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화시대의 중앙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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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2월 9일 조선일보 ‘재경원과 중앙은행’ 기고후 집필  


 

머리말

때는 바야흐로 국제화, 민주화, 정보화 시대라 한다. 줄여서 3화 시대라 할까. 3화 시대에 직면하여 경제 각계가 변혁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이때에 중앙은행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은행 내부에서 중앙은행 독립론이 대두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시대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한다. 본고의 목적은 세계 중앙은행의 추세와 한국은행의 어제와 오늘을 돌이켜보고 3화 시대에 우리 금융계와 한국은행이 직면한 문제들을 짚어본 다음 그것들이 한국은행의 내일에 던지는 시사점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어제와 오늘

중앙은행의 역사는 비교적 짧다. 지금 세계에는 170개 이상의 중앙은행이 있지만 그 반수 이상의 연령은 40세 미만이다. 선진제국의 경우에도 중앙은행은 정부조직에 비하여 훨씬 뒤늦게 탄생하였다. 17세기에 중앙은행을 갖게된 스웨덴이나 영국은 예외이지만, 유럽 제국은 19세기에 와서야 중앙은행을 설립하였고 미국은 1913년, 일본은 1882년 그리고 우리나라의 한국은행은 1950년에 설립되었다.

중앙은행의 목적

중앙은행의 목적과 기능은 통화가치의 안정과 금융제도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라는 게 일반적 상식이지만, 각국의 중앙은행법에 규정된 목적의 내용을 보면 은행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독일연방은행은 '통화가치의 수호'를 유일한 목적으로 하고 있고 이 목적과 배치되지 않는 범위내에서만 연방정부의 경제정책을 지지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편 미국연방준비은행(FRB)의 경우는 '고용의 극대화, 물가의 안정 및 장기금리의 적정화가 효과적으로 달성될 수 있도록 통화 및 신용의 총량을 경제의 장기적 성장능력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어 그 목적이 보다 포괄적이다. 그런가 하면 1993년에 개정된 프랑스 중앙은행법은 정부의 전반적인 경제정책 범위 내에서 물가안정을 보호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목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영란(英蘭)은행의 경우에는 목적을 명시하고 있지 않다.

1942년 전시동원체제의 일환으로 나치스 독일에서 직수입하였다는 일본의 중앙은행법은 국가경제총력의 적절한 발휘를 도모하기 위하여 [국가정책에 따라 통화조절, 금융조정, 및 신용제도를 유지 육성]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목적이라고 규정하고 있어 역시 물가안정보다 포괄적 국가목적이 우선한다는 내용이다.

우리나라 한국은행의 설립목적은 '국민경제 발전을 위한 통화가치의 안정과…… 은행신용제도의 건전화와 그 기능향상에 의한 경제발전과 국가자원의 유용한 이용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경제발전과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바로 그것이 개발년대의 금융정책 내지 한국은행의 성격을 규정한 기본이념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중앙은행의 목적은 그 나라의 역사적 배경과 입법 당시의 국민경제에 관한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는데 어느 경우에나 통화가치의 안정이 중앙은행의 주요 임무라는 인식만은 공통적이다. 특히 독일이 통화가치의 안정을 지상목표로 명시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천문학적 인플레를 경험한 이 나라의 지도층과 국민들이 통화가치 안정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인식한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정부와의 관계

중앙은행과 정부와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변천을 거듭해 왔다. 중앙은행이 태동한 19세기초부터 제1차 대전까지는 자유방임주의가 우세했던 시기였던 만큼 정부의 경제에 대한 개입은 소극적인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까지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확산과 케인즈 경제학의 보급등으로 정부의 경제에 대한 간섭이 강화되고 중앙은행의 독립성도 크게 제약되었다. 그러나 오늘의 국제화시대에는 정부의 통제기능의 축소와 시장기능의 확대가 시대적 조류를 이루고 있고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강조되는 추세에 있다. 허나 어느때를 막론하고 전쟁, 경제적 위기와 같은 비상시에는 중앙은행이 정부 정책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고, 집권 정당의 정치적 이념에 따라 중앙은행의 성격이 달라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현재의 주요국 중앙은행의 정부와의 관계를 보면 독립성의 강약에 따라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1) 독립형 - 독일연방은행(Bundesbank)이 대표적인 예이다. 동 은행은 정부는 물론 의회에 대하여도 공식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고 헌법에 의하여 정부조직으로 부터 독립이 보장되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독일연방은행은 통화가치의 수호라는 사명에 위배되면 연방정부의 경제정책을 지지할 의무가 없고 법적 권한을 행사함에 있어서 연방정부의 명령을 받지 않는다(법12조). 연방은행 이사회 및 임원회는 독일연방 최고 관청의 지위에 있고(법 29조 1항), 정부대표는 중앙은행 이사회(정책결정기관)의 심의에 참가할 권한과 제안권은 있으나 결정권은 없다. 다만 그 의결을 2주 간 연기할 것을 청구할 권한이 있을 뿐이다(법 13조 1항 및 3항). 총재는 연방정부 제안에 의하여 대통령이 임명하고 임기는 8년이다. 총재 이하의 멤버는 자격요건으로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임기는 8년, 재임할 수 있다(제7조 2항, 3항).

(2) 준독립형 - 미국의 연방준비은행(FRB)이 대표적인 예이다 정부조직 내부에서 독립성을 유지하고 의회에 대하여 정기적 또는 수시로 보고할 의무를 진다. 물가안정은 포괄적 경제목표 중의 하나이고, 정부와 협력적이며 비공식으로 정부의 감시를 받는다. 총재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임기는 4년이나 중임되는 경우가 많다. 7인의 이사회 멤버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임기는 14년, 재임도 가능하다. 이사회에 정부관계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정부와 대립되었을 경우에 어떻게 한다는 규정은 없고 다만 비공식적으로 정부와 절충한다.

(3) 정부와의 계약형 - 뉴질랜드 준비은행이 특수한 예이다. 법률에 의하여 3년 단위로 정부와 인플레 억제목표를 계약하고 그 범위 내에서 정책운용의 자율권을 가진다. 계약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총재는 책임을 지고 해임된다. 총재는 정부가 임명하고 임기는 5년으로 재임이 가능하다. 9인의 이사회 멤버는 정부가 임명하고 임기는 5년으로 재임할 수 있다. 연1회 의회에 보고해야 하고, 계약이니까 정부와 대립할 필요는 없다.

(4) 정부재량형 - 일본은행이 대표적인 예인데 국가목적 달성이 그 사명이고 정부가 지휘명령권을 갖고 단독으로 정책을 결정할 수 없으며 정부가 지시하거나 합의한 정책을 집행한다. 5년 임기의 총재는 정부가 임명하고 재임할 수 있다. 7인의 이사회 멤버 중 2명은 정부(대장성과 기획청)에서 나오고, 임기는 4년이다. 의회에 대하여는 요청에 의하여 수시로 보고하고, 정부와의 대립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만 여론과 정부재량에 의하여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존중되는 면이 있다. 최근 일본의 금융위기 1) 를 계기로 하여 중앙은행 독립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5) 정부종속형 - 한국은행이 대표적인 예인데, 통화가치 수호와 금융제도의 안정성 유지를 통하여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그 사명이고, 정부의 지휘 명령에 따라야 한다. 4년 임기의 총재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재임될 수 있는데 한국은행 설립 이후 오늘까지 임기를 채우고 나간 총재는 4인밖에 없다. 9인으로 구성되는 금융통화운영위원회는 '법에 규정된 범위 내에서 통화, 신용의 운영관리에 관한 정책의 수립'에 종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동위원회의 구성을 보면 재경원, 상공부, 농수산부에서 나오는 위원이 각 2명씩 합하여 6명이고 기타는 한은 총재와 금융기관이 추천하는 2인 뿐이며, 그에 더하여 재경원 장관이 의장이 되고 있으므로 모든 결정은 전적으로 정부측 의사에 좌우된다. 위원의 임기는 3년이고 금융에 대한 전문지식이 요구되지 않는다. 한국은행 업무 집행기관으로 이사회가 있고 이사는 금융통화위원회가 임명한다. 국회의 요청에 따라 업무보고를 하고 정부와 대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난날을 회고하면

여담이 되겠는데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1970년대의 정부정책 담당자로서 이 나라 중앙은행의 정상적 발전에 기여하지 못한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때로는 당시의 사정을 회고하며 자위하기도 한다. 만약 당시의 금융통제권이 재무부가 아니라 한국은행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금융에는 크고 작은 사고나 스캔들이 있게 마련이고 특히 정당정치와 금융이 유착상태에 있는 상태하에서는 금융을 둘러싸고 정치적 파란이 일게 마련이다. 나 자신이 체험한 일이지만, 금융부정사건이 매스컴에 보도되고 국회로 비화하면 온 세상이 떠들썩하고 그럴 때마다 재무부 장관과 정부가 규탄의 대상이 된다. 업무상으로는 은행감독원이나 한국은행이 문제에 더 가깝지만 금융의 주도권을 정부가 쥐고 있기 때문에 공격의 화살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한국은행이 금융통제권을 쥐고 있었다면 한국은행총재가 규탄의 대상이 되고, 그러한 일이 있을때마다 한국은행은 정치바람에 휘말려서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 하면 외자도입이 문제가 된다. 항상 학생 데모와 정치파동으로 얼룩져 있는 나라에서 중앙은행마저 정치에 휘말려서 외국 은행들에게 마치 복마전같이 보인다면 국제 금융계에서 한국 중앙은행의 위상과 신인도(信認度)가 형편없이 떨어져서 외자조달이 어렵게 되고 차입 조건이 불리해졌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남미국가들의 사정을 아는 사람은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의 중앙은행은 금융통제권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30년 동안 정치적으로는 거의 무풍지대에서 고요함을 지켜올 수 있었다.

당시의 재무부는 위와 같은 사유로 해서 한국은행의 표면상의 위상을 지키는데 나름대로 신경을 썼다. 일례로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으로 우리 경제가 매우 어려운 국면에 처했을 때 우리에게 차관을 주겠다는 외국은행 또는 산유국 금융 브로커들은 한국은행의 지급보증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우리 중앙은행은 그러한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일축하고 외환은행이나 산업은행의 지급보증으로 끝내게 했다. 만약 그들의 요구에 응했다면 국제금융계에서 한국의 지급능력을 의심했을 것이다(사실상 지급능력이 위태로웠다). 필자는 당시의 한국은행 총재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고 은행장 인사에 있어서는 그분의 자문에 크게 의존하였다. 사소한 일이지만 한국은행의 국민소득 추계업무를 통계국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논의가 정부 내에 있었는데 필자는 국민소득 추계를 정부로 가져오면 국민들이 그 통계를 믿어 주겠느냐고 반문하고 단호히 거절한 일도 있다. 한국은행의 공신력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흔히 중앙은행을 '법왕청'에 비유하는데 돌이켜보면 정치적으로 파란만장했던 지난 40년, 우리의 중앙은행이 외부에 물들지 않고 비교적 조용한 위상을 지켜온 것은 그런 대로 다행한 일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달라졌고 한국은행이 중앙은행 본래의 사명과 기능을 찾을 때가 온 것이다.

중앙은행 독립논의 역사적 배경

최근에 와서 중앙은행의 독립성 강화가 세계적 조류를 이루고 있다. 1980년대 이래 칠레, 멕시코, 베네수엘라, 뉴질랜드, 캐나다, 아일랜드 등이 중앙은행의 법적 독립성을 강화하였으며, 1991년 12월에 체결된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유럽중앙은행제도(Europian System of Central Banks : ESCB)에 참여하는 모든 회원국의 중앙은행들은 동조약이 정하는 독립성기준을 충족해야 한다고 규정하였고 그에 따라 이태리, 프랑스, 스페인 등은 이미 중앙은행법을 개정하였다.

이러한 추세에는 대략 두 가지 배경이 있는 것 같다. 첫째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20여 년 동안 세계에는 큰 전쟁이 없는 평화상태가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이 끊이지 않았다는 반성이다. 경제학자들은 확장적 통화정책과 인플레이션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지적하였고, 중앙은행이 정부의 압력을 거부할 수 있는 나라일수록 인플레율이 낮다는 견해가 주목을 받게 되었다. 중앙은행 독립성과 인플레율 사이의 상관관계를 통계적으로 분석한 바에 의하면 선진국에 관한 한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높을 수록 인플레율이 낮다는 상관관계가 드러난다고 한다. 2)

둘째로 국제화 내지 세계화의 추세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단적인 예로 유럽의 경제적 통합은 유럽중앙은행을 설립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하였는데, 만약 각국의 중앙은행이 정치적 편의에 따라 제멋대로 통화정책을 운용한다면 경제적 통합의 의미가 없어지고 유럽중앙은행의 설립목적도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유럽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개방화와 국제화에 따라 금융의 혁신이 진행됨에 따라 중앙은행의 역할이 한층 중요해지고 있고 국제간의 금융협조가 요구되는 추세에 있다. 이 점은 다음 절에서 국제화에 따라 우리 중앙은행이 직면한 문제점들을 생각해 보면 좀더 명백해질 것이다.

국제화와 중앙은행

국제화,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한국은행을 포함한 한국의 금융 시스템이 어떠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거나 직면하게 될 것인가. 필자는 이하에서 우선 생각나는 대로 일곱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정치적 압력

개발년대에는 주로 개발수요의 압력 때문에 통화정책이 확장의 방향으로 기울여졌고 따라서 통화인플레 압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례로 해마다 양곡특별회계의 적자누적이 통화량 관리를 어렵게 하였고 경제성장을 위한 정책금융이 과다하다는 것과 이른바 '관치금융'이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민주화 시대라 해서 정치적 압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다양한 정치적 압력이 재정운용을 어렵게 할 것이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출마자의 공약사업이 쏟아져 나오게 되고 당선이 되면, 경제적 합리성을 따지기 전에 공약사업의 일부 또는 전부를 실행하려 할 것이다. 이제는 경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비경제적 사업 - 구 총독부 건물과 외인 아파트 철거사업과 같은 - 이 재정을 압박한다. 정당의 압력이 가중되는 동시에, 지방자치단체가 중앙정부의 예산지원을 얻기 위해 몰려올 것이다. 정부내 각 부처 또한 나라의 가용재원의 한계는 아랑곳 없이 재정당국과의 협의를 거치지 않고 몇조(兆) 단위의 거창한 사업계획을 발표한다. 예산에 반영되지 못하면 국민을 우롱하는 공수표로 끝나지만 그런 방법으로라도 재정당국에 압력을 가하려 하는 것이다. 재정당국이 이러한 압력을 어떻게 소화해 나아가느냐 하는 것이 실은 국가경영의 핵심과제 중 하나인데 그 결과는 통치자의 식견과 경륜 혹은 우선 순위 감각에 달려 있다.

과거에는 세입은 재무부, 세출은 경제기획원 소관으로 분립되어 있어서 양부 처간에 상호 견제기능이 작용하였다. 나 자신의 경험의 일단을 말한다면 기획원 장관과 재무부 장관이 대립하고 충돌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고, 수출확대 회의가 열릴 때마다 통화긴축 때문에 수출이 안 된다는 업계의 고발 앞에서, 재무부의 입장을 변론하는 데에 진땀을 뺐다. 때로는 하는 수 없이 재정에서 부담해야 할 일을 금융부문이 떠맡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나마도 재무부의 견제기능이 있었기에, 통화정책의 파탄을 면할 수 있었고 IMF와 세계은행 등 국제기관으로부터 그런 대로 신뢰를 유지할 수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지금은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이 재경원으로 통합되었다. 일견 재정과 금융을 통합 운영할 수 있게 되어 능률적인 면도 있겠으나, 재경원이 과연 혼자의 힘으로 2중 3중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초인적 자제력을 발휘하여 통화정책의 안정적 테두리를 유지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걱정이 된다. 만약 팽창하는 재정수요의 압력에 굴하여 중앙은행의 발권력에 의지하려 한다면 이 나라의 통화가치 안정은 영원한 숙제가 되고 말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정부가 어쩔 수 없이 '최후의 대주(Lender of Last Resort)'인 중앙은행의 발권력에 의존하는 경우는 있다. 전시(戰時)의 전비조달이 그런 경우다. 그러나 평상시에 정부가 '최후의 대주'를 남용하는 사례도 많고 그것이 인플레의 요인이 되어 왔다는 것은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사례는 허다하였고 최근에도 그러한 예를 볼 수 있었다. 수년 전에 정부가 국영기업 주식을 국민주라 하여 농촌에까지 매입을 권장하더니 그 후 주가가 떨어져서 농민과 서민들이 아우성치자 한국은행으로 하여금 간접적으로 증권회사에게 수천억 원의 특융을 주어 주식을 사들이게 한 일이 있다. 이러한 일은 선진 외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근에 일본에서도 몇몇 신용조합의 파탄을 수습하기 위하여 정부가 중앙은행의 특융을 일으키게 한 일이 있는데, 식자들의 호된 비판을 받고 있고 일본은행 독립론의 한 가지 근거가 되고 있다. 3)

예컨대 이 나라의 통화가치를 수호하자면 재경원은 그 목적을 위해 자신을 견제해 주는 우군(友軍)을 필요로 한다. 그 우군은 재무부가 없어진 지금에 있어서는 한국은행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한국은행을 선진국 중앙은행의 위치로 바꾸어 놓고, 그 견제기능을 이용하여 재경원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 경세(經世)의 지혜가 아닌가 한다.

통치구조와 물가정책

필자 자신의 실패의 경험을 돌이켜 볼 때 우리나라에서 장기적인 물가안정이 정착되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통치구조에 있다고 생각된다. 대통령은 경제 전문가가 아니므로 정책 변수간의 상호연관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여론에는 신경을 쓰게 된다. 물가상승이 여론의 초점이 되면 대통령은 수석 비서관이나 관계장관을 불러 물가를 안정시키라고 요구한다. 업계에서 불황과 자금난을 호소하면 또다시 측근 혹은 장관을 불러 경기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한다. 국제수지 적자가 문제라는 보도가 잇따르면 대통령이 수석 비서관 회의를 주재하여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하는 광경이 으례 텔레비젼에 나오게 된다. 전반적 경제운영이 어떻게 돌아 가고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한 채, 따라서 그러한 지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채 다만 대통령의 관심을 보이기 위해 그러한 지시를 한다. 이왕 지시를 할 바에는 상황설명을 들은 다음 각 부처의 이해가 얽혀 있는 문제의 마디를 풀어 주든가 아니면 경제 부총리의 종합적인 판단과 조정기능을 전적으로 밀어 주든가 했으면 좋겠는데 대개는 총론적 훈시에 그치고 만다.

관료의 세계에서는 문제가 표면화하고 대통령의 지시가 있으면 무엇인가 해야 하지 안할 도리는 없다. 결국 무엇인가를 '강화'하고 '척결'하고 '불허'한다는 식의 강성 어법을 구사하는 단편적 대증요법(對症療法)이 나오게 된다. 물가안정을 위해 공공요금의 인상을 일체 불허한다, 경기 진작을 위해 특별자금을 방출한다, 수출증대를 위해 선수금을 늘린다는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각종 문제가 있을 때마다 대증요법을 쓰면 경제운영의 기본틀이 일그러지고 부작용이 생기게 마련이다. 예컨대 비현실적 공공요금을 강요하는 데에서 택시 잡기가 어려워지고, 의료 서비스가 개선되지 않고, 지하철의 확장이 늦어진다. 그러다가 누적된 인상 요인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어 어느날 대통령의 결단(?)을 얻어 요금 현실화가 단행되면 그로 인하여 물가에 집중적 충격을 주게 된다. 한편 그러는 동안 통화량은 억제목표를 초과하게 되고 통화당국은 긴축으로 선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국 가격통제는 물가상승을 일시적으로 뒤로 미루는 것에 불과한데 그러는 동안 부작용의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가고, 기업환경의 불확실성은 가실 날이 없으며, 경제의 체질은 약화된다. 생각해 보면 임기응변의 대중요법보다 몇 가지의 생활수칙을 지키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는 것은 인체의 경우나 경제의 경우나 마찬가지다.

지난 30년 동안 특수한 통치구조하에서 이러한 방식의 경제운영을 계속해 왔고 매스컴이나 국민들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이러한 경제운영방식을 계속할 것인가? 우리도 이제는 선진국처럼 정부는 경제운영의 기본적 틀을 지키는 데에 전심하고 나머지는 가급적 시장기능과 자율에 맡기도록 하는 것이 선진화의 길이 아닌가? 대통령이 무슨 일이 있을 때만 장관도 아닌 수석 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며 단편적 정책지시를 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좋지가 않다.

그러면 이러한 경제운영 방식에서 탈피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진국에서 처럼 누가 뭐라 해도 경제운영의 기본적 틀을 지키려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두는 것이다. 그러면 기본적 틀이란 무엇인가? 국민경제의 운영에 있어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모든 문제 해결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기본조건은 통화가치, 즉 물가의 안정이다. 물론 물가에도 여러가지 복잡한 요인들(임금, 에너지 가격, 간접세 농사 작황 등을 포함한)이 작용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인은 통화량, 재정수지, 금리, 환율과 같은 화폐적 변수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통치구조에서 오는 교란요인을 최소화하는 길은 통화신용정책의 알려진 준칙을 고수하는 국가기관, 즉 독립적인 중앙은행을 두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독일연방준비은행이 그 전형인데 전후 독일의 경제운영이 유달리 건실했던 이면에는 독립성을 자랑하는 연방준비은행의 역할이 있었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중앙은행의 독립이라 하면 보통 재정 당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생각하는데 실은 통치구조 혹은 정치로부터의 독립이 진짜의 독립이다.

위에서 통화신용정책의 '알려진 준칙'이라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는 학자들의 말이 많다. 그들은 어떠한 고정된 준칙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변화하는 경제 사정에 상응하여 신축적으로 재량을 행사해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필자와 같은 실무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통화량의 증가율을 고정시켜야 한다는 M. 프리드만의 준칙 일변도에도 찬동할 수 없고 그렇다고 아무런 준칙도 없이 정책당국의 재량에 의존하는 것은 더욱 찬동할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는 이른바 '조정적 준칙'을 택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조차 실행이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평상시의 재정수지 적자는 바람직하지 않다. 통화량 - 어떻게 정의하던 - 의 증가율이 장기적으로 경제성장률(실질)을 크게 초과하거나 증가율의 기복이 너무 커서도 아니 된다. 이자율과 환율은 수요·공급상태를 반영해야 한다는 등은 널리 알려진 상식적인 준칙에 불과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환율과 금리정책

종래에는 정부가 환율과 금리를 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시장기능을 통하여 양자를 연계적으로 운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지금의 현상을 보자. 정부가 국제적 자본이동을 어느 정도 자유화하자 내외 금리차를 노리는 외국자본이 대량으로 유입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만성적 국제수지 적자에도 불구하고 환율 (달러의 원화가격)은 내려가고 통화량이 증가한다.

국내고금리가 문제인데 이 나라의 진정한 금리수준은 자유시장만이 알 수 있고 부분적 금리 자유화에 따라 점차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자본자유화를 맞이한 일부 국내기업들이 저금리의 외국자본을 이용하게 되면 국내금리가 하락할 것이다. 그러면 환율하락으로 인한 수출산업의 손실이 금리 인하 효과로 어느 정도 상쇄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금리의 자금공급 탄력도를 알 수 있다면 우리의 금리수준이 국제수준에 접근하자면 어느 정도의 외자유입 - 따라서 부채증가 - 이 있어야 하는지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이동에 관련하여 단기 투기자본의 부동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단기자본 관리는 들어올 때보다 나갈 때가 더 어렵다. 만약 우리 경제운영에 어떠한 적신호가 보이거나 정치적 변동이 발생하면 단기자본은 일시에 빠져나가려 하고 따라서 지급결제가 어렵게 되고, 이번에는 환율이 폭등하여 물가안정을 위협하게 된다. 1994년 말의 멕시코에 있었던 외환위기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고 지금 우리의 환율이 급등으로 반전하고 있는 것도 유사한 현상인데, 이러한 때에는 정부나 중앙은행의 위기관리 능력이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이상과 같은 사정을 놓고 볼 때 환율과 금리정책을 한국은행에 맡길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국제화 시대에는 컴퓨터 통신망에 의하여 각국의 금융시장이 통합되고, 한나라의 금리와 환율변동은 즉각적으로 다른 나라의 금융시장에 영향을 주게 되며, 한 나라에서 발생한 금융충격은 즉각적으로 다른 나라로 파급된다. 이러한 사정하에서는 거래 당사자인 동시에 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은행들과 중앙은행이 정부보다 더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국제화가 진전되면 중앙은행 사이의 긴밀한 금융협조가 일상화할 것인데, 정책결정권이 없는 중앙은행 총재가 국제적 협의에서 제 구실을 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부총리가 일일이 회의에 나가 중앙은행 총재를 대신할 수도 없는 일이다.

금융의 전문성

국제화에 따라 앞으로 금융의 전문성이 크게 고도화한다. 이른바 파생금융상품(Delivatives)을 중심으로 금융혁신이 급속도로 진행됨과 동시에 금융의 세계화가(Globalization) 진전됨에 따라 금융업무가 한편으로는 단순화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관리가 한층 복잡해지고 투명성이 적어진다. 크레디트 카드가 세계적으로 현금의 역할을 하고 있고, 국제간의 거래를 현금 대신에 컴퓨터로 결제하는 '전자화폐'가 보급되면 통화량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도 막연해진다. 전통적 통화수요함수에 기초를 둔 화폐이론이나 통화신용정책의 실효성에 대하여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가안정과 신용제도의 안전성이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고 있으니 통화신용정책이야말로 미증유(未曾有)의 전환기에 놓여져 있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통화신용정책을 정부가 독점하는 데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공무원들은 보통 1∼2년 이면 자리를 뜨게 되고 전문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또 광범하게 흡수할 겨를도 없다. 이에 비하여 중앙은행은 방대한 금융정보를 축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내부에 전문지식과 실전경험을 쌓은 전문가 집단을 가질 수 있다. 어차피 중앙은행이 하게 될 일을 정부가 하는 체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금융기관과 자원배분

자유경제체제하의 민간은행은 일반기업과 마찬가지로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경영의 목적이다. 은행은 이윤동기에서 대출신청자의 자금용도나 투자계획이 내포하는 리스크를 판단하고 사업의 경제적 타당성을 면밀히 검토하여 이른바 '담보계획(bankable project)'을 가려낸다. 이러한 은행들의 대출 선별기능이 존재하기에 사회전체의 가용자원이 비교적 합리적으로(수익성 기준으로) 각용도에 배분된다는 것이 자유경제체제의 기본철학이다. 다만 민간은행에 의한 재원배분이 반드시 국가목적에 부응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관점에서 정부가 금융에 간섭하거나 또는 국책은행을 설립하기도 한다.
개발년대에는 정부가 경제발전을 촉진할 목적으로 산업은행, 중소기업은행, 외환은행, 국민은행 등의 국책은행을 설립하는 한편 시중은행의 금융자원 배분에까지 관여해 왔다. 그 공과에 대하여 할 말은 많으나
4) 그것은 생략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자율화 이후 금융의 자원배분 기능에 관하여 일언하고자 한다.

지금 우리의 은행들은 오랫동안 정부의 통제와 보호 밑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금융의 현대적 기법을 배우고 발전시킬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대형 프로젝트의 타당성을 판단할 만한 지식과 안목이 없고, 자기판단에 따라 대기업 또는 재벌기업에 대하여 대출을 거절할 만한 자주성도 없는 것 같다. 일본만 해도 은행이 기업집단의 멤버로 있으면서도 집단내 기업의 재무상태와 투자계획을 엄격히 심사 분석하여 경영의 규제자(Regulator) 역할을 하고 있다는데 우리 은행들은 과연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은행이 합리적 자원배분 기능과 경영 규제자의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은행 자체가 건전경영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은행이 과다한 부실채권을 안고 있거나 손실을 보고 있다면 그 은행은 합리적 자원배분의 기능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 엄밀히 말한다면 그러한 은행은 일반기업과 마찬가지로 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은행이 망하면 정치·사회적 댓가가 너무 크기 때문에 정부는 은행을 망하게 할 수 없고 그래서 아직 은행이 파산한 예는 없다. 결국 은행감독을 철저히 하여 부실경영을 사전에 예방하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국제화 시대에는 은행감독 기능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앞으로 우리 은행들이 국제경쟁을 하자면 은행의 경영상태를 투명화하고 경영지표를 국제기준에 맞추어 나가야 한다. 국제결제은행(BIS)의 자본비율 규제와 함께 기타 금융단체의 평가를 받게 되고 평가결과는 국제경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에 대비하자면 은행에 대한 지도와 감독기능이 선진화되어야 하고 대외거래에 관한 새로운 감독기능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관련하여 최근의 일본의 경험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일본 大和은행의 뉴욕지점이 미국 국채거래의 부정경리를 11년 동안이나 은폐해오다가 발각이 되었는데 감독관청(대장성)도 시정조치를 취하지 않고 차일피일하다가 결국은 미국 감독당국으로부터 철수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일본은행 전체의 위상이 떨어지고 자금 조달 코스트에 이른바 저팬 프리미엄(Negaitive의)이 붙게 되었는데 이것은 국제화 시대의 은행감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 준다. 우리 은행들도 부실채권을 빨리 정리하고 경영관습과 지표를 국제기준에 맞추는 혁신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중앙은행과 감독기능

우리의 은행감독원은 한국은행에 속해 있는데 중앙은행이 감독업무를 직접 담당해야 하느냐에 대하여는 외국에서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생각하건대 중앙은행이 감독업무를 직접 담당하면 금융인의 동류(同類)의식에서 감독이 소홀해지고 기강이 해이해질 우려가 있는 반면에 정부가 감독업무를 맡게 되면 금융에 관한 전문지식과 상세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합리적 감독이 어렵게 되고, 부질없이 감독권을 악용하여 중앙은행과 금융기관에 부당한 압력이나 간섭을 가할 소지가 있다.

한편 제2절 3항에서 필자가 피력한 회상(回想)과 관련하여, 우리 나라의 정치-사회풍토를 염두에 두고 이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우리 나라에서 독립성을 가진 한국은행이 은행감독권마저 행사한다면 금융사고나 금융부정이 발생할 경우 언론이나 국회는 한국은행 총재에 대하여 정책적 책임뿐만 아니라 감독책임을 물을 것이다. 총재는 빈번히 국회에 나가야 하고 정당은 정략적으로 사건을 확대하여 총재의 인책사직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중앙은행의 위신은 손상되고 일관성 있는 정책수행이 어렵게 될 우려도 있다. 모두가 중앙은행에 어울리지 않는 일들이다. 하기야 지금은 정경유착이 어느 정도 단절되었고 실명제가 실시되어 정치와 금융풍토가 크게 달라졌다고 할지 모르나 어쨌든 한국은행이 감독책임을 맡는 데에는 정치적 영향이 따르게 된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필자의 소견으로는 한국은행과 은행감독원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둘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앞으로 국제화가 진전되면 어차피 은행, 증권, 보험업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상호연계가 중요해지는 만큼 차제에 이 세 분야의 감독업무를 통합하여 가칭 금융감독원(혹은 위원회)을 창설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이 기관은 정부기관이라기보다 정부 외에 한국은행 및 제3자가 참여하는 독립단체로 조직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행은 정치적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는 위치에서 정책적 업무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대기업에 대한 여신 편중

끝으로 대기업에 대한 여신 편중의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재벌이 비대화하는 메커니즘은 바로 금융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기업에는 이른바 규모와 범위의 이익(Economy of Scale and Scope)이 따르게 마련인데, 외형 확대에 전념하는 은행들은 예금고와 수수료를 얻기 위하여 재벌기업과의 거래를 유지, 확대하는 것을 사활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재벌기업들은 단자회사, 증권회사, 보험회사 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자금융통력이 막강하므로 그 내실이야 어떻든 부도의 염려는 없다. 그래서 은행들은 중소기업을 기피하고 재벌기업에 대한 융자를 선호한다. 결과적으로 (1)대기업에 대한 대출편중 → (2)대기업의 사업확대 → 3)대기업의 수신력 증대 (1)대기업에 대한 대출편중의 순환과정이 계속되는 가운데 재벌의 비대화가 진행된다. 이러한 반면 정부가 은행들에 대하여 제아무리 중소기업 대출을 촉구해도 자기의 퇴직금을 걸고 중소기업에 대출하는 지점장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문제이고 정부가 해결해야 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중앙은행이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금융면에서도 중대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너무 크기 때문에 부도를 낼 수 없고(Too big to fail) 결국 '최후의 대주'가 구제할 수밖에 없는 궁지에 몰린 일은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과거에는 그것은 국내문제에 그쳤지만 국제화 시대에는 국제문제로 확산된다(지금 일본이 직면하고 있는 금융위기가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본래 금융 시스템의 기본기능은 '리스크를 팔고 사는 것'이라 한다. 대출에는 리스크가 따르게 마련인데 리스크를 관리하고, 리스크를 등급화하여 그에 상응하는 금리차를 붙여 리스크를 분산시켜 가며 돈을 버는 것이 은행이다. 그런데 우리 은행들은 오직 외형 확대에만 집착하는 나머지 리스크 관리에 둔감하고 그 현대적 금융기법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만약 리스크 관리에 능하다면 무조건 중소기업을 기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만약 정책 당국이 대출금리를 자유화하여 신용이나 리스크에 따라 금리차를 두도록 내버려 두면 은행들의 리스크 관리가 쉬워지고 결과적으로 중소기업에게 자금이 더 많이 가게 될 것이다. 정부가 중소기업의 이자부담을 경감할 생각이라면 재정자금으로 이차보상을 하는 것이 시장원리에 맞는 일이다.

하여튼 국제화 시대에 우리 금융이 외형주의에 매달리고 리스크 관리를 소홀히 하면 크게 후회하는 날이 올 것이다. 한국은행의 적절한 대책과 지도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결론 : 한국은행의 내일

이상에서 중앙은행의 역사적 추세와 국제화 시대에 우리나라 금융이 당면하는 문제들을 살펴보았는데 한국은행의 기능과 자율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 주요한 시사점이다. 그런데 자율성 혹은 독립성이라 할 때 그 내용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문제이다. 독일연방은행의 경우처럼 물가안정을 경제정책의 최고 우선순위에 두고 그를 위하여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갖는 독립성이 있는가 하면 정부의 관여 없이 단기금리 또는 재할인율을 변경할 수 있다는 의미의 독립성도 있으며, 정부가 예산과 인사(총재를 제외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독립성도 있을 것이다.

인플레가 경제적으로 만병의 근원이니 만큼 독일연방은행의 독립성이 부러운 모델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것은 식자들과 위정자들이 경제에 대한 깊은 통찰과 물가안정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철석 같은 신념을 갖지 않으면 실현되기 어렵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그러한 이상형을 바랄 수는 없겠지만, 과거의 경험을 거울삼아 한국은행의 법적지위와 기능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점에 관련하여 스탠리 피셔 교수는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고 거기에서 7개항의 교훈을 도출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좋은 지침이 될 것 같다. 5) 이것을 참조하면서 한국은행의 바람직한 변화방향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은행의 최우선 목적이 통화가치(물가)의 수호임을 법에 보다 명료하게 선언한다. 금리와 환율결정의 책임은 한국은행으로 일원화한다. 금융통화위원회는 정책목표를 공표하고 국회 및 국민에게 정책집행과 결과에 대하여 보고할 책임을 진다. 금융통화운영위원회는 금융통화위원회로 환원하고 한국은행 총재가 의장이 된다. 위원에는 금융에 관한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가진 인물을 포함하도록 하고 정부추천위원의 수를 줄인다. 금융통화위원회의 회의록을 공개한다.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거나 장기차입을 위해 국회의 동의를 얻고자 할 때에는 금융통화위원회의 의견서와 관계 회의록을 첨부케 한다. 금융통화위원회는 정부의 경제정책에 협조할 의무를 지나 정부는 통화, 신용에 관련된 정책결정에 있어서 사전에 한국은행 총재와 협의하도록 한다. 한국은행 총재의 지위를 격상하고 중대한 과오가 없는 한 법정임기를 채울 수 있도록 법에 명기한다. 은행, 증권, 보험 감독기능을 금융감독원(가칭)으로 통합한다.

물론 중앙은행의 자율성을 강화한다고 하여 자동적으로 인플레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중앙은행은 통화가치를 수호함을 목적으로 하지만 그것을 보장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성패는 주어진 환경과 중앙은행의 실제의 운영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단편적 대증요법 중심의 경제운영 방식 에서 탈피하여, 보다 능률적이고 안정된 경제운영을 통하여 인플레를 잊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발상의 전환을 할 때가 왔다. 한국은행의 내일에 관하여 활발한 논의가 있기 바란다.


1)1980년대 부동산에 대한 과잉투자로 인한 천문학적 부실채권의 발생, 미국으로부터 철수명령을 받은 大和은행의 부정사건, 3개 신용조합의 파탄 등으로 일본 금융계는 중병을 앓고 있다.

2)Grill, Vittorio, Donato Masciandaro and Guido Tabellini, "Political and Monetary Institutions and Public Financial Policies in the Industrial Countries" Economic Policy, (October 1991). 341∼392.
이 논문은 다음의 한국은행 자료에 번역되어 있다. 『중앙은행의 발달과정과 현대적 역할 - 영란은행 창립 300주년 기념 강연회 및 심포지움 발표자료』(한국은행 조사제1부 1994년 4월) 조사대상에 다수의 후진국을 포함하면 은행독립성과 인풀레율 사이의 상관관계가 드러나지 않는데 개도국의 경우에는 법에 쓰여진 독립성과 실제 사이에 너무나 큰 괴리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온 것 같다고 연구자들은 말하고 있다.

3)3개 신용조합이 파탄에 직면하자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일본은행은 동 은행법 제25조에 의하여 1조650억 엔(1995년 10월말 현재)의 특융을 실시하였는데, 일본은 과거에도 증권시장의 붕괴를 회피 하기위하여 증권회사에 특융을 실시하는 등 전후 6회의 특융을 한 일이 있다. 그러나 우리보다는 적은 편이다 (자료 : 일본 『이코노미스트』1996년12월 18일호).

4)이 점에 관한 필자의 의견은 다음 논문에서 볼 수 있다. D .W. Nam, "Korea's Economic Take Off in Retrospect," in S. Y. Kwack ed., The Korean Economy At A Crossroads, (Prager Publishers, Westport, CT, U.S.A. 1994년) 3∼19.

5) 전기 한국은행 조사부자료, "중앙은행의 발달과정과 현대적 역할" p.153∼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