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태지역 형세와 한중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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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10월4일∼8일, 한중미래포럼,중국, 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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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의장, 참석자 및 귀빈 여러분,

이번에 [한중미래 포럼]이 주최하는 이 회의에서 "아태지역(亞太地域)의 형세(形勢)와 한중관계"에 관하여 본인의 사견을 피력(披瀝)해 보라는 요청을 받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먼저 그러한 기회를 허여 하신 본 포럼 의장께 충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아울러 이 자리에 참석하신 양국의 석학들과 각계 지도자들을 뵙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세계속의 중국과 한국

먼저 한중양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돌이켜 보면 세계 속에 아태지역이 있고 아태지역속에 동북아지역이 있고 동북아지역속에 중국과 한국이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한 양국의 정치, 경제 그리고 양국관계는 이러한 주변지역과 세계의 형세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먼저 세계적 추세를 보면 정보화, 국제화, 개방화가 시대적 조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무릇 세계역사의 발자취를 돌이켜 보면 부족, 민족, 국가, 지역 사이에는 인간, 사상, 물자, 문화의 교류를 가로막는 허다한 장벽들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부단히 그러한 장벽들을 제거하거나 뛰어 넘어, 인간 활동의 범위와 지평을 넓혀 왔습니다.
장벽은 대별하여 물리적 장벽과 인위적 장벽으로 분류되는데, 물리적 장벽의 으뜸가는 것은 지리적 장애(障碍)와 거리, 즉 교통 통신상의 장벽이고, 인위적 장벽의 으뜸가는 것은 정치적 장벽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물리적 장벽은 교통, 통신 기술의 혁명적 발달에 의하여 거의 해소되었고, 인위적 장벽은 무력 또는 비 무력적 수단에 의한 정치적 통합, 또는 경제와 시장의 논리에 따라 점차로 제거 또는 완화되어 왔습니다. 이제는 동서간의 교류를 가로막던 정치적 장벽도 냉전체제의 해소와 함께 거의 사라졌고, WTO의 출현이 상징하듯이 국가간의 경제적 장벽도 현저히 낮아지는 추세에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교통 통신의 발달은 자연적 장벽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인위적 장벽마저도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따라서 과학, 기술의 발달과 국가간에 경제적 교류가 확대하는 한 국제화 내지 개방화는 거역(拒逆)할 수 없는 역사적 추세라 할 것입니다.

국제화, 개방화가 필연적인 추세라 하더라도 그 과정은 결코 단순치가 않습니다. 거기에는 국가간의 이해관계의 충돌이 있고 특히 개도국에는 내부적으로 적응의 진통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일례로 6년간의 난항 끝에 Uruguay Round의 협상이 타결되고 WTO체제가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만은, 실지로는 아직도 일부 국가들이 약정사항을 회피하거나 위배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예컨대 이른바 일 국이 타국에 대하여 특정 상품 수출의 "자율규제"를 강요하는 일은 AR에서 불법화되었으나 그 대신에 반덤핑조치 및 상쇄관세 부과 등의 이른바 "행정적 보호주의"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WTO를 통한 다변적(Multilateral) 분쟁해결 절차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 선진국들은 여전히 강압적인 쌍무협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논란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Uruguay Round의 협정사항의 시행이 궤도(軌道)에 오르기도 전에 선진국들은 노동, 환경 및 경쟁질서에 국제적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는 "새로운 문제"들을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한편 개도국들은 농산물, 공업제품, 금융시장 개방에 대응하여 산업구조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농업과 중소기업의 침체와 국제수지의 악화에 직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나라가 다같이 국제화, 개방화를 지향해야 하나, 각국의 서로 다른 현실과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 지금 국제사회가 직면한 기본 문제라 하겠습니다. 중국은 아직 WTO에 가입하고 있지 않으나, 머지 않아 가입하게 될 것인데, 한중 양국이 당면하는 문제점이 유사한 만큼, 서로의 경험과 정보를 나누어 가며, 가능한 한 국제적 교섭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공조해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태지역

세계에서 아태지역으로 눈을 돌리면 이 지역은 세계경제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태지역을 조직화한 APEC은 지금 세계 총교역양의 45%와 세계 총산출양(GDP)의 54%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미국, 캐나다와 같은 북미주 국가와 칠레, 멕시코와 같은 남미국가의 경제를 제외한다면 그 비중은 세계교역의 약18%, 세계 총산출양의 약25%로 낮아집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동아시아 혹은 동북아의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일본,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홍콩, 대만 또한 대미 시장의존도(20 내지 29%)가 매우 높고 북미주가 자본 기술의 주요 공급원임을 생각할 때 이 지역의 국가들과 협력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APEC은 이른바 "개방적 지역주의"라는 기치 하에 UR 협상을 뒷받침했고 지금은 새로운 다변적 협상을 위해 앞에서 말한 ''새로운 문제"들을 대화 테이블에 올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의 개도국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수호하고 개방에 따르는 진통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APEC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여튼 태평양 해류에 씻기거나 근접해 있는 선진국과 개도국들이 아태시대의 기치를 들고 경제적 공동이익 추구를 위해 다각적 협력관계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한. 중 양국은 이러한 지역적 협력에 있어서 응분의 역할과 책임을 분담해야 할 것으로 믿어집니다.

동북아 형세

아태지역 내에는 AFTA, NAFTA, CERTA(New Zealand-Australia Closer Economic Relations Trade Agreement)등의 경제 블록이 존재하는데 동북아에는 역내국가간의 고도의 상호의존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지역협력체가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동북아를 광의로 정의하여 중국, 홍콩, 대만, 일본, 남한, 북한, 동부시베리아, 몽골을 포용하는 것으로 보면, 동북아 경제권은 이미 EU, NAFTA와 필적(匹敵)할 만한 경제규모(GDP)를 갖게 되었고, 역내 교역량은 아직 전체교역양의 약17%에 불과하나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고 있고 역내 상호 직접투자 또한 100억 달러 선을 넘어 급속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지역 개도국의 주요과제는 외국의 자본, 기술을 도입하여 경제개발을 촉진하는 것인데 특히 선진국으로부터의 자본이동이 필수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점을 고려하여 본인은 일찍이 가칭 [동북아개발은행]의 창설을 제창한 바 있는데 이에 관하여는 별도로 배포한 본인의 논문을 참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편 동북아에는 각종 정치적 장벽이 경제교류와 협력을 제약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중국과 대만, 남한과 북한의 분단상태, 일본의 침략전쟁이 남긴 상처,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 일본과 중국, 일본과 한국사이의 대소 도서(島嶼)에 대한 영유권 문제 등이 경제협력의 걸림돌이 되고 있고 때로는 안보상의 긴장상태를 자아내기도 합니다.
특히 한반도의 정세는 매우 우려스러운 상태에 있습니다. 그 동안 한국정부는 중국을 포함한 우방 제국의 협력을 얻어 남북한의 UN 동시가입을 실현하였고, 역시 중국을 포함한 국제적 노력으로 북한의 핵 확산 계획을 저지하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남한과 우방각국의 노력은 아직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한 정부는 관계개선을 위해 남북정상회담, 남, 북과 미국, 중국을 포함한 4자 회담, 경제원조와 협력 등을 끈질기게 제의해 왔습니다 만은, 북한은 극심한 식량난과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남한 정부의 모든 호의적 제의를 일축하고 오로지 미국과의 일방적 평화조약 체결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평화조약이 체결되면 미군철수를 요구하여 남북간의 군사적 균형을 깨뜨리고 남한의 정부와 체제를 전복하려고 하는 종래의 비현실적 전략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최근에 북한의 무장간첩 21명을 태운 북한 잠수함이 동해안에 침입하다가 좌초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은 평양의 대남 전략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40년 동안 이러한 무력도발을 수없이 당해 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북한이 비현실적인 대남 전략을 포기하고, 중국을 본받아 경제개혁에 주력하여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제하고,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의 길을 택하게 할 수 잇느냐 하는 것이 남한이 몽매(夢寐)에도 잊지 못하는 염원인데, 이것은 비단 남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 나아가 아태지역 전체의 안전보장에 직결되므로 우방제국의 공동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남한은 중국이 과거에 남. 북의 UN 공동가입이나 핵 문제 해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처럼 다시 한번 그 영향력을 행사하여, 북한이 경제개혁과 개방, 그리고 남한과의 관계개선의 길을 택하도록 강력히 권고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만약 북한이 중국의 충고에 응하지 않는다면 북한은 영원히 지금의 경제적 파탄과 국제적 고립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한.중의 협력 관계

1992년의 국교 정상화이후 불과 4년만에 한중 양국의 협력관계는 정치, 경제, 문화의 각 면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이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장벽의 제거가 얼마나 해당 국의 경제발전을 촉진하고 나아가 안전보장에 기여하는가를 역력(歷歷)히 보여준 실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양국 정상의 공식 방문과 행정, 입법, 사법 3부의 수장(首長)의 상호교류가 있어 양국의 우호 협력 관계는 날로 돈독해지고 있고, 경제면에 있어서는 양국간의 년간 교역 액이 이미 작년에 165억불에 달하였고 한국의 중국에 대한 투자 누계도 27억불(허가기준)을 넘어 섰습니다. 양국 국민들의 상호방문도 70여만 명에 달하여 인적 교류가 날로 확대하는 추세에 있습니다. 특히 1994년 6월 양국 정상이 합의한 [한중 산업협력체제]하에서 자동차, 민간 항공기, 전자교환기(TDX), 고화질TV, 및 원자력 분야에서 공동투자, 공동기술개발, 공동생산, 공동판매 계획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양국의 경제협력이 나날이 확대되고 있는데, 중국 측 관계기업들은 대부분 국영기업이고 중국정부가 경영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중인데 반하여, 한국 측은 대부분 민간 기업들인 만큼 양측의 기업과 정부간의 유기적 협조가 없이는 사업추진이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양국의 제도, 정책, 관행이 다른 만큼 경제교류의 확대에 따라 마찰이 발생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하겠는데, 그럴수록 양국사이의 정보교환과 연구를 통해 상호이해를 증진하는 한편 양국 정부의 조정노력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중 미래 포럼]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맺는 말

이상에서 급변하는 국제정세하에서 한중 양국이 직면한 약간의 문제점과 양국관계의 발전 방향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컨대 한중 양국은 첫째로 세계적 추세인 국제화, 개방화에 적절히 대처해 나가야 하고, 둘째로 아태지역의 공동번영을 위하여 APEC을 통하여 동서와 남북간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조절하고 경제협력을 증진하는 제도적 장치로 살려 나가야 하고, 셋째로 양국간의 경제적 교류를 한층 더 원활히 하여 양국의 경제발전을 촉진해야 하고, 끝으로 북한의 경제개혁과 개방을 촉구하여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도모해야 하는 공동의 과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 각분야에서 양국이 쌍무적 또는 다변적 차원에서 긴밀히 협조해 나가는 것이 양국은 물론 동북아세아, 나아가 아태지역의 밝은 미래를 열어 가는 데에 필수 불가결의 조건이라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감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