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화 시대의 경제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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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2월 외교안보연구원 강연  


 

오늘 '개방화 시대의 경제정책'이라는 제목으로 이 귀한 자리에서 강연을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미리부터 양해를 구할 것은, 앞으로 본인이 제시하는 견해는 본인이 정부에 있을 때 펴나간 정책방향과 상반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 당시와 지금의 여건에는 크나큰 변화가 있었고 따라서 정책방향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당시의 여건하에서 나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자기 주견대로 정책을 펴나갈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나, 생각만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어 지금에도 같은 생각을 표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독자는 이 점을 널리 양해해 주기 바란다.

개방화의 논리

국내시장에 범람하는 외국상품을 볼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앞으로 국내산업은 어떻게 될까? 외제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국민의식도 문제려니와 수입품이 국산보다 가격이 싼 경우가 많다는 것도 문제이다. 이 나라 경제를 생각하는 사람은 개방화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개방화는 잘못된 선택일까?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필요 불가피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다만 선진국, 특히 미국의 통상압력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다. 미국의 경제사정 - 재정 및 무역적자의 누적, 산업 경쟁력의 상대적 후퇴 - 의 악화와 다국적기업의 경영전략이 맞물려서 개방화를 촉진하는 통상압력으로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1) 설사 미국의 통상압력이 없다 아니었다 하더라도 교통, 통신기술의 혁명적 발달과 국제무역과 해외투자의 확산이 개방화를 역사적 추세로 만들었을 것이다.2)

하여튼 개방화는 우리 경제정책의 전면적 전환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개방화가 아니더라도 우리경제의 현재 발전단계에 소응(昭應)하여 어차피 단행해야 할 정책수정이 개방압력에 의하여 더욱 촉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개방화는 발전적인 것이다. 지금 정부는 다각적으로 경제정책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는데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거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한 문제들의 이론적 기초를 짚어보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규제완화

개방화 시대에 상응하여 정부는 정부기구를 개편하고 각종 규제의 완화를 추진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료주의의 타성 때문에 규제완화가 피상적이고 미흡하다는 소리가 높다. 필자가 보기에도 당국자들이 무엇을 규제하고 무엇을 규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근본적인 정책전환보다는 지엽말지에 속하는 절차 간소화나 인허가 범위의 축소 같은 것에 머물러 있는가 하면, 시류에 밀려 보다 엄격히 규제해야 할 사항을 오히려 완화하는 사례도 있는 것 같다.

무릇 규제의 적부(適否)를 판단하는 데에는 적어도 다음의 다섯 가지 사항이 고려되어야 한다. 즉 규제내용과 방법이 (1)시장의 메커니즘에 의한 자원 배분을 왜곡하고 경쟁을 제한하지 않는가? (2)이른바 '시장실패'로 사익과 공익이 층돌하고 있는가? (3)부정부패를 유발할 소지가 있지 않은가? (4)소수의 잘못을 다스리기위하여 불필요하게 대다수를 통제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5)규제의 실효성이 있는가?라는 것이다.

(1)의 기준에 관하여는 정부의 가격통제를 예로 들 수 있다. 택시요금과 공급을 통제하기 때문에 택시 잡기가 어렵게 되어 시민과 외국인들에게 불편을 주게 된다. 병원의 의료수가를 지나치게 통제하니까 의료시설의 확충과 개선이 늦어지고 결국 환자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수년 전에 서민용 아파트의 가격을 시장가격 이하로 통제한 결과 추첨으로 아파트를 배정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서민용 아파트가 돈 있는 사람들의 투기대상이 되는가 하면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까다로운 사후 규제를 도입했으나 그 실효는 거의 없었다. 차라리 경쟁입찰에 부쳐 시장가격대로 팔도록 하고 기업의 과다이윤을 조세로 흡수하여 서민용 임대 아파트를 지었더라면, 투기도 일어나지 않았고 정작 가난한 서민에게 혜택이 갔을 것이다. 시장기능을 무시한 얄팍한 선심정책이 역효과를 가져온 본보기라할 것이다. 이런 따위의 규제를 완화 내지 철폐하는 것은 시장경제 메커니즘에 관한 깊은 이해와 용단을 필요로 한다. 개방화 시대에는 바로 그것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2)의 기준에 의한다면 안전, 환경오염, 위생 및 식품관리 등 공익증진에 필요한 직접 규제는 필요 불가결하고 방법과 절차는 간소화, 투명화하되 규제내용을 완화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3)의 기준에 관하여는 각종 특혜정책이 문제가 된다. 특혜정책을 시행하자면 수혜자가 그것을 남용하거나, 비대상자가 끼어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까다로운 기준과 규제를 마련하게 되는데 그 운용과정에서 부정부패가 介在하게 마련이다. 규제와 부패가 동반자적 관계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4)에 관하여는 일부 공익단체의 비리때문에 모든 공익단체를 일률적으로 규제하는 것이 그 일례이다.

(5)에 관하여는 전술한 아파트 당첨자에 대한 사후규제가 그 일례인데 그밖에도 실효 없는 규제는 많다. 선거법, 정치자금법을 제대로 지키는 정치인은 거의 없다고 한다. 하여튼 확실한 기준에 따라 보다 과감하고 근원적인 규제완화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규제완화와 개방화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기업들이 변화하는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자면 정세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해야 하는데 정부의 복잡한 규제에 묶여 있으면 그것이 어려워진다. 한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과거에는 특정산업의 보호 내지 육성을 위한 선별정책을 폭넓게 시행해 왔는데, 이제는 WTO 체제하에서 그러한 선별정책들은 후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정부행정을 간소화하고 부정부패를 줄이는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정부가 규제를 완화하고 민간기업 내지 금융기관 등에 대한 간섭을 최소한다면 정부가 앞으로 경제분야에서 주로 할 일은 거시정책 운용과 과학기술 개발과 교육을 포함한 각종 공공사업이 될 것이다. 시간관계로 후자는 논외로 하고 개방화에 직면한 거시정책 측면만을 보기로 한다.

산업정책

앞에서 개방화 시대에는 정부의 산업보호 내지 육성정책이 후퇴하게 된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앞으로 산업정책은 설 땅이 없어지는 것일까?3)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방법이 달라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종전과 같이 조세, 금융상의 특혜정책은 점차로 사라져 가겠지만 다른 간접적 수단으로 특정산업을 지원하는 일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예를 들면 그 산업분야의 과학기술을 개발하고 직업교육과 훈련을 강화하며, 정보매체를 활용하여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전파한다든가 지방정부의 공업단지 조성을 유도한다던가 하는 일 등은 산업정책의 수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개방화 시대에는 특정산업을 위한 선별적 산업정책보다 모든 산업을 위한 일반적 산업정책이 더 중요해진다. 소량 다품종 생산이 강조되는 지금에 있어서는 정부가 장래의 비교우위 산업이나 품종을 예측하기 어려워졌고, 주로 기업들이 변화하는 국제시장 동향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비교우위 품종이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그것을 바란다면 각종 규제를 풀어 기업들이 유연하고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들의 경쟁력을 저해하는 모든 요인들을 제거해 나가야 한다. 예컨대 교통, 항만시설을 확충하고, 과학기술 개발을 촉진하고, 학교교육을 쇄신하고, 필요한 정보전달과 훈련을 강화하는 등의 일반적 산업정책이 보다 긴급한 과제가 되고 있다.
일반적 산업정책도 중요하지만 개방화 시대에는 환율, 금리, 물가, 투자, 저축, 국제수지 등 거시정책 변수의 균형과 안정을 유지하는 일이 특히 중요해진다. 거시정책 변수가 적정상태에 있지 못하면 다른 모든 경제정책이 뒤틀리게 마련이고 기업의 국제경쟁력에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개방화 시대의 국제경쟁에는 정책경쟁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거시정책을 제대로 운영하는 나라는 경쟁력이 강해지고 국제사회에서 경제적 지위를 높여 갈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는 점점 국제경쟁에서 낙후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거시정책 운영에는 여러 가지 미해결의 문제가 있다. 고금리, 통화의 만성적 팽창, 인플레 경향, 국제수지의 구조적 적자, 환율변동의 불합리 등이 그것이다. 먼저 금리 문제부터 보기로 하자.

금리와 금융개방

지금 외부로부터 금융개방 압력이 가중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국제금리와 국내금리 사이에는 2배의 격차가 있으므로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은행들은 본국에서 6∼7%의 저리 자금을 조달하여 한국에서 원화로 바꾼 다음, 13∼14%의 고금리로 운용하면 그것만으로 6∼7%의 마진을 챙길 수 있다. 이 어수룩한 장사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 부분적으로는 하고 있지만 - 한국정부의 외환거래에 관한 규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본국 정부나 의회에 호소하여 한국정부에 개방압력을 가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당장 외환시장을 개방하는 데 적어도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의 문제를 설명하자면 먼저 환율 결정방식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우리의 환율은 종전에는 정부가 결정해 오다가 80년대 말경에 IMF의 권고를 받아들여 시장적 변동환율제로 이행하였다. 이 제도는 환율이 외환시장에서 수요·공급의 실세를 반영하여 자동적으로 결정되게 하는 것인데, 그 근거에는 고전적 시장이론이 깔려 있다. 즉 변동환율은 각국의 국제경상수지를 균형화의 방향으로 조절하는 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한국의 국제 경상수지가 흑자기조를 지속하면 국내 외환시장에서 외화의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여 외화의 원화가격, 즉 환율이 하락할 것이다. 그로 인하여 수출이 불리해지고 수입이 유리해지면 국제수지는 점차 균형점으로 되돌아온다. 반대로 경상수지가 적자일 때에는 외화에 대한 수요초과가 발생하여 환율이 올라가고 그로 인하여 수출이 늘고 수입이 줄어 경상수지는 다시 균형점으로 회귀할 것이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컴퓨터 통신망으로 연결된 오늘의 세계 각처의 금융시장은 마치 하나의 시장처럼 작동하고 있고, 거기에서 결정되는 환율은 한 나라의 경상수지 변화를 반영한다기보다 금리차를 노리는 국제간의 단기자본 이동을 반영하는 면이 훨씬 우세하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환율이 경상수지 조절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항차 무슨 방법으로 IMF 회원국 상호간의 대외균형을 도모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 지금 국제통화체제가 직면한 문제인데, 그 점은 논외로 하고 당장 우리에게는 자본시장 개방과 관련하여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외국의 단기투기 자본이 유입되면 외환시장에서 외화의 공급이 증가하여, 예컨대 달러당 가격이 800원에서 750원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의 수출은 위축되고 수입이 장려되어 경상수지가 악화된다. 사실상 한국의 경상수지는 1990년 이래 만성적 적자 기조를 보이고 있으므로 환율이 올라가야 할 국면인데 거꾸로 하락한다는 모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문제이다.
둘째로 단기자본이 유입하면 그것은 주로 중앙은행에서 원화로 환전되므로 한국은행 밖으로 통화가 증발되는 결과가 된다. 통화량의 만성적 팽창이 인플레 요인의 하나인데 단기자본이 일시에 밀어닥치면 통화관리가 매우 어렵게 된다.
셋째의 문제는 단기자본의 투기성과 관련된다. 국내에 유입된 단기자본은 예고 없이 쉽게 빠져나갈 수 있다. 가령 사람들이 한국에 정치적 불안이나 군사적 위험이 발생했다고 생각하면 외국인, 한국인 할 것 없이 외환시장에서 원화를 팔고 달러를 사려 할 것이니 환율이 폭등하고 외화보유고가 격감한다. 중앙은행의 자금조작이 매우 어렵게 되고 잘못하면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외환 시장에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될 수도 있다. 1994년 12월 멕시코에서 단기자본의 대량 유출로 외환위기가 발생하였고 국제금융시장이 일시 혼란에 빠졌던 일은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4) 예컨대 단기자금의 투기성, 부동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국내의 고금리가 개방의 큰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개방을 재촉하는 외국인들은 시장을 개방하여 외국자본이 유입하면 국내금리가 하락하여 내외 금리차가 평준화될 것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금리차가 해소될 정도로 외국자본을 들여와야 한다면 얼마를 들여와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으려니와 그 과정에서 위에서 말한 세 가지 문제에 직면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면 우리의 대처방안은 무엇인가? 결국 국내시장의 대내적 개방이 안된 상태에서 대외적 개방을 해야 한다는 데에서 어려움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단계적 접근이 불가피하고, 한편 대내적 개방을 촉진해야 한다. 금융산업에 대한 각종 규제를 풀어 경쟁을 도입하고 시장기능을 활성화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정부가 이러한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고 최근에는 여신금리에 이어 수신금리의 대부분을 자유화한 것은 물론 잘한 일이다. 그러나 당장에 금리가 내린다고 기대할 수는 없고, 시장의 메커니즘이 활성화되어 금리변동이 그야말로 자금의 수요·공급을 반영하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작용이 활성화되고 통화가치 = 물가의 안정이 유지되는 한, 금리는 장차 반드시 내릴 것이고 또 정부의 통화정책에 의하여 직간접으로 금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단계가 올 것이다. 이를 위하여 당국은 경쟁적 시장조건을 정비하여 금리의 하향경직성을 타파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이 점에 관련하여 영국의 중앙은행은 은행이 아닌 어음시장(discount house)을 상대로 공개 시장조작을 하고 그를 통하여 금리수준을 조절하고 있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시장기능이 활성화되어 금리의 하향경직성이 줄어들면 통화정책을 통하여 국내금리를 전반적으로 내릴 수 있고, 이러한 여건하에서라면 자본도입을 금리인하의 수단으로 원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통화정책

위에서 '통화가치 = 물가안정이 유지되는 한'이라고 하였는데 이 단서를 붙여야 할 만큼 우리의 통화정책은 아직도 불안정하다. 우리는 아직도 통화량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지키기 위하여 은행여신에 양적 규제를 가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통화증가율 18%가 금과옥조(金科玉條)같이 되어 버렸는데 여기에 어떠한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재정과 금융면에서 오는 통화팽창 압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실무자들이 만들어 낸 편법에 불과하다. 하여튼 통화가치 안정이라는 경제정책의 기본명제가 지금도 문제되는 것은 우리의 통화정책이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점에 관련하여 한국은행의 '독립'론이 주장되고 있는데 필자는 한국은행의 독립이라기보다 한국은행의 역할과 자주성을 강화할 시기임을 주장한 일이 있다. 지난날 한국은행이 정부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 하에서 안정적 통화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이유야 어떻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체로 중앙은행의 발언권이 강한 나라에서는 통화가치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선진국들은 물론 대만도 그 예에 속한다.

더욱이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재경원으로 통합된 지금에 있어서는 수입과 지출 사이의 상호 견제기능이 없어진 상태이다. 통화가치 안정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매우 불안한 상태이다. 재경원이 대통령의 지시(선거공약 실천 등), 정당과 국회의 압력, 각 부처의 압력을 한 몸에 받고 그를 소화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아무래도 정치적 편의가 통화가치 안정을 우선할 공산이 크다. 옛날에는 통화가치 안정이 개발 우선주의에 밀리다가 이제는 각종 정치적 압력에 밀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특히 지금과 같이 정치가 불안정하면 경기가 침체되고 기업들의 경영난이 심각해진다. 이러한 경우 정부나 여당은 경제상태를 정확히 판단할 겨를도 없이 경기부양책을 내놓게 되고, 그 방법으로는 단골 메뉴인 융자확대가 도마 위에 오른다. 융자확대는 대개의 경우 한은 여신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것은 후일 인플레의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정치가 불안정하면 통화가치 안정도 어렵게 된다. 중앙은행이 정치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위치에 서 있다면 좀더 신중한 대책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정책의 실수를 가리기 위하여 통화증발정책을 채택하는 경우도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과거에 정부가 국영기업체의 '국민주'를 사라고 농촌에까지 권장한 일이 있다. 그 후 주가가 폭락하고 주주들이 아우성치자 당국은 한은으로 하여금 기관투자가들에게 거액의 융자를 주어 주가를 받치게 했던 것이다. 당시의 한국은행은 수천억 원의 통화증발 요인이 발생했음을 알면서도 정치적 편의를 위한 정부지시를 묵묵히 따라갔다. 이러한 일은 선진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중앙은행과 정부 사이의 이러한 관계가 존속하는 한 이 나라의 통화가치 안정은 영원한 숙제로 남을 것이다.

이 점을 떠나 한국은행의 자주성이 요구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종래에는 금리, 환율, 통화량 등의 거시정책 변수를 정부가 각각 독립적으로 결정하였지만 개방화 시대에는 각 변수를 시장기능을 통하여 상호 연관적으로 운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선진국에서는 이러한 업무는 대개 중앙은행의 기능으로 일원화되어 있고 그 업무에 대한 정부나 의회의 간섭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래서 중앙은행은 통화정책 변수를 종합적, 일관적으로 운용할 수 있고, 또 전문성과 경험을 살려갈 수 있게 된다.

지금의 당국자들은 선배들(본인을 포함한)이 만들어 낸 구습을 일축하고 근본적으로 발상전환을 해야 한다. 개방화 시대의 경제운영의 대전제는 통화가치의 안정이라는 점을 재인식하고 그에 걸맞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한은의 자주성을 높이는 것이 그러한 장치의 일부가 되겠는데 그러자면 우선 한국은행 총재의 임기가 대법원장의 경우처럼 법적으로 보장되고 가급적 정치에서 떨어진 위치에 서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상인즉 한은 역사상 임기를 채우고 나간 총재는 네 사람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은 총재가 정치에서 멀리 있으려면, 금융 스캔들로 국회에 불려 나가는 일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은행감독국을 정부에 넘겨 주는 일도 생각해 볼 만하다. 오늘까지는 금융사고가 발생하면 주로 재무부 장관이 국회에 나가 공격을 받았는데, 만약 한은이 독립하여 한은 총재가 국회에 나가 논란의 대상이 된다면 중앙은행의 위상이 손상되고 한은 총재의 임기가 매우 불안정하게 될 뿐 아니라 한국금융 전체의 대외신용도가 떨어질 우려가 있다. 과거에 정부가 한은의 독립성을 유린하였다는 비난도 받아왔지만, 만약 한은이 개발년대에 금융정책의 최종 책임을 졌더라면, 한은은 항상 정치에 휘말려 들어 그야말로 그 위상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고, 그로 인하여 국제적 신용도가 땅에 떨어져서 외자도입이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외국의 은행들은 한국은행의 지급보증을 요구하는 겅우가 많았지만 우리는 중앙은행의 위상을 생각하여 그를 단연히 거절하고 외환은행이나 산업은행 지급보증만을 고집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통화가치 안정이라는 경제운영의 기본축을 지키려면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제도(Federal Reserve System) 총재(임기 7년, 연임 가능)와 같이 정치적 순결을 유지할 필요가 있지까 한다. 외국에서 중앙은행을 흔히 로마 법왕청과 비유하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금융과 자원배분

최근까지 민간기업의 대형 투자계획에 대하여 정부가 간섭해 왔다. 자동차 산업의 투자도 그 일례인데 당초에 정부는 중복투자라 하여 신규·참입(參入)을 불허한다더니, 최근에는 기업의 투자활동에 간섭하지 않겠다 하여 그를 묵인(?)한 모양이다. 정부의 정책 선회가 개방화의 방향과 어긋나는 것은 아니나 이에 관련하여 금융기관의 자원배분 기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과거에는 잘했든 못했든 정부가 민간의 투자사업을 지도해 왔는데 앞으로 정부가 그 역할을 포기한다면 대형 민간투자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기능은 누가 맡게 되는 것일까?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민간은행이 맡아야 한다. 그런데 과연 지금의 민간은행이 그러한 책임을 완수할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가 문제이다. 자고로 정부는 은행을 불신하여, 그 운영에 깊이 간섭해 온 까닭에 금융기관들은 투자사업 평가나 대출심사 기능을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하였고, 대형 투자의 경우 정부의 지침을 기다리는 것이 습성화되기도 했다. 이제 금융기관은 이러한 구습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제 구실을 할 때가 왔다. 앞으로는 재벌의 융자신청이라 할지라도 타당성이 없다고 인정되면 "NO"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정부가 금융기관의 자율성을 높이고, 투자심사 기능을 배양하는 일이야 말로 개방화를 위한 금융정책 기본과제의 하나라 할 것이다.

여담이 될지 모르나 우리나라에서는 금융기관의 자원배분 기능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외국의 민간은행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융자대상이 되는 투자사업의 타당성을 철저히 따지게 되고, 관계기업의 능력과 경쟁조건을 세밀히 검토한다. 중복투자라면 거기에서 당연히 문제가 될 것이다. 대출을 엄격히 심사하여 이른바 Bankable Project(여신 가능한 사업)을 가려내는 은행들이 있기 때문에 사회 내의 한정된 실물자원이 비교적 합리적으로 각 용도(투자사업을 포함한)에 배분될 수있다는 것이 시장경제의 철학이다.

하기야 민간은행이라고 해서 사회적으로 올바른 판단만을 한다는 보장은 없다. 은행이 잘못할 수도 있고 잘못하면 망할 수도 있고 또 망해야 한다. 그러나 잘못하기는 정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민간에 맡겨 두면 자기가 망하지 않기 위하여 자금관리에 최선을 다할 것이고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질 것이다.

한편 외국에서는 은행에 잘못이 있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간기업 대 민간은행의 문제로 치부되고, 우리 나라에서처럼 정치싸움의 대상이 되는 일은 보기 드물다. 정치적 평화를 위해서나 권력이 개입하는 스캔들을 방지하기 위해서나 정부는 조속히 금융기관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기야 정부는 민간은행의 자원 배분기능을 보완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국책은행을 가질 수 있다. 산업은행 및 중소기업은행, 수출입은행이 대표적인 예인데 그 운영과 업무에 관하여는 개방화, 민주화 시대에 걸맞게 재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재벌과 금융

우리나라에서는 재벌에 관한 시비가 많다. 보통 재벌을 기업집단 혹은 그룹이라고도 하는데 재벌과 기업집단은 개념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기업집단은 재벌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벌은 어떤 개인(보통 창업주)이나 그의 가족이 여러 개의 기업을 소유하고 그 경영을 통괄적으로 지배하는 기업조직을 말한다. 반면에 지금 일본에서 볼 수 있는 그룹 혹은 기업집단은 재벌과는 다르다. 역사적 인연(因緣)으로 맺어진 여러 기업들이 상호출자, 인사교류를 통하여 하나의 기업공동체를 형성하고, 멤버 기업간에 다각적인 협조체제를 구축한다. 협조방법에는 생산, 유통, 금융의 계열화, 내부거래, 공동투자 공동수주, 공동광고 등이 포함되는데, 이것들은 독과점규제법 및 공정거래법의 규제대상이 된다. 공동체의 의사결정을 위하여, 비공식의 협의체(일례로 사장회의, 수요회 등)를 운영하나 멤버 기업들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침해되는 일은 거의 없다. 일본에서는 전후 미군정국에 의하여 재벌이 해체되었으나 그 후 그 뿌리가 그룹으로 되살아나서 6대 기업집단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 외에도 수많은 기업집단이 생겨났다. 우리나라의 재벌은 소유와 경영이 결합되어 있고, 그룹 내 기업간의 관계도 소유주 마음대로 결정된다.

재벌은 효율성(efficiency)과 형평성(equity)의 두 가지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겠는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형평의 견지에서 재벌을 비판하는 소리가 높다. 그러나 오늘의 국제적 동향을 보면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국내적, 국제적으로 기업간의 결합과 연계(連繫)가 유행하고, 기업집단화의 경향이 농후한데 여기에는 '규모와 범위의 경제성(economy of scale and scope)'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재벌기업집단을 논할 때에 효율성의 측면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최근 일본에서 급변하는 환경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해 '사내 분사화'를 위한 순수 지주회사의 부활이 논의되고 있는 것도 개방화 시대의 기업집단의 역할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상 우리나라의 경험을 되돌아 보더라도 기업집단의 형성이 경제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측면이 크다. 재벌기업들이 수출증대, 중화학공업 및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주역을 담당하였고 그를 통하여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업집단의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외국으로부터 자본, 기술, 정보, 경영기법 등 각종의 성장요인이 도입되었고 대량의 전문인력이 양성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효율면에서 부정적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재벌들이 전문성을 추구하여, 관련기업 계열에 투자를 집중하고, 체계적으로 기술을 축적하고 개발했더라면 지금쯤은 한국을 대표하는 일류상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무절제한 다각경영에 자원을 분산하여 나라경제에 좋지 못한 영향을 준 면이 없지 않았다. 재벌마다 자동차, 조선, 건설, 금융, 보험 등의 기간산업은 물론, 심지어 호텔, 골프장까지 필요한 것은 모두 소유하려는 위세주의(威勢主義)와 자급주의(自給主義)가 한국재벌들의 특징적 성향이 아닌가 한다.5)

둘째로 재벌기업집단의 경쟁제한 및 불공정거래 행위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것은 재벌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모든 기업집단에 해당되는 일인데, 형평의 규범에도 저촉되고 효율성의 관점에서도 문제가 된다. 특히 경쟁 제한 행위는 자원배분을 왜곡하고 소비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셋째로 창업주와 그의 가족 중심의 경영체제가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창업 초기에는 창업자 개인의 일인지배가 과감한 결단을 가능케 하고, 여러 모로 능률적인 면이 있었으나 그룹 내의 기업수가 많아지고 경영이 다각화하면 그 단점이 노출된다. 다각경영에 있어서는 전문경영인의 역할과 판단이 중요한데, 일인지배체제하에서는 회사 임원들의 자발성과 창발력이 위축되고, 무사안일에 빠져서 기업이 활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형평성의 견지에서는 부와 소득의 편중, 경제력 집중, 정경유착 등이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먼저 부와 소득의 편중에 관하여는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창업자로부터 3∼4대를 지나게 되면 상속세를 통하여 그의 재산이나 소득의 대부분이 국가로 환원될 수 있다. 우선 과세를 공명히 하고, 미국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의 개인재산과 소득을 다각적으로 공익사업으로 유도하여 사회복지에 기여케 하는 동시에 창업자의 공로와 명예도 빛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소유와 경영의 미분리 상태도 문제인데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 있으면 소유집중에 대한 사회적 반감도 줄어들고, 회사의 사회성이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대기업의 회사원들은 과거의 재벌이 남기고 간 상호에 긍지를 느끼지만, 자기 회사가 누구의 것인지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다. 사원들은 사회의 공기(公器)가 된 회사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창업자의 명예는 그 상호와 전통 속에 살아 있다. 어차피 우리도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촉진하는 정책은 바람직하다.6)

형평의 관점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경제 지배력의 집중인데, 재벌 비대화의 메커니즘은 생산, 유통, 금융 각 방면에 걸쳐 있으나 재벌과 금융과의 관계에서 극명하게 볼 수 있다. 그것을 도식화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은행으로서는 재벌기업의 막대한 거래량과 예금량을 끌어안는 것이 영업정책의 목표가 된다. 이 거대한 거래선을 소홀히 할 수가 없고 따라서 그의 대출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운데, 실은 그럴 필요도 없다. 재벌은 그룹 내에 단자회사, 보험회사, 증권회사 등을 포용하고 있으므로 자금융통력이 막강하니 어음부도란 생각할 필요도 없다. 뿐만 아니라 그룹회사간의 상호 지급보증에 의하여 법적으로 채권확보가 완벽하게 되어있으니 대출을 꺼릴 이유가 없다. 달리 말하면 재벌기업은 '규모와 범위의 경제성'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은행이 리스크가 많은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을 회피하고 재벌기업을 우대하는 것은 은행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리하여 대출은 재벌기업으로 편중되고, 재벌기업은 쉽게 동원된 자금을 이곳저곳에 투자하고 때로는 중소기업 사업영역까지도 침범한다. 정치권에 막대한 정치자금을 바치기도 하고 부실상태에 빠진 그룹 내 일부 기업을 자금력과 내부거래 지원으로 무한정 끌고 가기도 한다. 예컨대 기업의 규모와 범위가 확대하면, 재벌기업집단의 위세와 신용력과 자금조달 능력은 더욱 커지고 이것은 또다시 융자와 투자의 확대로 이어진다. 이러한 상승적 메커니즘에 의하여 우리나라 재벌은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재벌의 부정적 측면을 다스리기 위하여 독점규제법, 공정거래법, 정치자금법 등 많은 규제법령이 제정되었다. 일례로 은행법에 의하면 재벌기업집단은 금융기관 주식의 8% 이상을 소유할 수 없게 되어 있고 재벌집단에 대한 대출에 대하여는 한도관리를 받고 있다. 최근에는 상호출자, 상호 지급보증, 타기업에 대한 총출자액도 법의 규제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우회적 상호출자, 회사채의 상호인수, 주주간의 단합 등의 편법을 통하여 법망을 피해가면서 지금도 간접적으로 금융기관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금융기관이 주식인수를 통하여 기업집단에 참가하고 있지만 금융이 우월적 위치에서 집단 내 기업들을 지도하고 있는데 우리의 경우에는 거꾸로 금융이 재벌에 끌려가고 있는 인상을 준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금융기관의 자원배분 기능과 관련하여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그러면 재벌기업집단을 다스리기 위하여 어떠한 정책방향을 택할 것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전에 먼저 재벌기업집단에 관련된 국제적 통상마찰, 특히 1990년부터 계속되어 오는 미국과 일본사이의 구조조정회의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회의에서 미국은 일본에 대하여 개방화를 촉진하기 위하여 6개항의 구조조정 요구사항을 제시한 바 있는데, 그 중에는 기업 계열화의 폐쇄성을 시정할 것, 배타적인 거래관행(내부거래 등)을 시정할 것 등이 포함되었고, 91년 2차 회의에서는 소액주주의 경영참가를 위한 누적투표제도의 부활, 외국인에 대한 임원직의 개방 등을 들고 나왔다. 당초 일본인들은 부당한 내정간섭이라는 반응을 보였으나 지금은 그러한 반론이 후퇴하고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재벌에 관한 정책에도 개방화시대가 요구하는 변화에 불가피하다는 것을 정부와 재벌들이 함께 이해해야 한다.
위에서 본 필자 나름의 시각이 시사하는 정책방향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효율화의 견지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재벌과 그룹을 구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재벌적 기업집단을 개방적 기업집단으로 변형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이다.
(2)'규모와 범위의 경제성'을 추구하는 국제적 추세에 비추어 기업집단의 전문화와 대형화를 촉진하되 무원칙한 사업의 다각화를 지양케 한다.
(3)기업공개를 촉진하고 재벌기업의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유도한다.
(4)재벌기업집단을 구성하는 개별기업들의 독립성을 높여 간다.

다음에 형평화의 견지에서 살펴본다

(5)재벌 창업자들의 개인적 재산과 소득을 공익사업으로 유도하는 요인(要因)을 폭넓게 제공하고 그를 통하여 창업자의 공적과 명예를 선양케 한다.
(6)중소기업과의 형평을 고려하여 재벌의 금융지배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한다.
(7)금융기관의 합리적 자원배분 기능을 강화한다.
(8)정경유착을 단절하는 정치권의 일대 혁신과 결단이 필요하다.

이상의 정책방향은 현재의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방향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지만 정책의 일관성과 실효성, 투명성의 관점에서 현행법령과 규제방법을 다시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한다. 다시 말해서 기본적 정책방향은 재벌을 '개방적 기업집단'으로 변형하는 방향이라 할 수 있다. 하여튼 이번에 이 나라가 정치적 부패사건으로 엄청난 상처를 입었는데 이를 계기로 하여 재벌, 금융기관, 정치권 사이의 폐습을 청산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할 수 있다면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대외 경제정책

대외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발상전환이 필요하다. 먼저 국제무역 측면에서는 개방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으므로 별로 할 말이 없다. 다만 WTO의 협약을 준수 하는 한편 선진국들이 현재의 WTO 협정내용에 만족치 않고 또다시 협상 라운드를 획책하고 있음에 비추어 정부는 이해관계가 유사한 나라들과 협조하여 이에 적절히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이다.

국제간의 직접투자에 관하여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바꿀 필요가 있다. 종래에는 보호주의적 혹은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외국투자를 경계하고 그것이 참여할 수 있는 산업분야와 투자비율 및 기타 조건에 대하여 엄격한 규제를 가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외국의 개방압력에 밀려 규제를 완화해 가고 있다. 지난 개발년대(60∼70년)에는 우리가 희망하는 외국투자를 유치하기 위하여 정부와 만간이 적극적으로 뛰었지만 80년대부터는 외국투자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역설적으로 미국과 유럽 각국은 한국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하여 정부 지도자들의 방한이 잇따랐고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 또한 우리 투자를 유치하는 데 열을 올렸다

외국인들의 외국투자관은 우리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미국의 경우를 예로 들면, 뉴욕 중심가에 있는 PanAm 빌딩이 일본의 투자가에 팔려도 미국사람들의 자존심은 매연했다. 주인이 바뀌더라도 PanAm 빌딩은 여전히 그곳에 있을 것이고, 외국인들이 미국에 와서 무엇을 사고 팔든, 그들의 투자가 고용과 소득을 창출하면 그만이지 국적을 따져서 무엇 하느냐 하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사실상 세계화가 진전되면 국적, 국경의 의미가 점점 희미해질 것이다. 가령 한국의 반도체와 일본의 부품을 사용하여 중국에서 조립한 전자제품이 미국회사의 상표로 미국에서 팔리게 될 때, 그것이 Made in China인지 혹은 Made in USA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된다. 상품의 다국적화야말로 세계화의 한 단면이라 할수 있다. 다른 예로 미국 GM의 주가가 올라가면 미국의 주주 뿐만 아니라 세계에 산재한 외국의 주주들도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생산의 해외이전에 따라 실업위기에 직면한 디트로이트의 GM 노동자들은 기뻐할 까닭이 없다. 이렇게 되면 GM이 미국인을 위한 미국의 회사인지 외국인을 위한 외국의 회사인지도 막연해지고, GM이 경영난에 봉착했을 때 미국정부가 그를 지원해야 하는지도 의문시된다.

세계화의 추세가 이러하고 다른 나라들이 투자유치에 열을 올리던 80년대에, 우리는 외국투자 유치를 등한히 했고, 오히려 국내의 투자환경이 날로 악화하여 이 나라를 떠나는 외국기업의 수가 늘어났다. 우리의 처지로 말한다면, 재래상품 생산에서 경쟁력을 잃어가는 중소기업들이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그리고 대기업들이 외국의 첨단기술을 흡수하고 세계적 경영전략을 전개하기 위하여 외국기업과 적극적으로 손잡아야 할 때 에, 외국의 기업들이 한국을 외면하고 대만, 싱가포르 그리고 동남아시아로 발길을 돌렸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최근에 정부가 다시 외국투자 유치로 선회하였으나 불행히도 우리의 투자환경은 악화 일로에 있다. 교통난, 환경오염은 더욱 심해졌고, 어지럽기 짝이 없는 정치, 사회현상과 부질없는 민족적 감정주의가 외국인들의 소외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민족주의에 관해 한마디 하고자 한다. 우리는 단일민족이고 민족주의는 과거 독립운동의 지도이념으로서 귀중한 역할을 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화 시대의 민족주의는 그 개념을 달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화 시대의 민족주의는 세계의 보편적 가치의 한국적 특징을 살리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필자는 말해 왔다. 예컨대 미(美)는 보편적 가치이지만 한국적 미에는 특징이 있고 그러기에 외국인들도 그것을 소중히 여겨 준다. 사회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충, 효 와 같은 우리 고유의 가치관은 보편적 가치와 융화될 수 있는 것이니 우리는 그를 간직하고 다듬어 나가야 한다. 반면에 부질없는 배타주의나 우월감은 새로운 민족주의 개념과 거리가 멀다.

경제외교

경제외교의 목적은 국익을 신장하고 보호하는 것이지만 나라마다 같은 목적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외교관계에서 서로 이해가 맞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약소국가는 강대국의 요구를 물리치기 어렵고 따라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 외교의 기법인 양 생각한 때도 있었다. 이제 우리의 힘도 어느 정도 생겼고 세계화가 진전되고 있는 오늘에 있어서는 보다 성숙된 외교전략이 요구된다. 외교의 지도원리는 '상호이익'의 추구라 할 수 있다. 무엇이 상호이익이 되는지를 깊이 연구 분석한 끝에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 내는 외교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상대방을 설득하는 지적능력과 상호이익의 입장에서 우리의 몫을 당당히 주장하는 주체성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경제외교 - 정부, 민간을 불문하고 - 가 직면한 과제의 하나는 우리의 개방속도에 대한 선진국의 이해를 구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농업이나 금융시장 개방은 장기적으로 우리의 방향과 일치하더라도 단기적으로는 적지 않은 문제가 따르므로 정책조정에는 단계적인 접근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이 점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필요 이상으로 내부조정을 늦출 필요는 없겠으나, 정치적, 경제적 난관을 돌파하기 위하여 시간적 여유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개방화 시대 경제외교의 기본목표는 해외의 성장요인 - 기술, 투자, 경영기법 등 - 을 최대한 흡수하고 국제경제에 관한 다자간 협의에서 우리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는 것이다. 개방된 세계에는 다양한 경제기회가 산재해 있는 만큼 기업들은 밖으로 뛰고 안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 동업(同業)에 서투른 한국기업들로서는 새로운 '상호이익'의 원리를 체득하여 상호신뢰의 바탕 위에서 외국기업과 손잡을 때라고 생각된다.

맺음말

개방화 시대란 국제간의 '무한'경쟁의 시대임을 의미하는데, 국내사정을 돌이켜보면 경쟁에 유리한 조건은 별로 찾아볼 수가 없다. 교통·운수의 애로, 기술의 애로, 환경오염, 노사분규와 고임금, 고금리, 부실공사, 정치적 부패와 갈등, 범죄의 만연과 사회질서의 혼란, 권위의 부재, 기업에 대한 불신 등등 실로 암담한 상태이다. 다만 우리가 희망을 거는 것은 자유롭고 개방된 사회에서는 그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고 치유하는 자율의 힘이 솟아난다는 것이다. 비록 이 과정이 매우 혼란스럽고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국민들에게 먹고 사는 민생의 터전이 있고 외침이 없는 한 끝내 좌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대로 민생의 터전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안보상의 위협은 안심할 수 없는 상태이다. 어느 의미에서 안보와 외교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앞으로 개방화의 도전을 이겨내는 과업은 아무래도 공무원 엘리트의 분발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권에 기대해 보았자 별 수가 없을 것이고, 보다 넓은 세계관을 지닌 공무원 엘리트들이 필요한 정책전환을 수행하면서 국민들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나아간다면 우리의 앞길은 열릴 것이다.


1)이 점에 관하여는, 拙稿, "세계화의 力學과 우리의 대응 (계간 『사상』1995년 여름호, pp.294∼310)"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2)이 점은 EC의 진화과정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3)미국에는 산업정책이 없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주정부 레벨로 내려가면 여러 가지 산업정책이 있음을 알 수 있다.

4)1994년 12월 멕시코 정보가 변동환율제를 도입한 환율이 달러당 3.4페소에서 7.45페소까지 급락하였는데 여기에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과 정부간의 투쟁으로 빚어지는 정치적 불안, 국내 투자가들의 투자심리 위축으로 달러의 대규모 유출, 주가하락, 물가상승등의 불안요인이 상호 작용하였다.
페소화의 폭락, 증권시장의 붕괴와 이에 따른 남미 증권시장의 연쇄폭락, 유럽 환율체계의 동요 등으로 세계금융시장이 혼란 상태에 빠지자, 클린턴 대통령은 멕시코에 대한 400억 달러의 차관공여를 발표하였고 세계은행, IMF가 사태수습에 나서기도 했다.

5)일본에서는 이것을 'One Set 주의'라 했다.

6)소유와 경영의 분리에 관련하여 미국에서는 소유자가 아닌 고용된 사장이 경영을 맡는 것이 보통인데 주주총회에서 사장이 선임되기 때문에 사장은 주주들의 선심을 사기 위하여 단기적 이윤 극대화에만 신경을 쓰고 미래를 내다보는 선행투자에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리고 주식이 공개된 상태하에서는 경영권이 쉽게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경영이 불안정해진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에서 소유주 일인지배의 경영체제가 우월하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