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경제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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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7월 17일 대한상공회의소 주최
제19회 최고경영자대학 강좌(장소 : 경주) 


윤리적 목적과 수단

1. 경제와 윤리

경제생활에 있어서 윤리와 도덕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도덕과 윤리가 없으면 우리의 경제생활은 아귀다툼의 수라장이 될 것이고 거기에서 안녕과 질서, 번영은 기대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반윤리적이라고 생각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고, 그를 다스리기 위한 법적 수단을 갖게 된다. 그러나 법 위의 법이 윤리이고 보면 윤리적 바탕이 없는 사회에서는 법질서를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거기에는 보편적 개념과 원칙이 있기는 하나 구체적 가치기준과 도덕성의 내용은 역사적으로 크게 변천해 왔다. 가령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와 같은 종교적 가치관은 영구불변의 것이라 할 수 있고, 공자의 "자기가 원치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너희가 남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가르침은 인류의 근원적 도덕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성인들의 가르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힘있는 사람들이 신의 이름으로 종교적 박해를 가하거나 정의의 이름으로 인권을 참혹하게 유린하는 일들이 유사 이래 오늘까지 계속되어 왔다. 따라서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기존의 가치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찾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가치관이 변화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신.구 가치관의 다툼이 있고, 모든 권위에 대한 불신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지금 우리는 그러한 가치의 무정부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인데 결국 한 사회의 시대적 가치관은 역사적 경험과 각성 그리고 사회적 공감에 의하여 그 내용이 형성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일례로 우리는 지금 노사분규로 적지 않은 고통을 겪고 있는데 그 과정을 보면 노사양측의 가치관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때인 만큼 우리는 예수와 공자가 가르친 도덕률의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활 각면에서 새로운 가치질서와 권위를 회복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2. 윤리적 목적과 정책적 수단

처음부터 이야기가 빗나가고 말았는데 필자가 정작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경제정책은 윤리와 도덕성을 떠날 수 없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도덕성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지만, 시장경제체제하에서 윤리주의가 경제정책을 오도하여 윤리목적과 상반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정책가는 언제나 시장경제의 자율기능을 염두에 두고 또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정책수단을 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일견 의외로 들릴지 모를 위 논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아주 비근한 예를 들기로 하자. 수년 전에 서울시가 버스업자들에게 노인들의 무임승차를 의무화한 일이 있다. 시 정부가 경로사상의 본보기를 보이고 노인들을 보호하려는 선한 동기에서 출발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했느냐 하면 버스들이 노인들의 승차를 기피하는 까닭에 노인들은 좀처럼 버스를 잡기 어렵게 되었고, 필자의 장모 또한 차장이 떠미는 바람에 넘어질뻔 하였다 하여, 정부가 왜 그 따위 정책을 시행하여 노인들을 괴롭히느냐고 본인에게 항의한 적이 있다. 그러면 보다 나은 방법은 없었을까? 만약 서울시가 버스 업자로부터 승차권(쿠폰)을 매입하여 통.반장을 통하여 노인들에게 배부하였더라면 비용은 들지만 이러한 불상사는 회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 후 서울시가 이러한 방향으로 우대권제도를 도입하였다 하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 둘 점은 윤리적 동기가 좋았다 하더라도 현실에 맞지 않는 정책은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3. 윤리주의의 허와 실

또 한 가지 예를 들자. 지난날 일부 논자들은 이 나라의 임금수준이 낮은 것은 악덕기업 탓이라고 몰아붙였다. 이 주장에는 만약 기업들이 마음만 고쳐 먹으면 일시에 근로자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다는 관점이 깔려 있는데 과연 그런가? 그 실상을 알아보자면 시장경제체제하에서 임금수준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노조가 없는 상태하에서는 업주가 일방적으로 임의의 임금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은 그렇지 않다. 가령 지금과 같이 노동시장에서 하루 6만 원을 주어도 사람을 구하기가 어렵다면, 제아무리 '샤일록'과 같은 기업가라 할지라도 그 이하의 임금을 결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정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1950년대에는 하루 임금이 지금 돈으로 1,000원 정도였을 것인데, 그 임금으로도 일자리가 없어서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허다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양심상 1,000원의 임금을 줄 수 없으니 2,000원을 주겠다고 나서는 인도적 기업가가 있다면 얼마나 있을 것인가? 있다면 그 기업가는 시장경쟁을 도외시해도 좋은 특수한 위치에 있는 기업가였을 것이다.

결국 시장경제체제하에서는 임금수준은 그때그때 노동의 수급상태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기업가는 이 수급상태가 결정하는 임금수준의 상하 일정 범위 내에서 다소의 재량권을 행사할 여지는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일반적으로 임금상승으로 근로자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길은 노동공급에 비하여 수요를 크게 하는 일, 다시 말해서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발초기에 우리는 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의 임금수준이 경쟁국에 비하여 너무 높다는 소리가 높다. 그러나 그것은 윤리주의나 노조운동의 결과라고 하기보다는 기본적으로는 경제성장에 따라 사람이 귀해진 탓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기야 지난 수년 간의 극심한 노사분규가 임금상승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임금수준의 실질가치를 장기적으로 지탱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다시 돌아가 노동의 수급상태와 내외 시장상태에 달려 있다. 따지고 보면 그 동안 임금이 크게 올랐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시장의 자동조절 기능을 통하여 물가상승, 수출부진, 고용감소 등에 반영되었고 결국 실질가치는 시장적 실세로 돌아가는 경향을 보여 왔다.

지난날 일부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선진국처럼 최저임금제를 도입하지 않는다 하여 정부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사정으로는 최저임금제의 실시는 말과 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워낙 실업자가 많은 노동수급의 불균형 상태하에서 최저임금제를 실시하면, 그 이하의 저임금을 감수하고라도 일자리를 구해야 호구(糊口)할 수 있는 수많은 극빈자에게 그나마의 고용기회마저 법적으로 차단하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정치적 목적으로 최저임금 수준을 높게 정하면 정할수록 그러한 가능성의 범위는 커질 것이다. 최저임금제는 노동의 수급상태가 어느 정도 균형상태에 있을 때에나 실업자를 포함한 근로자 전체의 이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최저임금제의 도입이 시기상조라고 맞섰던 것이다.

예컨대 이 세상에 소수 악덕기업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생산성을 크게 밑도는 임금을 지급하는 기업들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악덕기업에 표적을 두는 윤리주의만으로 임금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고, 시장경제체제 하에서는 인력을 귀하게 만들고 노동생산성을 치켜 올리는 경제정책이 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근대경제학의 아버지 A. 마셜이 정책가는 따뜻한 마음과 함께 냉철한 이성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각종 윤리주의와 경제학은 서로 손잡을 필요가 있다.

4. 아파트 투기의 교훈

수년 전에 경험한 아파트 투기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무주택 서민층에게 값싼 주택을 공급한다는 취지에서 아파트 가격을 통제하고 통제가격 하에서 수요초과가 심해지자 추첨제도를 도입하여 당첨자에게 아파트를 배분하였다. 당첨자는 시장가격과 비교해서 막대한 이득을 얻게 되므로 실수요자가 아닌 투기꾼들이 추첨장에 몰려들었고 거기에서 여러 가지 비리가 저질러졌다. 정부는 투기를 진압하기 위하여 각종 통제수단을 동원하였지만 과연 그 많은 주택이 정말로 구호를 필요로 하는 저소득자에게 돌아갔는지는 의문이다. 이 경우에도 좀더 시장경제의 생리에 맞는 방법을 택했더라면 정부의 윤리적 정책목적은 보다 잘 실현되었을 것이다. 한 가지 정책대안을 제시하면 이렇게 된다. 즉 입주대상을 가리지 않고 아파트 가격이 시장에서 형성되도록 내버려 둔다.

만약 당초에 투기수요가 작용했다면 가격이 높아지고 주택건설업자는 일시적이나마 폭리를 취하게 될 것이다. 정부는 조달청 및 국세청의 자료를 동원하여 주택의 원가를 계산하고 적정이윤(다소 매력적인)을 초과하는 금액을 세금으로 흡수하여, 그 전액을 서민주택기금으로 적립한다. 정부는 이 자원으로 임대주택을 대대적으로 건설하여 정말로 가난한 서민층에게 거주처를 마련해 준다. 이렇게 되면 투기꾼이 덤벼들 소지가 없어지고 주택은 자연히 실수요자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고 가격은 수요·공급이 균형을 이루는 선에서 안정될 것이다. 이것이 시장경제체제하에서 흔히 채용되는 표준적 정책모델인데, 우리나라의 공무원들은 시장의 기능을 무시하고 안이하게 통제와 간섭적 수단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5.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

맹목적 윤리주의가 경제운영을 그르친 예는 이 밖에도 얼마든지 들 수 있는데, 그럴 것 없이 통틀어 사회주의 경제의 경험을 예로 들면 이야기는 끝날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언제나 자본주의 사회의 부도덕성을 강조하고 그를 지양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하기야 K. 마르크스 자신은 사회주의 사회는 어떠한 윤리주의나 사상운동(이른바 공상적 사회주의)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변증법적 법측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도래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이 점은 그의 다음과 같은 말에도 잘 나타나 있다. "노동자 계급은 실현해야 할 어떠한 이상을 갖지 않는다. 다만 무너져 가고 있는 부르조아 사회의 태내에 이미 발달한 신사회의 요소를 풀어 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쨌든 사회주의가 정의사회 구현을 위하여 채택한 방법은 전면적 통제경제체제였는데, 70년 이상의 실험 끝에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은 실로 경이적인 일이다. 그러면 사회주의가 실패로 돌아간 원인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사회주의 경제의 몰락이 결국 K. 마르크스의 세계에서 아담 스미스의 세계로의 회기를 의미한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스미스에 의하면 인간성에는 이기와 이타의 양면이 있다. 사람은 제아무리 이기적이라 하더라도 남의 운명을 배려하고 남의 불행에 대하여 동정심을 일으키는 일면이 있다. 이 동정 혹은 이타심이 도덕의 최후 근거이다. 반면에 사람은 이기심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인간생활의 경제적면을 지배하는 최후의 근거이다. 이타심과 이기심의 양면을 갖는 인간은 윤리적 규범을 범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고, 그를 위하여 타인과 경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인'의 활동을 자유에 맡겨두면 국가가 간섭하거나 통제할 때보다 더 공공의 선이 잘 실현된다. 이것이 스미스의 철학이었다. 만약 우리가 스미스의 철학에 동의한다면 사회주의가 실패한 근본원인은 그 사상과 제도가 근본적으로 인간성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성의 무시는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유물사관의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6. 시장기능을 활용해야

이제 이상의 논점을 정리하건대, 경제뿐만 아니라 인간생활의 모든 면에서 도덕성이 요구됨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경제생활의 최소한의 도덕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법적 규제조치를 강구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대부분 경제정책이라기보다는 일반 사법정책에 속하는 것들이다. 형법, 민법, 식품위생법, 환경보호법 등이 그 예이다. 한편 경제정책은 공정거래법, 세법, 사회보장법, 생활구호법등을 통하여 분배적 정의와 사회적 형평을 도모할 수 있는데, 그 정책이 시장경제의 원리와 기능을 무시하면 왕왕 역효과를 가져오거나 아니면 의외의 부작용을 수반하게 된다. 따라서 경제정책은 언제나 시장의 자동조정 기능을 염두에 두고 또 그것을 충분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시장기능이 완전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기능에는 생리도 있고 병리 혹은 '실패'도 있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기능을 활용하면 문제를 보다 간편하게 그리고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이해부족이나 기득권자의 저항 때문에 그 방법을 포기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물론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시장의 실패'에 대하여는 그것대로 대책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시장기능에 맡겨 두면 빈익빈 부익부의 경향이 영구화 한다든가 과다 선전에 의한 자원의 낭비가 따른다든가 의료, 교육, 공원과 같은 공공 서비스에 대한 투자가 뒤떨어진다든가 혹은 공해의 가해자와 부담이 불투명해 진다든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정부나 공적 기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정부가 시장의 자동적 조정기능에 개입함으로 해서 여러 가지 혼란이 생긴다는 것이 이론적으로 많이 지적되고 있는 만큼 정책가들은 간섭정책 운용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7. 결론

이상의 논의에서 몇 가지 정책적 결론을 도출하면 다음과 같다.

(1)윤리적 목적을 위한 경제정책은 통제나 간섭보다는 경제적 유인(혹은 비 유인)을 제공하여 경제단위의 이기적 반응을 유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2)윤리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경제 문제는 대부분 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부족을 해소하는 첩경은 가격유인을 제공하여 공급을 늘리고 수요를 억제하는 것이다. 덮어 놓고 윤리주의를 내세워 비현실적인 통제가격을 강요하는 것은 서민들의 고통을 연장하는 길밖에 되지 않는다(택시요금, 의료수가, 상수도료 등등이 그 예이다).

(3)정부가 통화량, 금리, 환율, 재정수지 등의 거시적 변수를 합리적, 안정적으로 관리하면 윤리적 시각에서 기업경영에 간섭하거나 통제해야 할 필요성은 훨신 적어진다. 가장 윤리적인 경제정책은 거시적 변수의 균형과 안정을 유지하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4)끝으로 사회지도층의 시장경제에 관한 보다 깊은 이해와 통찰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일각에는 시장경제 내지 자본주의라 하면 무조건 불신하는 풍조가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특히 윤리주의자들과 경제학자들 사이의 빈번한 대화와 상호이해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