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씨를 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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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신문 1993년도 신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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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몇 시간 내에 대륙과 대양을 건널 수 있고, 몇 분내에 세계방방곡곡에 뉴스가 전파되며, 몇 초 사이에 자산이 국경을 이동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교통. 통신 기술의 혁명적 발달이 가져온 결과인데 그에 대하여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정보혁명의 시대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적 혁명의 결과의 하나로서 국경의 의미가 점점 흐려져 가고 있다. 세계의 대기업들은 물론 중소기업들까지도 이제는 생산, 유통, 기술개발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국제적으로 배치하여 전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겨냥하는 경영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무역상의 국제적 비교우위와 분업관계가 재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경을 초월한 치열한 국제경쟁 속에서 선진국들은 첨단기술 제품과 서비스산업에서 절대적인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고, 중진국들은 선진국에서 이미 표준화된 기술을 도입하여 중장물(重長物), 부품을 비롯한 어느 정도 기술 집약적 제품생산에서 경쟁우위를 찾는 한편, 종래의 노동집약적 경공업생산은 후발 개도국으로 넘겨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분업의 재편 과정에서 확실하게 한 자리를 잡지 못하는 나라는 21세기 경제경쟁에서 뒷전으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21세기는 군사경쟁이 아니라 경제경쟁의 시대가 된다. 미국, 독일, 일본이 세계경제 무대에서 주역을 맡게 되고, 그들이 위치한 북미주, EC, 동아시아가 세계경제의 중심 권이 될 것이다. 역사의 흐름은 지구주의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21세기의 전반부는 지역주의가 우세한 시대가 될 것이다. EC, NAFTA에 자극되어 동아시아 또는 동북아시아에도 경제협력체가 생길 것이고 이들 지역간의 경제마찰이 때로는 긴장을 고조시키지만, 한편 GATT와 같은 다변적 국제기구의 역할이 강조되기도 할 것이다.

동아시아는 경제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지역이 될 것이고 특히 중국의 급속한 경제진출은 아시아는 물론 세계경제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줄 것이다. 한편 일본경제는, 노년층의 증가, 노동력 부족, 청소년들의 의식변화와 같은 내적 요인과, 국제적 지도력 부족 등의 외적요인으로 지속적 고도성장이 어려워질 것이고, 그럴수록 일본기업들은 해외에 진출하여 경영 거점을 확보하려 할 것이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한국은 양국으로부터 성장요인을 최대한 흡수하고 넓어지는 세계시장을 잘 활용하면 앞으로 제2의 경제도약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살릴 수 잇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주로 국내정치의 국가경영 능력과 국민들의 자질 향상 여부에 달려 있고, 통일이 도래할 경우 그 변화를 어떻게 소화하느냐 에도 달려 있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21세기를 내다보고 지금 우리는 무슨 씨를 뿌려야 할 것인가? 먼저 우리의 정치적 병폐를 고치는 씨를 뿌려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연립내각이 출현하였고 공명선거를 바라는 국민의식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고조되었던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으나, 반면에 이 나라의 정치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바라보고 실망한 점도 없지 않았다. 거짓과 기만과 부정부패가 정치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렸고 정치는 이 나라의 도덕적 타락의 근원이 되어 왔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을 것이 아니냐"는 대중들의 반문 앞에 지도자의 위신과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이 나라를 끌고 갈 견인차가 없다고 탄(嘆)하는 사람이 많다. 한나라의 흥망성쇠는 궁극적으로 그 나라의 도덕적 역량에 좌우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인데, 우리의 정치적 병폐를 고치지 못한다면 21세기의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보잘것없는 후진국으로 전락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대통령 당선자는 돈 안 들고, 깨끗하고, 생산적인 정치를 구현하겠다고 소리 높게 공약하였는데, 기필코 이 공약이 지켜지기를 기원한다. 한편 "한나라의 국민들은 그들에게 걸맞은 정부를 가지게 마련이라" 하였으니 국민들도 이제는 대오 각성하여 정치정화 노력에 적극 협조해야 할 것이다. 우선 선진국의 경우와 같이 돈이 적게 드는 선거 제도를 창출하고, 정치자금은 정당이 공개적으로 조달하여 공개적으로 사용하고 공공적 감시와 감사를 받게 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하겠는데, 이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와 동시에 "검은 돈"의 "세탁"이니 뭐니 하는 말이 이 땅에서 사라지도록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로 21세기를 위하여 시급히 씨를 뿌려야 할 곳은 국민교육의 분야이다. 교육개발을 위한 정부시책이 추진되고 있음을 환영하는 바이나, 21세기를 내다보는 교육의 중점이 좀더 선명하게 부각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 나라 국민성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교육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국민성의 약점을 고치지 않고서는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국민이 될 수 없고 세계적 경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바와 같이 우리 국민성의 약점중의 하나는 협동에 약하다는 점이다. 말로는 동포, 동족, 동향, 동기, 동창 등을 내세워 동류의식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그"동"의 사회 내에서 반목과 갈등이 그칠 날이 없으니, 공자가 말씀하신 동이불화(同而不和)의 양상이 바로 이것이다. 생각컨데 동(同)을 강조하는 이면에는 남을 부정적으로 보려는 시각이 숨어 있고, 남과의 타협이나 협력을 굴종(屈從)으로 생각하는 심성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살려 가자면 우리는 입장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같지 않은 사람들끼리 손잡고 협동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즉 공자가 말씀하신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원리를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일본의 어느 저명인사가 나에게 던진 농담 아닌 농담을 잊을 수 없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1대1 로 대하면 한국인이 이기지만 3대 3으로 대하면 일본인이 이긴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인의 자질이 우수하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러한 개인들이 모여서 함께 일을 하게 되면, 모래알 같이 흩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느 외국대사는 한국인은 sandy 하다고 평한 일이 있다. 이 국민성의 약점을 극복하자면 보통의 교육방법으로는 안될 것이고, 모든 교육의 측면에서 의식적, 계획적으로 협력이 몸에 배도록 훈육하고 또 훈육하는 독특한 교육방법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 교육에서 또 한가지 강조할 점은, 독일의 경우와 같이 직업교육을 국민교육의 중심에 두고 실생활을 통하여 이념과 도덕과 예의를 가르쳐, 생각과 행동이 통일된 인격을 길러내는 것이다. 이념과 행동이 동떨어진 기성세대가 교육을 입시준비 수단으로 타락시키고 말았지만, 이제는 공부 못지 않게 도덕과 질서를 존중하는 교육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고상한 이념보다는 그를 위하여 치러야 할 자율과 책임의 대가를 더 강조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방종과 무질서, 그리고 맹목적 이기주의를 바로 잡지 않으면 이 나라의 장래는 밝다고 할 수 없다.

21세기의 씨를 심는 셋째의 과제도 교육에 관련되는 것이지만 과학기술 개발을 특히 강조되어야 한다. 지금 정부에서는 과학기술개발 계획을 세워 부분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각급 학교, 연구소, 정부, 기업의 역할분담이 적절하게 배합되는, 좀 더 현실적이고 종합적인 계획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 현실의 단면을 보면, 대학의 연구시설과 교수진이 빈약을 면치 못하고 있는 반면에 외국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온 과학자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놀고 있음을 본다. 더욱 놀라운 것은, 믿을 만한 국제단체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공학, 자연과학계통의 박사학위 소지자 수가 대만의 3배 이상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특허획득 건수는 대만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엔가 우리의 시스템에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 기능인력의 훈련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여 인력부족이 생기는 반면, 인문고교의 수가 실업고교보다 월등히 많은 것도 문제이다. 21세기의 경제경쟁은 결국 기술경쟁에서 판가름이 날 것인데, 우리는 지금 과학기술 분야에서 좀 더 확실한 포석(布石)을 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통일에 대비해야 하겠는데, 먼저 북한의 현실을 무시한 감상적 통일론을 경계하여야 한다. 북한의 공산주의 독재체제는 이제 그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데, 그 내부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북한의 체제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예상할 수 있는 사태를 상정하고 그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것인데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의 경제력의 축적이 근본문제가 된다. 통일기금을 비축한다 하지만, 외환의 뒷받침이 없으면 별로 의미가 없다. 통일 과도기에 비축된 자금을 일시에 풀면 인플레를 야기할 것이니 이를 예방하자면 대량의 물자수입이 필요하고, 수입에는 외화가 있어야 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채무국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과거의 서독과 같이 평소에 국제수지 흑자를 누적 시켜야 한다. 국제수지 흑자야말로 통일대비의 필수 조건이니 우리는 통일을 위해서도 열심히 일하고, 근검절약 하여 수입을 절감하고 수출을 늘려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