기야 일본과 같은 흑자 국들이 자금수요가 많은 적자 국들에게 자금을 충분히 흘려주었더라면 사태는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사실인즉 일본의 잉여자금은 주로 미국으로 환류 하였으니 작년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 규모는 500여억 달러에 달한다.

흑자 국의 자금이 미국으로 환류하는 데에는 또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달러가 강세화 할 때에는 그것만으로도 달러화 선호의 투기성향을 자아낼 수 있는 것인데 -적어도 얼마동안- 그에 더하여 미국의 금리는 일본에 비하여 4-5% 정도나 더 높은 상태이고 보면 일본의 은행이나 투자가들이 무역에서 번 돈으로 미국의 예금증서, 증권, 또는 부동산을 사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역설적이지만 미국은 일본에 대해 자본시장 개방과 거래의 자유화를 촉구하는 압력을 가해 왔는데 그 결과로서 일본의 대미 자본유출은 한층 용이해졌고,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외국인투자가 세법상 매우 유리한 점마저 있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방대한 경상수지적자가 있는 만큼 이러한 고금리에 의한 자금환수는 필요한 일이었다. 하기야 달러는 미국의 국내통화이자 국제통화의 구실을 하고 있으니까, 국제수지적자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방대한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자금을 환수하지 않고 오히려 국제외환시장에 대한 자금공급을 늘려 금리를 떨어뜨리고 달러의 강세화를 견제하는 정책을 쓰려면 쓸 수도 있다. 그러나 급증하는 재정적자에 직면하여 달러화의 과잉공급으로 인한 국내 인플레를 염려하는 미국 연방준비은행은 줄곧 긴축적 통화정책을 고수해 왔다.

3. 미국과 일본

이리하여 미국 통화당국의 긴축정책과 고금리는 연방정부의 터무니없는 재정적자의 누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무려 2000억 달러를 넘어선 미국의 재정적자는 늘어나는 무역적자와 함께 미국경제운영상의 기본 문제로 되어 있는데, 세출삭감 및 세수증대방안에 대한 정치적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좀처럼 해결의 계기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국내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고금리의 문제, 국제외환시장에 대한 달러 공급 부족의 문제, 거기에서 유래하는 달러 과대평가의 문제, 그리고 지금의 거센 보호주의 물결은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하기야 문제는 미국 측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만성적 무역흑자를 쌓아올리고 있는 경제대국 일본의 역할에도 문제는 있다. 일본은 세계 경제의 조정자적 역할을 담당하여 국내경기를 진작하여 수입수요를 늘림으로서 무역흑자를 줄이는 한편,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경제원조를 대폭 확대함으로서 세계경제 전반의 활기를 회복하는 데에 기여해야 할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역할에 소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무역장벽을 철폐하는 데에 인색하다는 국제사회의 평을 듣고 있다.

4. 세계경제의 당면과제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은 미. 일을 주축으로 하는 국제경제의 드라마가 오늘의 미국 보호주의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동시에 세계경제질서의 재검토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현재의 국제통화제도가 당초에 기대했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원래 국제통화제도는 가맹국들의 경상수지의 불균형을 어느 정도까지 자동 조절하는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어 왔다. 즉 전통적인 사고에 의하면, 한나라에서 경상수지상의 적자가 확대하면 외환시장에서 그 나라의 통화의 대외가치가 하락하여 기업들의 입장에서 보면 수출이 유리해지고 수입이 불리해지므로 점차 경상 적자가 줄어들고, 흑자의 경우에는 반대 방향의 조절이 일어나서 경상수지가 균형화의 방향으로 조절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동 조절기능이 작동하자면 환율이 고정상태에 있어서는 아니 되고 경상수지상태를 반영하여 신축적으로 변동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현재 IMF가 채택하고 있는 "변동환율제도"의 기본 논리인데 그러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미국의 경우에는 경상수지의 급격한 악화에도 불구하고 달러의 대외가치는 떨어지기는커녕 지나친 상승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미국의 경험이 우리에게 일러준 것은, 금리 차와 안전성을 추구하여 자본이 국가간에 자유롭게 이동하는 오늘에 있어서는 환율은 이미 경상수지를 조절하는 기능을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현재의 변동환율제도는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위의 사정과 관련하여 국제 준비 통화(International Reserve Currency)로서의 달러의 역할에 대하여도 의문이 제기된다. 세계경제의 원활한 진행과 성장을 위해서는 적정한 국제유동성이 공급되어야 하는데, 그 공급이 세계경제 전반의 정세를 가늠하는 견지에서가 아니라 미국의 국내사정과 정책선택에 따라 결정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이점을 고려하여 1973년에 인위적으로 SDR이라는 국제통화를 만들어 내기는 하였지만 그 창출이나 운용 면에 있어서 아직도 세계화폐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IMF는 일찍이 1950년대에 영국에 대하여, 국제수지 적자에 대처하는 차관공여를 계기로 하여 국내거시정책에 대한 권고와 감시를 한일이 있었는데 오늘의 IMF가 미국에 대하여 과연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셋째로, 미국의 의회는 보호주의정책으로 미국의 무역적자 내지 산업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나, 위의 분석으로 보아 그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미국의 수입을 제한하면 할수록 국제외환시장에 대한 달러 공급을 줄이게 되고 그에 따라 달러화의 시세는 더욱 상승하여 무역수지 악화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가장 큰 잠재적 수출시장의 하나는 개도국인데, 이들에 대한 자금 공여를 줄이고 그들로부터의 수입을 제한하면 할수록 미국은 수출시장만 잃어 가는 꼴이 되고 개도국의 미국은행에 대한 부채상환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다. 외지 (International Business Week, August 12, 1984)에 의하면, 미국은 1980-84년간에 개도국들의 수입감소로 인하여 이미 180억 달러의 수출과 100만 명의 일자리를 잃었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GATT의 무역체제는 이미 무너진 거나 마찬가지이다. 1950년대 이후의 세계의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은 개방된 자유무역체제를 지렛대로 했던 것인데, 지금은 세계교역의 30%이상이 각종 규제에 묶여 있다. 1982년에 전후 처음으로 자유세계의 교역량이 전년에 비하여 마이너스 1%의 후퇴를 기록하더니 금년 (1985)에도 같은 상태가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IMF 보고에 의하면 금년 상반기의 개도국전체의 수출이 5% 이상이나 감소하였다니 말이다.

넷째는 개도국의 부채 문제이다. UNCTAD 사무국 보고서에 의하면, 1983연말 현재의 개도국 부채잔액 7000여 억 달러 중 절반 가량은 1979년 이후의 부채라 한다. 그것은 1978년 10월에 시작된 제2차 석유가 인상의 여파와 더불어 제일차상품 가격의 폭락과 국제금리의 상승이 가져온 결과였다. 1981-83년간에 제 일차상품 수출개도국이 본 손실은 약 280억 달러에 달한다 하며, 1980-82년간의 이자지불총액의 거의 절반은 1979년 이후의 고금리에 기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도국의 부채문제가 던지는 세계경제상의 기본문제는, 첫째로 이제는 원리금 상환부담 때문에 국제 금융자본이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역류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84년의 경우 은행부채상의 이자율은 평균 11%인데, 선진국 은행대출 증가율은 1%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많은 후진국들은 수입을 극도로 억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후진국의 경제성장을 제약했을 뿐만 아니라 후진국에 상품을 수출하는 선진국의 경제에도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은 이미 미국의 경우에서도 본 바와 같다. 둘째로,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자금의 역류현상이 계속되어, 후진국들이 제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 대외부채의 중압에서 헤어날 가망이 없다고 절망할 때, 채무이행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만약 몇몇 후진국들이 채무이행의 포기를 선언할 때 그것이 국제금융계에 미치는 효과는 헤아릴 수 없다.

다섯째로, 자유세계가 당면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세계경제의 성장에 따라 매우 다양화하고 다각화한 상호의존관계를 어떻게 조정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른바 Management of Interdependence라고 하는 문제이다. 대별하여 선진국, 중진국, 후진국으로 구분되는 각 진영 내부와 상호간의 이해 갈등을 적절히 관리하는 국제기능이 없으면 오늘의 복잡한 세계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자유세계의 가장 중요한 국제적 경제기구는 IMF와 GATT라고 하겠는데 우선 회원국들은 이 두 기구, -특히 GATT의-의 조정과 감시기능을 강화하는 데에 합의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지금 선진국들이 제안하고 있는 New Round의 다국간 무역협상도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 한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5.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이상과 같이 세계경제는 풀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세계경제질서의 개편을 요구하고 있는 문제들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세계경제질서의 개편과 같은 엄청난 문제는 세계대전이나 세계적 대공황과 같은 참변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 해결의 전기를 맞이하기 어렵다고 비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는 과거와 달러 문제의 이해와 처방에 관한 의견의 수렴이 불가능한 일이 아닌 만큼, 경제대국들의 리더십과 국제적 협조에 기대를 걸어 본다. 우선 세계경제의 난국을 헤쳐 나가는 데에는 아래와 같은 처방이 실행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1. 선진국과 개도국은 다 같이 무역장벽을 완화하고 불공정거래를 지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2. 미국은 재정적자를 해소하고 금리를 내리는 조치를 취해야 하며 개도국에 대한 금융자금 공급을 확대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이점에 관련하여 IMF 서울 총회에서 Baker 미국 재무장관이 향후 3년간 200억 달러의 금융자금을 개도국에게 공급하자고 제의한 것은 시의 적절하나 그 규모가 너무나 적고 그 구체적 방법이 제시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3. 미국, 일본, 및 EC는 현재의 국제 환율체제의 왜곡을 시정하도록 협력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지난달의 5개국 재상회의에서 달러화의 약세화를 위한 개입조치에 합의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나, 근본문제가 미해결로 남아 있는 이상 지속적 개입 가능성에는 의문이 있다. 하여튼 달러가치의 하락을 도모하되 일시의 급격한 하락은 피하도록 흑자 국간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4. 공동개입에 따라 원화의 가치가 상승하면, 일본의 수출감소-성장둔화-수입감소 무역흑자 불감소라는 의외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으므로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국내투자를 확장하여 경기후퇴를 예방하는 한편 명실상부한 시장개방 조치를 취하고 개도국에 대한 자금공급 및 기술이전을 대폭 확대하여야 한다.
  5. 선진국 및 개도국은 New Round의 다국간 무역협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보다 개방적이고 공평한 새로운 세계무역 질서를 확립하여야 한다.
  6. 국제 경제협력기구인 IMF, IBRD, GATT의 기능을 재검토하여 그 효능과 국제 관리 및 조정기능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우리의 대응

우리 나라와 같은 경제소국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경제대국에 의하여 지배되는 세계경제의 파도를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난국에 처하여 보다 슬기로울 수 있는 지혜란 어떤 것일까?

먼저 우리 나라도 국제사회의 일원, 특히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일원이니 만큼, 그에 상응하는 국제적 책임과 역할을 마다 할 수는 없다. 국제사회에서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이나 태도는 통할 수 없다. 일례로 외국 간행물의 판권이나 저작권을 무시하고 해적판을 발간하는 등의 지적소유권의 침해는 어차피 정당화 될 수 없는 일이다. 흔히 후진국임을 내세워 선진국의 야박함을 탄 하는 소리가 있지만, 국제사회는 이미 한국을 후진국으로 보지 않고 있을 뿐더러 후진국이라 하더라도 정당한 요구 앞에 구차한 애걸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떳떳하게 후진국 대우에서 졸업하고 국제사회에서 보다 큰 발언권을 얻도록 노력하는 것이 국익을 수호하는 데에 유리할 뿐 아니라, 자강을 도모하는 자세이다. 수입의 단계적 개방도 이러한 시각에서 받아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기야 수입개방이나 외국지적소유권 보호를 위한 국내조치가 해당산업에 타격을 주는 만큼, 해당 기업과 정부간의 협력을 통하여 적응의 고통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할 필요는 있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사람들은 우호친선관계 운운하지만, 실제로는 이해관계가 있을 뿐인 것 같습니다." 1970년대 초에 일본과 미국사이의 경제마찰로 고민하고 있던 일본 외상은 사석에서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던 일이 생각난다. 필자는 외상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우리는 국제관계를 생각할 때 감정적 요소에 지나친 비중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가령 어떤 2국간 경제문제를 놓고, 우리의 "혈맹"인 미국이 그럴 수가 있느냐, 일본이 우리에게 그럴 수가 있느냐 하고 분개하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국가간의 우호친선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양국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바탕은 될지언정, 그 자체가 이해관계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친 감정론은 오히려 국민적 미성숙으로 보아지기가 쉽다.

국제적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원리는 이른바 상호이익(Mutual Interest)의 원칙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강대국과 경제마찰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상호이익이 되는 해결방안이 무엇인지를 일단 계산해 두어야 한다. 어느 선에서 양보할 것인지는 우리측 입장의 논리적 정당성, 교섭과정 또는 교섭방법에 따라 달라지지만, 상호이익이 되는 방안을 열심히 찾다 보면 의외로 제3의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보호주의에 대처하는 하나의 방도로서 수입 국과의 공동생산 혹은 협업생산의 사례가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일은 상호이익의 원칙에 의한 문제해결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일방적 이익을 고수하다가 전부를 잃는 것보다는 양방의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이 될 뿐 아니라 경제관계의 우호적 터전을 넓히는 일도 된다. 외국 기업인들로부터 한국의 기업들은 상호이익의 관념이 희박하다는 평을 들은 일이 있는데, 비지네스 성공의 길의 하나는 상대방과의 상호이익을 찾아내고 그것을 성실하게 추구하는 일이 아닌가 한다.

국제간의 상호이익추구가 중요하다 하더라도, 상호이익의 배분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제각기 자기의 이익을 크게 하고자 씨름하는 과정에서 외교 내지 협상의 기술과 능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점에 관련하여, 외교상의 경험이 일천한 우리로서는 남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여기에서 다만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각국별로 경제 외교를 담당할 수 있는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언어소통이 완전히 자유롭고 그 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동태에 정통하며 그 나라를 움직이는 인사들과의 광범한 지면관계를 쌓아올린 외교전문가들이 있다면 지금과 같은 한미간의 상황하에서 얼마나 유용하게 쓰일 수 있겠는가. 우선 급한 대로 공무원제도를 좀더 개방하여, 외국에 주재하는 공관장들이 현지인 또는 현지에서 훈련된 교포를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위에서 생각해 본 대응책은 임기응변 책에 불과하다. 선진국 보호주의에 대처하는 근본 대책은 좋은 상품을 좋은 값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물건 값에 비하여 품질이 타국 제품보다 월등히 우수하면, 팔 곳은 반드시 있다. 뿐만 아니라 상품이 우수하면 수입제한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본의 자동차수출의 경우에서 볼 수 있었다. 일본이 수출을 자제하자 미국에서 일제 차의 가격이 크게 올라 일본 업계는 오히려 횡재를 했다고 한다. 상품의 다양화와 고급화에 성공하면 시장의 다변화도 쉬워진다. 우리의 근본대책을 위하여 기술투자의 확대, 부품과 소재의 개발, 중소기업의 육성이라는 3대 과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끝을 맺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