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와 우리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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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5월 24일 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강연 


 

아태지역의 블록화 추세

GATT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우루과이 라운드의 다국간 협상은 6년의 세월을 보내고도 아직까지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미국, EC, 일본 및 한국의 농산물시장 개방 문제가 표면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으나 그 밖에도 미해결의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고 그 밑바닥에는 세계경제의 3대 중심인 EC, 북미주, 동아시아 지역간의 이해관계의 대립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무역환경의 개선을 위한 다국적 노력이 지지부진한 반면에 소수국간의 자유무역협정에 나타난 지역주의(Regionalism)가 성행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우리의 주변을 보더라도 아태지역(亞太地域)이 이미 3개의 무역 블록으로 분할 되어가고 있음을 본다. 즉 호주와 뉴질랜드는 이미 1983년에 자유무역협정 (Australia-New Zealand Closer Economic Relation Agreement, CER)을 체결하였고 작년 1월에는 ASEAN 정상들이 ASEAN 자유무역협정(AFTA)을 체결할 것에 합의하여 지금 구체적 협상이 진행 중에 있고, 이어서 작년 8월에는 캐나다, 미국, 멕시코 간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이 합의되어 각국 국회의 비준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아태지도(亞太地圖)상에서 자유무역지대로 색칠되어지지 않는 부분은 한국, 일본, 중국과 대만, 홍콩 등을 포함하는 동북아지역뿐이라는 결과가 된 셈이다.

그 규모나 영향력 차원에서 아태지역 내의 3개의 경제블록은 현저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AFTA와 CER은 협약국간 교역비중이 전체무역의 각각 20%, 10% 미만에 불과하여 수출시장으로서는 역내국보다 역외국이 더 중요한 입장에 있다. 그러나 NAFTA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캐나다와 멕시코는 각각 총수출의 74% 이상을 미국으로 보내고 있고 또 양국은 각각 미국의 제1위와 제3위의 수출시장이 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캐나다와 멕시코에 대한 수출총액(총수출의 28% : 1990년)은 다른 아태국들에 대한 수출총액에 미치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미국에게는 역내 못지 않게 역외무역이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것은 3국의 역외국에 대한 정책적 시각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NAFTA를 이끄는 미국은 대외정책을 전개함에 있어서, 협정국뿐만 아니라 여타의 아태국들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고 이것은 NAFTA의 지역적 이기주의를 어느 정도 견제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블록화의 역사적 배경 - 세계무역질서의 위기

근자에 지구주의(Globalism) 혹은 다국주의(Multilateralism)가 강조되면서도 실제로 유럽에는 EC, 아태지역에는 NAFTA가 군림하고 그 주변에 군소 무역블록들이 생겨나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생각컨대 세계사를 돌이켜 보면 분립(分立) 후에 통합이 오고 통합 후에 또 다시 분립이 일어나는 순환현상을 볼수 있는데 통합은 언제나 강자 -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 가 있을 때에 이루졌고 강자가 약해지면 분립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상례였다(최근의 구소련의 해체 과정에서도 그 예를 볼 수 있다).

제2차대전 후 세계주의의 이념하에 세계의 대다수 나라들이 참여한 국제기구로서 UN, IMF와 GATT 등을 들 수 있는데, GATT협약 제1조에는 이른바 '무조건최혜국대우공여원칙(無條件最惠國待遇供與原則)' 혹은 '무차별의 윈칙(無差別의 原則)'이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GATT의 원칙은 지난 반세기 동안 국제무역질서와 통상협상의 지침이 되어 왔고, 그러한 GATT 체제하에서 적어도 70년대 중반까지는 세계무역이 급신장하여 자유세계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끌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GATT 체제의 유지가 가능했던 것은 그 동안의 미국의 경제적 절대우위와 그 영향력을 떠나서 설명할 수는 없다. 미국은 동서 냉전체제하에서 구 소련 공산주의 팽창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우방국가들을 원조했다. 1950∼1960년대에 국제수지적자를 감수하면서 우방국가들에게 시장을 개방하는 한편 유럽과 일본의 경제부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공산침략을 저지하기 위하여 유럽에서는 NATO체제를 유지하였고, 아태지역에서는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한국이 공산침공을 격퇴할 수 있게 했는가 하면 월남전에 개입하다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경제적 절대우위와 지도력은 크게 약화된 상태에 있고 독일, 일본 및 NIEs 등의 경제적 진출에 밀려, 이제는 GATT의 원칙을 수호하기보다는 자기방어적 보호주의 정책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과 NIEs 등 동아시아지역의 경제적 도약에 자극을 받은 유럽 국가들은 1985년부터 EC의 단일시장화를 서둘렀고, GATT체제가 실정에 맞지 않는다하여 그것을 무력화하는 방향으로 선도하였다. 한편으로 EC의 경제적 통합과 일본의 경제공세에 직면한 미국은 우루과이 라운드를 통하여 교역상대국의 시장개방을 실현하는 동시에 비교우위가 높은 농업, 서비스, 지적소유권 분야에서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캐나다, 멕시코 등을 불러들여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고 EC와 동아시아에 대한 대항력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세계경제의 블록화가 진전되고 있는 것임을 볼 때, 난항을 거듭해 온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된다 하더라도 그 운용은 블록 이기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원래 자유무역 블록이나 관세동맹은 GATT 조약 제1조의 무차별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인데 GATT는 그것을 예외 규정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일반적 무역자유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무역 블록에는 지역적 이기주의가 따르기 마련이다. 즉 블록국가들이 결속된 영향력을 이용하여, 다국간 협정인 GATT의 규정과 정신을 자기네들에게 유리하고 편리하게 왜곡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 실례는 EC의 행적에서 쉽게 볼 수 있다. EC는 공동 농업정책을 채택하여 농산물의 생산 및 판매에 대한 보조금 지급 및 가격통제와 같은 광범한 통제 관리조치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GATT의 기본원칙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오늘에 있어서도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을 어렵게 하는 최대의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도 EC는 도쿄 라운드를 전후하여 GATT의 일반적 원칙을 무시하고 - EC 혼자만의 일은 아니지만 - 2국간 협약, 산업보호정책, 역외국 특히 개도국에 대한 차별조치 등을 자행하는가 하면, GATT의 무역분쟁 해결기구의 설치를 기피하는 등으로 국제사회의 식자들의 비판을 받아왔다.

어쨌든 머지 않아 대서양의 양측에 EC와 NAFTA가 세계무역의 양대 블록으로 대립하게 될 것인데 NAFTA의 인구 3억 6,000명과 GNP 6조 달러는 EC와 대차 없는 규모이니 국제 문제에 있어서 NAFTA와 미국의 영향력이 커질 것은 물론이다. 한편 동아시아에서 제3의 대항세력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소리도 들려 온다. 사실상 세계경제의 중심은 이미 북미주, 유럽, 동아시아로 3분되어 있고 각 지역을 대표하는 미국, 독일, 일본의 3극체제(tri-polar system), 혹은 선진 공업국을 대표하는 G7 등의 집단 지도체제가 세계경제를 이끌어나갈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과연 3극체제나 G7이 오늘의 세계경제를 공동 번영의 방향으로 리드할 만한 위치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

먼저 미국의 실정을 보면, 클린턴 대통령이 미국경제의 회생을 위한 일련의 구조조종정책을 제시했지만 그것들이 실행에 옮겨져서 실효를 거두자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지난 20년동안의 그릇된 경제운영 -나는 그렇게 평가 한다- 을 바로 잡아 경제를 재건하는 데 20년이 걸린다 하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러한 처지에서 미국이 세계 전체의 공동번영을 위해 과거와 같은 희생적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것은 바라기 힘든 일이다. 클린턴은 앞으로 더욱 강경한 자세로 미국의 이익을 추구하겠다고 공언하고 있지 않은가. 한편 독일은 통일에 수반되는 문제(실업, 인플레, 격차해소)처리에 고전하고 있는 형편에 있고, 일본은 일방적 무역흑자 적으로 오늘의 무역전쟁을 가져온 장본인이지만, 환율을 대폭 절상하여 적자국으로부터 수입을 확대할 아량을 보이지 않고 있다. 경제력에 상응하는 국제적 지도력이 없다는 것이 국제적 평가이다.

한편 미.독.일 3국을 포함한 G7은 참석각료와 고위관료의 빈번한 교체로 협의의 계속성을 유지할 수 없으니, 그 무력함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흔히 말하는 집단지도체제의 실상이 이러한데, 그 밖에 무슨 대안이라도 있는 것일까? 물론 대안은 없다. 결국 강대국들은 집단지도체제와 국제적 협력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국우선주의와 지역적 이기주의의 갈등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이래서 세계경제질서는 일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고 국력이 미약한 한국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고 다만 실천 가능한 대응방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블록화에 대한 정부의 대응

그러면 우리의 실천 가능한 대응방안은 무엇인가? 우선 블록화에 대처하는 정부의 입장부터 생각해 보자. 먼저 우리는 GATT 체제의 유지를 위한 우루과이 라운드의 타결을 촉진하는 국제적 노력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야 한다. 하기야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선진국의 이익이 우선되는 내용이 되겠지만, 지역주의의 차별화정책에 맞서자면 GATT의 일반원칙과 규정을 내세울수 밖에 없고, 또 GATT는 어느 정도 견제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공동이해국들과 협력하여 EC나 NAFTA가 GATT의 규정을 준수하며, 그들의 정책과 관행이 기필코 GATT의 감시하에 놓여져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자면 우리 스스로가 GATT를 유지하는 데 응분의 책임을 지고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 협력하여야 한다. 협상에 있어서 국내문제가 어렵기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 만큼, 국내 문제를 들어 협상을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결국 어느 선에서 타협점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음에 우리도 NAFTA에 가입하면 어떻냐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NAFTA 협약에는 3국이 합의하면 타국을 회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는 만큼 우선 그 가능성과 득실을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는 있다. 작년 말에 필자가 워싱톤에서 느낀 인상으로는 싱가포르 정도가 유일한 후보자로 지목될 수 있고 여타국은 실질적 개방화가 미진하여 가입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반응들이었다. 특히 한국에 관하여는 서비스 부문의 개방, 지적소유권 보호의 현안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는 반응이었다. 한편 멕시코는 아시아의 잠재적 경쟁국들이 참여하면 NAFTA에 기대했던 이득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에 대만, 한국, 일본 중 어느 일부만이 가입하는 경우는 상정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어느 한 나라를 차별적 고립상태에 빠뜨리는 것은 일종의 보복적 성격을 지니는 만큼 경제뿐만 아니라 지역안보의 견지에서도 중대한 문제가 되고 그러한 극한상태는 미국은 물론 관계국들도 원치 않을 것이다. 만약 미국이 이른바 태평양 자유무역지대의 구상 - 부시 대통령이 선거시에 언급한 일이 있다 - 을 들고 나와 동북아 국가들을 끌어넣기 위한 책략으로 일본, 한국, 대만 (국가는 아니지만) 중 한 나라를 NAFTA로 영입하겠다고 나온다면 아마 다른 나라들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동북아 국가들의 일부만이 NAFTA에 가입한다는 것은 거의 현실성이 없는 것인데, 설사 동북아 국가들이 모두 가입하겠다고 나선다 하더라도 미국자체가 현재의 약화된 경제상태하에서 일본과 NIES에 대해 전면개방을 할 수 있을는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태평양자유무역지대 구상안은 계속 나돌게 될 것 같다. 결국 NAFTA 조약은 미국의회의 비준을 받게 될 것이고 동북아 국가들은 차별대우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차별대우에 대처하는 수단으로 어떤 특수품목이나 분야에 관하여는 상호주의의 원칙하에 서로 양여(讓與)하기 위한 통상교섭이 진행될 것이다. 예컨대 GATT 제1조의 무차별원칙 대신에 상호주의(Principle of Reciprocity)가 통상정책의 기본원리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외교전략은 대외적으로 NAFTA 가입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채 상호주의에 입각한 부분적 양여교섭을 추진하는 한편 자유무역을 향한 국내체제 정비를 서두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차피 우리는 장기적 국익을 위하여 자유무역의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음에 EC나 NAFTA에 맞서 동북아시아 혹은 동아시아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함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지금의 형편으로서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동북아시아의 일본, 중국, 한국, 대만 등은 역사적 정치적으로 복잡한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미국시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무역협정은 매우 어려운 과제가 된다. 또 협정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북미의존도가 큰 상태하에서는 대항력이 충분치 못할 것이다. 하기야 일본, 한국, 중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상호간의 무역자유화는 북미의존도를 줄이고 역내 교역을 확대하는 효과가 있어, 그것만으로도 가치있는 일이지만 일본과 중국이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는 한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자유무역협정은 아니더라도 동북아 국가들간의 어떠한 형태의 협의체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점차 높아져 갈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클린턴 정부하에서 미국의 보호주의 정책방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NAFTA나 EC 또한 그 영향을 받게 된다면 동북아 국가간의 공동관심사는 더욱 선명해질 것이고 공동대처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최근에 있었던 동북아 환경문제에 관한 각료회의와 그 결정사항은 그 자체의 중요성을 떠나 동북아 지역협력의 선례(先例)를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또 동북 아시아의 지정학적 특수성에 비추어 지역안보협의체를 구성하자는 제안도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고, 필자가 1989년에 제안한 동북아개발은행의 창설구상도 앞으로 지역협력의 매개체로서 더욱 설득력을 갖게 되리라고 여겨진다.

한편 수년 전에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수상이 제안한 동북, 동남아시아를 포괄하는 '동아시아 경제협의체(East Asia Economic Group)'의 구상은 미국의 반대에 부딪쳐 여타국의 동조를 얻지 못하고 말았으나 금년초에 발효한 EC의 본격적 경제통합과 NAFTA의 출현으로 다시 관계국들의 관심을 끌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미국은 정부간 협의체인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의회)이 보다 넓은 차원의 지역협력기구가 될 수 있다고 하여 계속 반대할 것이다. 하여튼 지역주의가 유행하는 시대에 동북 또는 동아시아 지역이 자극을 받는 것은 당연하고 자극받는 강도는 앞으로 미국의 대외정책과 NAFTA와 EC의 차별화 수준과 태도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하기야 미국이나 EC가 그들의 대외정책에 있어서 동아시아의 반응을 도외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미국의 견지에서는 아시아지역은 캐나다와 멕시코보다 더 중요한 수출시장이고, EC 또한 장차 세계경제의 중심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옮겨진다고 할 때 지역간의 상호의존성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APEC의 조정역할을 적극 지지하여 역내 국가간의 무역마찰을 줄여나가는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PECC(Pacific Economic Cooperation Council)와 같은 민간국제기구를 통하여 각 블록의 통상정책을 감시하고 국제여론을 이끌도록 힘써야 한다.

이상에서 아시아·태평양지역에 있어서의 지역주의 태동을 살펴보았는데, 국제적 영향력이 적은 우리로서는 GATT와 같은 세계적 차원의 협력체제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한편 언제나 동북아지역 협력체제 결성의 길을 열어 두고 미국을 비롯한 우방과의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결국 우리의 형편으로는 대외적 대응보다는 국내적 대응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국내적 대응이 중요하다

우리의 국내적 대응에 관해서는 많은 논자들이 생각할 수 있는 대응방안을 거의 남김없이 제시하였으므로 여기에서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문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우리의 전반적 경제전략으로 체계화하여 실천으로 옮기느냐 하는 것이다. 새 정부의 정치적 역량에 기대해 볼 문제인데 문제의 초점은 어떻게 하면 우리 산업의 대외경쟁력을 강화하여, 외국의 무역장벽을 회피하거나 넘어서면서 우리의 수출신장을 지속하느냐 하는 것이다. 산업의 경쟁력은 기업 내 요인과 기업 외 요인으로 대별해서 생각할 수가 있다. 기업 내부의 요인으로는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술개발, 신상품 개발 및 상품의 고급화, 경영의 합리화를 통한 비용절감 그리고 근로자들이 생산성 증가범위 내에서 임금을 올려받는 것이 경영철칙임을 이해할 수 있도록 노사간의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말은 쉽고 실행은 어려운 일이지만 이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어찌하랴.

기업 외부의 요인은 주로 정부시책에 관련되는 것인데, 그것들은 직·간접으로 기업의 생산비에 반영되어 국제경쟁력에 영향을 주게 된다. 예컨대 금리, 세금, 물류비용, 부대비용은 물론 정부의 규제, 행정의 능률 등, 통틀어 정부의 경제운영방식이 기업의 국제경쟁력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게 된다. 때는 바야흐로 경제경쟁의 시대라 하는데, 경제경쟁은 비단 기업이나 산업만의 일이 아니라 국가경제 전반의 능률을 시험하는 총력전이 된다는 것을 모두가 똑똑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새 정부는 이러한 관점에서 경제운영방식을 재검토하여 경쟁력을 저해하는 일체의 요인들을 신속히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외국의 무역장벽을 회피하거나 넘어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무역장벽을 회피하자면 자동차, 철강, 선박, 반도체 같은 화려한 상품보다는 첨단기술 제품의 부품이나 소재를 공급하는 편이 비교적 안전하고, 소수 상품의 소나기 수출보다는 소량 다품종주의가 유리하다고 여겨진다. 이를 위해 중소기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지금은 적극적으로 해외로 나가 그러한 부품공급 대상을 찾아 국제분업에서 한자리를 잡아야 할 때인데, 선진국 기업들이 한국에 대한 합작투자나 생산, 기술제휴를 꺼리고 있는 실정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한편 무역장벽이 낮은 지역으로의 시장 다변화와 신시장 개척도 중요하다. 특히 중국, 동남아시아, 러시아, 동구제국, 남아프리카 등의 지역은 현재로서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지만 장기적 안목에서 인내를 가지고 시장기반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국내시장을 개방하여 상대방의 보복적 수입규제를 회피하고, 우리도 상대방의 부당한 수입규제에 대하여는 국제여론을 일으키고 단호하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

외국의 무역장벽을 뛰어넘는 길은 무역 블록 내에 현지법인을 세워 모기업에서 반제품을 가져다가 가공하는 일인데 이것 역시 역내 국산자재 사용비율(local contents regulation)의 규제를 받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블록 내에서 판매거점을 구축하고, 현지기업들과 협력관계를 확대하면 무역장벽이 다소라도 낮아질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 상품의 수입업자 및 그들 단체와의 협력관계를 강화하면 그들이 자기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여 수입규제를 억제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무역장벽을 완화하기 위한 정부의 외교적 노력도 중요하지만, 민간협력의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

경쟁력 강화를 위한 단기대책 - 환율과 금리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기업과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구조조정을 기다리면서 당장의 수출부진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는 단기대책도 필요하다. 단기대책으로는 환율과 금리가 문제된다. 국제경쟁력이란 환율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니, 지금이라도 환율을 올리면 어떤 기업은 당장 경쟁력이 생기게 될 것이다. 기업의 입장에서 본다면 국내여건이 어떠하든 환율을 올리면 우선은 수지를 맞출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지금의 환율이 적정선이냐 아니냐에 대하여는 보는 이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다. 다만 국제수지 적자가 계속된다면 환율인상(평가절하)의 필요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우리의 대미환율은 1985년에 890원대까지 올라갔으나 86년 이후 흑자를 반영하여 1990년의 716원까지 떨어졌다가 1990년 이후 다시 반등하여 지금의 793원대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환율은 1985년에 비하여 10% 정도가 절상된 수준인데, 그것을 합리화할 만큼 경쟁상대국에 대한 우리 경제력의 상대적 위치가 호전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욱이 환율의 조정속도가 너무 늦어져서 수출부진과 국제수지 적자국면이 의외로 연장되고 있는지도 따져 볼 만한 문제이다. 그동안의 급격한 임금상승, 물가 및 금리의 상승을 고려한다면 원화가 아직도 고평가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올지도 모른다.

물론 환율을 올리면 수입물가 상승을 통하여 일반적 물가상승을 부채질하고 외채가 있는 기업들의 상환부담을 가중시킨다는 문제가 있다. 물가가 상승하면 임금상승 요구가 가열되고 국제경쟁력이 악화되어 다시 환율을 올려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점진적 인상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정부의 입장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상의 속도가 너무 늦어서 수출부진과 국제수지 적자가 오래 지속되는 것도 바람직하지가 않다. 그런데 현행 환율제도 하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인상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현행 변동환율은 시장에서 외환의 수요와 공급을 반영하여 결정되는 방식으로 되어 있는데, 국내금리가 국제금리수준의 거의 2배나 되는 상황하에서는 금리차를 노리는 외국 단기자본의 유입을 막기 어렵다. 그런데 외국자본이 유입되면 국내통화량을 증가시키는 동시에 외환의 공급을 늘려 시장에서 환율인상(평가절하)을 억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내외의 금리차가 심하면 단기자본의 유입 때문에 국제수지 악화에도 불구하고 환율이 올라가기 어려운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IMF의 가맹국이 채택하고 있는 변동환율제의 공통된 모순으로 지적되고 있는 터이지만, 우리에게는 자본자유화의 초기에서 처음 겪는 경험이다. 과거에는 금리의 고려 없이 환율을 조작할 수 있었지만 자본자유화가 본격화되면 선진국에서처럼 환율과 금리를 함께 고려하는 금융정책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환율과의 관련을 떠나 산업경쟁력의 강화라는 견지에서도 국내금리의 인하가 절실히 요청되는데 정부가 금리를 인위적으로 끌어내린다 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초과수요의 발생과 자금배정의 정부통제를 불가피하게 하고 사채시장을 조장한다는 것은 이미 과거에 충분히 경험한 바다. 근본적 해결책은 금융산업을 명실상부하게 자율화하여 금융시장에 경쟁을 도입하고 금리를 자유화하여 만성적 초과수요 상태를 제거하는 것이다. 금융과 금리를 자율화하면 금리는 일시적으로 오르다가 점차 하락하여 균형점을 찾을 것인데, 그래도 내외 금리차는 클 것이다.

그러나 일단 금융시장이 자유화되면 중앙은행의 공개시장조작이 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추가적 자금공급으로 금리를 어느 정도 내릴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지금의 상태하에서는 설사 한은(韓銀)이 자금을 대폭적으로 풀거나 혹은 외자가 유입하더라도 금리에는 큰 영향을 줄 수가 없다. 경쟁적 자유시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융시장을 자유화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단기어음 시장을 개발할 수 있다면 공개시장 조작의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이렇게 하여 국내금리가 국제금리에 접근할 때, 변동환율제는 국제수지 조절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하여 여러 가지 구조조정시책이 추진되어야 하나, 금융자율화가 그 출발점이 된다는 결론이 된다. 금리와 환율, 그것은 경쟁력 강화를 위한 단기정책의 기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