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체제와 기업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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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2. 19 종합무역연수원 무역실무정규과정 특강  


머리말

필자는 윤리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 한다는 것이 마치 설교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기 자신이 도덕적으로 결함이 많은 주제에 남에게 윤리 도덕을 운운한다는 것은 건방진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기업윤리가 크게 문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다 같이 걱정하고 생각해 보자는 뜻에서 오늘 이 문제를 여러분 앞에 제기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기업윤리의 위기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고 있는 기업윤리 문제의 여러 형태를 예시해 보고자 한다. 먼저 기업가와 근로자 사이의 이른바 노사관계에 있어서 생활 수준상의 지나친 격차가 문제되고 있다. 물론 기업주와 종업원의 소득수준이나 생활수준이 같을 수도 없고, 같은 것이 반드시 공평한 일도 아니지만 기업주나 기업간부의 생활수준이 그 기업의 분수를 넘어서면 임금수준이 낮은 종업원들이 기업주를 존경하고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어느 외국 사람으로 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즉 그가 어느 중소기업 사장집에 초대를 받아 가보았는데 우선 집이 아주 호화로운데 놀랐다고 한다. 덧붙여 만약 종업원들이 그 사장집을 드나들었다면 아마도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야기 끝에 귀사에는 노사 문제가 없느냐고 넌지시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사장은 있기는 하나 자기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그는 그 사장집을 다녀온 뒤로부터 어쩐지 그와 거래하는 것이 불안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는 기업주의 경영철학이 의심스럽다는 지적이 숨어 있다 하겠다. 기업은 사유물이고 종업원은 고용인이니까 기업주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생각이 지금 사회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고 있다.

기업과 소비자 사이에는 불량식품, 부실공사, 불량제품, 허위광고 등이 말썽이 되고 있고, 기업과 기업 사이에는 야비한 방법의 불공정 경쟁, 독점의 횡포,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불신과 마찰 등이 문제가 되고 있으며, 기업과 공무원 사이에는 부정부패가 불치의 고질병처럼 되어 이를 개탄하여 왔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업윤리의 타락은 그 자체로서 문제가 될 뿐 아니라, 우리가 받들고 있는 자유경제체제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자유경제체제와 공산주의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자유경제체제는 이념적으로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 자본주의 혹은 자유기업주의라고 불리워지는 자유경제체제는 19세기 중엽부터 공산주의자들의 격렬한 증오와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다. 초기 공산주의자들에 의하면, 근로자의 빈곤을 비롯한 모든 사회악의 근원은 자본주의제도에 연유하는 것이므로, 어차피 그 자체의 모순에 의하여 변증법적으로 지양될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체제를 혁명적으로 파괴하고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앞당기는 것이 노동자, 농민 등 무산계급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경제사가들은 자본주의 때문에 농민노동자가 살 수 없게 되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가령 미이제스 교수는 자본주의 초기의 상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당시 노동자의 생활수준은 극히 낮았고,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생활상태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은 발전하는 자본주의적 공업화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들은 공장에 고용되어 오기 이전에 이미 인간 이하의 생활수준에서 방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이제스 교수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공장이 부녀자나 어린아이를 고용하였다고 하는 유명한 옛 이야기는 수백 번이고 되풀이 되었지만, 공장에서 일하기 이전의 이들 부녀자나 아이들이 만족할 만한 생활상태에서 살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역사상 최대의 거짓말 가운데 하나이다.'1)

이 점은 단 한 가지의 통계만 들더라도 명백해진다고 미이제스 교수는 말한다. 즉 영국자본주의가 번져 나가던, 이른바 산업혁명의 시기였던 1760년부터 1830년 사이에 영국의 인구는 두 배가 늘었는데, 이것은 그 이전의 시대였더라면 굶주리고 병나서 죽었어야 할 수많은 아이들이 살아남아서 어른으로 자랐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여튼 그때(1760년대)부터 200년의 세월이 지나갔고 한편 소련에서 혁명을 통해 공산정권이 들어선지도 50여 년이 지났다. 오늘에 와서 자유경제체제와 공산체제는 과연 어떤 역사적 심판을 받고 있을까. 먼저 소련 및 기타 공산국가부터 보기로 한다. 공산주의는 사유재산도 없고, 이윤도 없고, 착취도 없고, 불평등도 없고, 모두가 고루 잘 사는 사회를 만든다고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실제로 보여 준 것은, 경제면에서는 자유세계에 엄청나게 뒤떨어지고, 자유면에서는 국민 각자의 교육, 여행, 결혼, 독서, 직업, 보수, 상품, 주거, 의료는 물론 자기가 죽어서 어디에 묻힐 것인가 하는 것조차 당과 정부만이 결정할 수 있는 악몽과 같은 사회였다.

필자는 최근에 소련에 관하여 다시 한번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련의 관영지 이즈베스티야의 보도에 의하면, 소련사람의 평균수명이 1964년 67세에서 1980년 62세로 줄었다는 것이다. 현대 국가 중에 평균연령이 줄어든 나라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인데 그 주요원인은 의료시설의 빈약, 날로 더해가는 과음, 교통사고 및 산업재해 등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1985년 봄에 취임하자마자 이 사실에 자극을 받아 국민들의 음주량을 줄이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한 바 있지만 소련과 같은 사회에서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2)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있다. 소련 경제지 Voprosy Ekonomiki(1985년 1월호)에 의하면, 소련에는 800만의 '사영'농장이 있는데 이들은 경작지를 소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토지상의 생산물의 자유처분권이 인정된다는 의미에서 사적농민이라 할수 있다. 공산주의 견지에서 보면, 이러한 사적 농경은 청산되어야 할 자본주의의 잔재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암'경작과 "암"시장이 최근 급격히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손을 못 대는 것은, 그러한 사영농업의 생상성과 품질이 국영농장에 비하여 너무나 높기 때문이다. 소련의 통계에 의하면, 사영농장 면적은 소련 전체 농경지의 5%에 불과하지만 거기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가액은 소련 전체 농업생산액의 25%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소련 내의 감자 총생산량의 3분의 2, 달걀·우유·육류·야채의 3분의 1, 양·돼지 등 가축의 20%가 이 영세한 사영농장에서 공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적 국영기업이 얼마나 비능률적인가 하는 것은 공업분야를 들여다 보면 더욱 실감나는 것인데 예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3)

예컨대 지난 반세기의 소련 및 기타 공산주의 국가가 입증한 것은 (1)공산주의체제는 경제적 능률이 엉망이어서 국민의 생활수준, 특히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수준을 자유세계 만큼 개선하지 못하였다는 것, (2)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양립할수 없다는 것, (3)마르크스-레닌주의는 설득력을 상실하였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지난 200년의 역사를 가진 자유경제체제는 그 동안 여러 가지 문제와 변화를 겪어 왔지만, 기본적으로는 동·서의 윤리적 발전에 적합하고 물질적 향상과 자유를 양립케 하는 제도로 발전해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자유경제체제에 있어서 기업은 생산과 고용을 조직화하고, 소득을 창출하는 구성단위가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실로 자유세계의 경제적 업적은 기업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이나 북한사회에 살아본 경험이 없는 일부 소수의 지식인, 정치인, 학생들은, 아직도 공산주의를 신앙처럼 믿고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폐단(도덕적 타락을 포함해서)은 그 체제 자체의 작용에 연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공산혁명 외에는 다른 치유책이 없다는 맹신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그들의 맹신이 어떠한 이성적 혹은 사실적 증거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공산주의가 원래 일종의 종교적 신앙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원래 종교적 신앙에는 강렬한 윤리적 감정이 따르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인 부도덕에 분노하면 할수록,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굳혀 가는 경향이 있다 해도 반드시 이상한 일은 아니다. 설사 공산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기업의 부도덕이나 불평등에 분노를 느끼게 될 때, 막연하게 자본주의 반대개념인 공산주의의 구호와 선전에 귀를 기울이고 이끌리게 된다는 것도 있을수 있는 일 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향이 보편화 되면, 자유경제체제를 신봉하는 사람들 마저 체제에 대한 신뢰와 신념이 약화되어, 정치적 측면에서 자유경제체제를 옹호 하고자 하는 용기와 정열을 잃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자유세계는 공산주의와의 이념전쟁에서 무기력을 드러내고, 설사 공산주의가 아니더라도 여러 형태의 국가통제의 확대를 자초하게 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예컨대 기업 윤리의 타락은 한편으로 공산주의 맹신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통제를 자초하여 자유경제체제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말이다. 윌리엄 사이먼스는 이 점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윤추구라는 이름 밑에 불법행위를 하거나, 기본적 윤리규범을 위반하는 사람은 자유기업체제를 비판하는 불평가들을 모두 합친 것 이상으로, 이윤이라는 단어를 추악한 죄악의 대명사로 만드는 데 공헌하는 사람들이다."4)

윤리관의 제문제

이리하여 자유경제체제를 유지 발전시키는 데에는 우리의 도덕적 재무장이 필요하다 하겠다. 그러나 기업윤리에 관하여 몇 가지 그릇된 통념이 우리를 사로 잡고 있는 것 같다. 즉 우리는 인간생활에 있어서 도덕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 하지만 그것이 인간 생존의 필수조건이라고까지는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현대 산업사회에서 사는 우리들은 물질적인 것에만 정신이 쏠려 도덕과 윤리같은 정신적인 측면은 뒷전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빵이 없이 살 수 없듯이 윤리적 규범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은 명백 하다.

우선 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자연 도태 과정에서 살아남은 동물은 반드시 힘이 세고 공격적인 동물들이 아니라 - 일례로 공룡 같은 - 집단적 요구와 구성원의 요구를 조화하는 어떠한 질서를 세워 각 구성원이 그에 복종할 줄 아는 동물의 무리 - 예컨대 원숭이, 늑대, 개미와 같은 - 였다고 인류학자들은 말한다. 물론 사람이 그런 점에서 '만물의 영장'이 되겠는데 사실 인류의 진화를 위해서는 사회적 협동이 개인의 목적 못지 않게 중요했다는 것이 인류학에서 여러 가지 증거에 의해 증명된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는 개인간의 협동이 필요하고 어떤 법질서와 도덕률에 의한 개인행동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법률과 도덕률의 두 가지 질서 중에서 도덕률이 법률의 기초가 되고 '법 위의 법'이라는 것도 우리의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왕조와 국가와 문화가 멸망한 이면에는 반드시 도덕적 타락이 있었다는 것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다음에 자본주의적 자유경쟁사상은 어쩐지 윤리를 경시하는 것 같은 인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자유주의 경제사상의 원조는 '국부론'으로 유명한 아담 스미스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원래 도덕철학가로서 '국부론' 이전에 '도덕정조론(Theory of Moral Sentiment)'를 쓴 사람이고, 그의 유명한 자유방임론에서는 도덕규범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국부론'에서 자유경쟁의 기본원칙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개인이 정의의 법칙을 위반하지 않는 한 마음대로 그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그 자신의 근면과 자본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허용되여야 한다."5)

즉 스미스는 자유경쟁은 '정의의 법칙', 다시 말해서 도덕규범을 지키는 전제하에서만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정직하면 손해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가 하면, 특히 기업경영에 있어서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것은 경영전략이나 상술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하기야 부정하고 부도덕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데에 성공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기업인 전체에 해당하는 관찰은 아니다. 이 세상에 언제나 병자가 있다고 해서 세상은 본시 병들어 있고, 이 세상에 범죄가 사라지는 날이 없다고 하여 세상이 범인의 지배하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같은 이치로 전체적으로 보고 또 길게 보면 악행으로 사업에 성공한 예는 많지가 않다. 사업에 크게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세평은 구구하지만, 그러나 그들을 눈여겨 보면 대략 세 가지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필자는 본다. 첫째는 사업에 정열적이고 근면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업가와 그가 파는 상품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얻고 있다는 것이고, 셋째는 경쟁에서 남보다 한 발 앞서는 창의력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신뢰나 신용은 정직에서 오는 것인데, 정직이야말로 도덕의 기본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정직한 사업가가 손해를 보기보다는, 정직이야말로 기업경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산인 동시에 그야말로 최선의 정책임이 경험적으로 입증되는 셈이다. 결국 정직하면 손해라는 말은 사이비 기업인의 천박한 속언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가치관의 역사성과 보편성

윤리.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는 쉬운 일이지만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윤리규범의 구체적 내용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고 변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학자들에 의하면, 원시 사회에서는 선물의 교환과 혼인관계를 통하여 상부상조하는 일종의 호혜주의가 윤리적 기초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6)

고대사회에 이르러서는 사회구조가 주인과 노예로 구분되는 계급사회로 변하는데, 농민과 노예의 생산적 능력을 보존할 필요에서 지배층은 생산물의 일부를 서민에게 되돌려 주지 않을 수 없는지라, 여기에서 '고귀한 신분에는 의무가 따른다'는 일종의 시혜주의가 도덕적 관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한다.

중세사회에 와서는 종교적 신앙이 사람들의 가치관을 지배하였다. 중세인들은 신의 부르심으로 구제를 받기 위하여 자기 천직에 헌신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요,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막스 베버에 의하면, 이러한 종교적 헌신주의는 캘비니즘을 거쳐 당시에 등장한 활발한 자본주의 속에서 그 뜻을 펼 수 있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계약, 법인조직, 원가계산과 같은 근대 산업제도에 윤리적 기초를 부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근세에 들어와서는 윤리, 문화, 사회, 경제에 관한 모든 제도가 한층 복잡해지고, 각 제도는 저마다 자기나름의 논리를 주장하게 되어 이른바 '가치의 무정부 상태'를 보이게 되었다. 중세의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퇴색하고, 신은 이제 추상적인 의미만 가졌을 뿐, 이미 어버이와 같은 실존적인 존재는 아니며, 개인의 성공을 위한 동기를 상실함에 따라 그전처럼 좁고 곧은 길로 구제를 향하여 정진하려는 정열과 노력도 식어 버리고 말았다. 천국과 지옥도 이제는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자아의 반사(反射) 또는 상상에 불과하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현대사회가 윤리적 위기에 처해 있음은 사실이고 그 위기의 특징은 권위에 대한 불신으로 집약될 수 있다 하겠다.

특히 한국사회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불교 및 유교사상과 서구적인 외래사상들이 뒤범벅이 되어서 가치관과 행동기준에 일대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 이다. 아주 작게는 차를 탈 때나 실내에서 상석을 의식해서 갈팡질팡 하는 것 처럼 예의상의 기준이 통일되어 있지 않은가 하면, 크게는 정치·사회문제 등에 대하여 보는 눈이 너무나 각각이어서 사회적 의견조정과 통합이 매우 어렵고, 그것이 평화적인 정치발전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이 기업경영과 기업윤리의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가치관의 혼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이 현대국가 공통된 과제인데,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은 얻기가 어렵다. 다만 이러한 경우에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윤리의 보편적 원칙에 비추어서 윤리관의 역사적 상대성과 지향점을 동찰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된다. 그러면 윤리의 보편적 원칙이 무엇이냐가 문제인데, 가령 불교에서는 자비를 가르쳤고,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가르쳐 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조금 더 실제적인 말로 표현한 것을 찾아본다면, 흥미롭게도 공자와 그리스도가 같은 원리를 각각 다른 말로 가르치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즉 기원전 6세기에 공자는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행동 원리를 한마디로 말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라는 제자의 질문을 받고,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 -己所不欲 勿施於人 -"라고 답하였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고 가르치셨다. 공자는 소극적인 측면에서 예수는 적극적인 측면에서 평등·호혜주의를 가르치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이 원리를 현대의 가치관에 어떻게 구체화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의 초점이 되는것 같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윤리관의 역사적 변천과 윤리의 보편적 원칙을 아울러 생각해 볼 때, 새로운 가치관의 주요 내용은 아무래도 인간성의 회복, 자유, 평등, 협동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이를테면 호혜적 공생주의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기업인들이 우선 알려진 손쉬운 도덕규범부터 솔선 실천하고, 시대적 변천에 따라 달라지는 가치관에 대해서도 능동적인 수용자세를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비근한 예로 노사관계를 옛날의 주종관계로 보는 가치관은 버릴 때가 왔다. 새로운 가치관은 노사가 회사라는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기능과 조직상의 위치는 서로 다를망정 서로가 평등한 인간적 차원에서 동고동락하는 공생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하겠다.

맺음말

이제 필자의 말을 맺을 때가 됐다. 예컨대 자유경제체제는 빵과 자유를 다같이 줄 수 있는 경제제도로서 적어도 200년의 역사를 통하여 생성 발전하여 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마르크스 - 레닌주의의 이념적 도전을 받아 왔지만 그 동안의 공산주의의 실패는 의심할 여지 없이 입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공산주의 맹신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는 것은 자유경제체제 내의 윤리적 타락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 도덕의 개념과 기준은 역사적으로 변천하여 왔고 우리는 '가치관의 무정부 상태'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공생주의로 재무장하고 알려진 도덕규범을 존중하고 실천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그것만이 자유기업주의를 살리고 나 자신의 기업도 살리는 길이다.


 

1) L. v. Mises, "Economic Policy - Thoughts for Today and Tomorrow" Regency Gateway Inc. Chicago, 1979. 박병호 譯, "自由로의 指向" pp.27∼8

2) The Conference Board, "Centrally Planned Economies in Europe: Economic Overview 1985," Report No. 879, pp.9∼16.

3) The Conference Board, "Centrally Planned Economies in Europe: Economic Overview 1985," Report No. 879, pp.9∼16.

4) Ivan Hill, ed., "The Ethical Basis of Economic Freedom," 김유탁 譯, "자유경제체제와 윤리적 배경,"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77, p.185

5) Adam Smith, "An Inquiry into the Cause and Nature of the Wealth of Nations" Chap. 5, [國富論] 제5장 참조.

6) James S. Peacock, "윤리, 경제사회의 시대적변천" 김유탁譯 "자유경제의 윤리적 배경" 성균관대학출판부 pp.2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