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체제 2년을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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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 30일,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동창회 주최 조찬 연설 


 

빠른 회복 국면

    1997년 말 외환위기 발생으로 IMF 체제가 시작된 후 2년이 지났는데 지금의 주요 경제지표를 보면 그야말로 괄목할만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금리는 30%에서 9-10% 선으로 떨어졌고 환율은 1,700원대에서 1,200원대에서 안정되었고 바닥이 났던 외환보유고는 700억 달러 수준을 돌파하였다. 실업률은 7%까지 올랐다가 4%대로 떨어졌고 경제 성장률도 작년의 마이너스 5.8%에서 금년에는 약 9%의  고성장이 예견된다고 한다. 이러한 추세에 고무되어 지난 12월 3일 서울에서 개최된 [한국의 경제위기와 구조개혁을 위한 국제포럼]에 참석한 미셀 캉드쉬 IMF 전무이사는 그 동안 IMF가 "위기를 맞아 추진 했던 정책들이 옳았다는 증거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12/03 조선일보) 했고 김 대통령도 "금융, 노동, 공공, 기업 등 4대 부문의 개혁을 추진한 결과 1년 반만에 외환위기에서 탈출하였다고" 선언하였다. 우리는 그 동안의 IMF와 정부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보여준 노력과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그러나 캉드쉬의 말과 김 대통령의 선언에 대하여는 약간의 토를 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책담당자에게는 사태의 객관적 인식이 중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IMF의 공과

    먼저 IMF의 위기관리 방식이 옳았다고 하는 캉드쉬의 말부터 음미해 보자. 작년에 필자는 세계은행에서 연설도 하고 세미나에 참석한 일이 있는데 그 때마다 IMF의 대응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고 지금도 그러한 견해에는 변화가 없다. 나의 기본 견해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먼저 당시의 한국사태의 핵심은 유동성 부족에 있었다고 나는 본다. 경제의 fundamentals에는 큰 문제가 없었고 이것이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의 사정과는 다른 점이다. 물론 외환 위기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점과 무관 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 사실은 외환위기 이전에 이미 국제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국내에서도 그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IMF 이전에 이미 13개의 금융개혁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에 있었다는 것이 그를 말해 준다. 다만 문제는 인도네시아, 태국에서 외환 위기가 발생하자 외국 투자가들은 외환 위기가 타국으로 파급되지 않을까 신경을 쓰게 되었고 그러한 시각에서 한국의 구조적 취약점을 다시 보게 되어 불안감이 가중되었다는 것뿐이다. 어쨌든 주변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면 한국에 투자한 외국 투자가들은 불안해 질 수밖에 없다. 고금의 경제사가 말해 주듯이 금융위기에는 언제나 심리적 요인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가령 어떠한 은행의 지불능력이 의문시된다는 풍문이 돌면 예금주가 은행에 몰려와서 예금 환불을 요구하게 되고 이러한 경우 지불 불능에 직면하지 않는 은행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때에 고객들의 심리적 불안을 진정시키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즉 충분한 유동성을 마련하여 고객들이 원하면 언제라도 돈을 내줄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긴급히 IMF에 긴급 융자를 요청했다. 이러한 구원 요청은 IMF 회원국의 당연한 권리이고 바로 그 목적을 위해 IMF가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그 당시 IMF가 즉각적으로 3-400억 불 정도를 한국에 융자할 수 있었다면 한국은 외환위기를 회피하고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필요한 거시정책의 조정 (환율, 금리 조정 등)을 할 수 있었으리라고 필자는 본다. 그러나 IMF는 이러한 즉각적인 대응에 실패했다. 실패한 이유는 IMF는 흔히 세계의 중앙은행으로 지목되지만 그에 상응하는 자원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IMF 당국도 이점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러기에 가용자원의 부족을 완화하기 위하여 회원국의 증자계획을 추진 중에 있었고 특히 선진국 회원들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의회의 반대로 180억 달러의 증자 쿼터를 이행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IMF는 자기자금 이외에 각국 정부와 교섭하여 이곳 저곳에서 출연금을 긁어 모으는 한편 민간 금융기관에 협조를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니 시간이 걸렸고 동시에 한국 정부와 융자조건을 협상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으니 외환위기에 대한 신속하고 효과적인 대응이 불가능했다.

    융자조건의 핵심은 한국에 대한 외국 투자가들의 신임을 회복하는 데에 두어졌고 그를 위하여 한국 정부에게 IMF의 傳家寶刀인 안정화 시책의 실시를 요구하였다. 즉 금리와 환율의 완전 유동화, 금융 재정의 긴축, 8%의 BIS 자본 비율 기준에 의한 부실 금융기관의 퇴출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외환 위기는 금융위기로 확대되고 금융위기는 마침내 경제위기로 치달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니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1)

    필자가 보기에는 이러한 한국의 경험은 IMF 헌장 제1조에 명기한 설립목적을 무색케 하는 것이다. IMF 헌장 제 1조에 의하면 회원국이 국제수지 불균형에 봉착했을 때 "자국경제 및 국제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파괴적인 조치를 취함이 없이 불균형을 시정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위하여" 일정한 조건하에 일시적으로 자금을 대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기 되어있다. 2) 그러나 IMF가 과연 정부가 "파괴적 조치"를 회피할 수 있도록 한국을 도와 주었는지 아니면 오히려 파괴적인 조치를 강요하여 일시적이나마 한국경제를 파국으로 몰아넣지 않았는지 이 점은 앞으로 학계에서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어쨌든 현재의 국제통화체제와 IMF는 오늘의 금융시장의 세계화에 적절히 적응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전면적 개편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캉드쉬가 그 동안 IMF가 "위기를 맞아 추진 했던 정책들이 옳았다는 증거들을 확인 할 수 있었다."라고 한 말을 무조건 받아드릴 수는 없다. 아마도 한국의 경제회복이 지금이 아니라 2년이나 3년 후에 왔더라도 IMF는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긍정적 측면만 보고 그 배후에 깔린 대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IMF의 거시적 정책 처방은 비현실적이고 필요 이상의 대가를 강요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IMF의 거시 정책 처방은 그렇다 하더라도 IMF는 다른 의미에서 한국 경제에 큰 공헌을 했다. 왜냐하면 만약 IMF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강도 높은 구조개혁은 있을 수 없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자고로 한국은 외압이 없으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나라이다. 이번만 하더라도 IMF를 불러 들일 때, 당시의 대통령 출마자는 자기가 당선되면 IMF의 융자 조건을 재검토 하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러나 당선이 되자 IMF의 강경한 요구에 따라 금융 및 기업 개혁 프로그램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경제회복이 구조조정의 결과인가?

    지금 우리가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경제 회복이 구조조정의 결과라고 보는데 대하여는 의문이 있다. 그러므로 최근에 한국은행이 발표한 3/4분기 GDP 잠정 추계 자료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경제 지표를 볼 때 우리는 비율의 마술에 오도 되기가 쉽다. 금년의 성장률이 9%에 달한다 하면 굉장한 일 같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작년에 5.8%나 감축된 GDP의 크기에서 9%가 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1997-99년의 GDP 평균 성장률은 2.7% 내외가 될 것이다. 특히 금년 3/4분기의 GDP 성장률 12.3%는 1997년 3.4분기에 비하면 3%가량이 높을 뿐이다.

  다음에 지출면에서 평가한 3/4분기 GDP는 (1)소비, (2)고정 투자, (3)재고투자, (4)순 수출(수출-수입)로 구성되는데 삼성경제연구소가 산출한 각 구성요인의 증가율과 전체 성장률에 대한 기여율은 아래의 표와 같다. (이 표는 분기별 잠정추계에 불과하므로 개별 수치의 년간 확정치는 알 수 없고 다만 개략 판단의 자료로는 쓸 수 있다.)

1999, 3/4분기 경제성장 지출항목의 증가율과 기여도 (전년 동기비, %)

 

증가율

기여도

백분비

경제 성장률

12.3

 

100

 1.소비지출

10.3

 5.4

   43.9

 2.고정투자

 6.9

 2.0

   16.2

 3.재고투자

61.6

 5.2

   42.2

 4.순 수출  

 6.1

 1.0

    8.1

(수출)

22.2

 

 

(수입)

32.0

 

 

통계상의 불일치

 

-1.3

-10.4

  

  이 표를 보면 특이한 현상이 눈에 띤다. 즉 3/4분기에 재고투자가 61%나 증가하여 12.3% 성장율의 약 40% 이상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재고투자가 61%나 증가하였다고 하나 실은 재고투자의 감소 폭이 적어 졌다는 의미의 증가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가령 -5에서 -10를 빼면 +5가 된다는 의미의 증가이다. 같은 이치로 작년 3/4분기에는 재고가 - 8.3조원의 감소를 기록하였는데, 금년 3/4 분기에는 -3.2조원의 감소에 그쳤으므로 5.1조원이 증가했다는 계산이 된다. 재고 투자라 함은 팔다 남은 상품 및 제조과정에 있는 반제품의 합계액의 기간 증가 액을 말 함인데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기업들은 생산을 중단 혹은 감축하고 재고를 계속 줄여 나갔다. 그러나 소비가 계속되는 한 재고감소에는 한계가 있고 생산 재개에 따라 감소 폭이 조금씩 줄어 들다가 경기가 호전되면 절대적 증가로 돌아 서는 것이 경기변동의 일반적 현상이다. 어쨌든 재고 감소 폭이 줄어든 것은 생산증가를 반영하는 것인데 그러나 이것은 경기순환에 관련되는 현상이지 구조조정의 효과라고 보긴 어렵다.  

  다음에 3/4분기 고 성장률의 또 한가지 특징은 높은 소비 증가율에서 볼 수 있다. 즉 소비지출이 전년 동기 대비 10.3% 증가하였고 이 요인이 전기 GDP 성장률의 약 43%를 설명한다. 이것은 지난 2년 동안 억눌렸던 소비수요가 반동적으로 폭발한 결과인데 그 소비형태를 보면 PC, 승용차, 가구, 전자제품 등 내구재 지출 증가세가 두드러진다. 이것은 비교적 저축의 여력이 있는 중산층 이상의 소비행태를 반영하는 것인데 그 이면에는 금리하락, 작금(昨今)의 사회 풍조가 작용했을 것이다.

  다음은 정작 중요한 고정투자의 동향인데 금리 인하가 기업의 재무상태를 개선하고 투자를 자극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한국은행 자료에 의하면 고정투자는 1/4 분기에는 전년 동기 대비 4.3% 감소 하였다가, 2/4분기에 4.9%의 증가로 반전하였고, 3/4 분기에는 6.9% 증가로 가속화하고 있다. 그러나 투자는 금리뿐만 아니라 다른 요인, 특히 기업의 투자마인드에 좌우된다. 그런데 구조조정의 진통을 겪고 있는 지금, 기업들의 투자마인드가 전반적으로 왕성하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GDP 성장률에 대한 고정투자의 기여율의 추이를 보면은 1/4분기의 -1.2%, 2/4분기의 1.5%, 3/4분기의 2.0%에 불과하고, 3/4분기의 고정 투자도 전체 성장률의 약 16% 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이것은 고정 투자가 아직 충분히 활성화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비투자의 내용을 보면 자동차등의 운수장비 및 기계류 등에 편중되고 있는데 이것은 내수 및 수출증가를 반영하는 것이다. 반면에 건설투자는 아직도 침체 국면에서 벗어 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구조조정에 따르는 재정수요 팽창 때문에 정부의 시설투자  마저 저조인 상태에 있다.

     다음에 수출의 동태를 보면 2/4분기에 5.1%의 감소를 보이다가, 3/4분기에 22.2%의 반등을 보였는데 그 내용을 반도체, 컴퓨터, 통신장비 등 중화학공업 제품에 편중되어 있다. 이른바 경쟁력이 없다고 하여 Big Deal의 대상이 된 업종들이 수출의 효자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일면 역설적이라 할 수 있다. 수출 증가에 기여한 최대요인은 일본 엔화 가치의 상승, 미국 경기의 호조 등을 들 수 있고 대만의 지진의 영향도 없지 않을 것이다.

  수입은 1/4분기에 27%, 2/4분기에 26.9%, 3/4분기에 32%라는 급속도로 늘어 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경기회복을 반영하여 원자재, 자본재의 수입이 급증하고 있고 소비재 수입도 대폭 늘어 나고 있다. 수출과 수입이 다같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으나 아직은 총액으로는 수출 초과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수입의 증가율이 매우 높다는 것은 경기호전이 계속되면 국제 경상수지가 다시 적자로 반전될 수 있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3/4 분기의 순 수출 (수출-수입)은 GDP 성장율의 8%를 설명하는 데에 그치고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최근의 경기회복은 소비증가, 재고조정, 일본의 圓高, 미국 경기의 지소적 호조 등에 기인한 경기 순환적 현상이지 구조조정의 기대 효과( 효율화 및 경쟁력강화)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결국 지금의 경제회복의 원동력은 모진 시련에 굴하지 않고 경영상의 난관을 돌파하려는 우리 기업들의 끈질긴 생명력 (vitality)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본시 구조조정은 시행에 시간이 걸리고 그 효과가 나타나는 데에는 더욱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구조조정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끝나지도 않았는데 지금 어떤 효과를 기대한다는 것은 성급한 생각이라 할 것이다.

구조조정의 현주소

    그러면 우리의 구조조정이 어디까지 왔는지 그 현주소를 알아 보기로 하자.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9월말 현재 국내 17개 일반은행의 부실채권은 19조원,혹은 총여신의 6.2%에 달한다 한다. 그 동안 은행들이 거액 부실여신을 성업공사에 매각했기 때문에 6월말에 비하면 약 27%가 감소한 숫자이지만 앞으로 대우 계열 여신 22조원의 상당 부분이 부실화하면 은행들의 부실채권은 더욱 늘어 날 것이다.

    또 다시 금융감독원 발표에 따르면 18개 일반은행의 6월말 현재 BIS 비율이 평균 9.84%로 개선되었다 한다. 그러나 그 중 8% 선에 접근한 은행은 평화, 제주 두 은행  뿐이고 나머지 13개 은행은 아직도 10-16% 권내에 있다. 한때 -10%와 -14%의 자본 부족 상태를 보였던 서울과 제일 은행은 공적 자금의 투입으로 지금은 10 % 이상의 자본 비율을 갖게 되었으나 조속한 정부 소유 주식의 매각이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앞으로 투자신탁회사의 구조조정을 비롯하여 제2금융권의 소유구조가 문제시되고 있는데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미봉책으로 投信社의 경영을 이리 묶고 저리 묶으면 투신사와 기업은 운신을 못하게 된다. 차라리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조치를 취하고 규제를 단순화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 할 것이다. 금융감독에도 문제가 있다. 금융정책과 감독기능의 구분이 명확치 않은 상태에서 정부는 그때 그때의 편의에 따라 간섭을 변호하기도 하고 자율에 빙자 하기도 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감독의 기준을 명확히 하고 그 기준에 따라 엄정한 감독을 하되 외부의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요즘 [신 동아]의 구조조정과 관련하여 정치적 의혹이 세상을 들끓게 하고 있는데 과연 앞으로 감독원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 공평하고 엄정한 감독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은행장들은 인사청탁, 융자청탁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우선 공직자가 금융기관이나 감독기관에 부당한 청탁이나 압력을 가하는 경우 법적 처벌을 받게 하는 조항을 금융감독 관련 법규에 삽입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한다.

  기업 부문에 있어서는 지난 11월 17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99년 상반기 기업경영분석 결과를 보면 제조업 부채비율은 작년 말의 303%에서 금년 6월 말에는 247%로 하락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부채비율 200%이상의 기업이 전체의 55%를 차지하고 있다. 5대 재벌기업에 대하여는 금년 말 까지 부채비율을 200%로 낮추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집단 내 개별 기업에 적용하는 비율인지 아니면 재벌의 결합재무제표상의 비율을 말 함인지 분명치 않다. 결합 재무제표의 제출기한이 2000년 6월까지로 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전자를 지칭하는 것 같기도 한데 하여튼 선의의 노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부여함이 좋을 것이다. .

  다음에 구조개혁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하여 몇마디 하고자 한다. 우리 정부의 관리능력은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에 비할 바는 아니다. 대통령의 지도력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개혁의 비전과 목적에 좀 더 투철했으면 하는 느낌을 준다. 비근한 예로 재벌에 대하여 당초에 5개항의 지침을 제시하였다가 추후에 3개항을 추가하여 5+3라는 말이 생겼는데 추가된 3개항은 제2금융권의 소유구조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부터 제시했어야 할 기본 과제였다. 필자를 포함한 일부 식자들은 처음부터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분리하는 방향에서 제2금융권의 소유구조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정부당국은 그것을 묵살해 오다가 재벌 구조조정 과정에서 누수현상이 발견되자 그를 틀어 막기 위해 3개항을 추가적으로 제시한 꼴이 되었다. 전면적인 경제 개혁을 단행하는 마당에서 처음부터 기본적인 사항을 빠뜨린 것은 개혁의 비전과 목적이 뚜렷하지 않았다는 평을 들을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구조조정 조치로 大宇 재벌이 해체 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정부는 구지 재벌 해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재벌 해체는 무엇이고 해체가 아닌 것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보기에는 지금까지 실시한 법적, 행정적 조치를 확고하게 밀고 나가면 재벌은 어차피 해체의 길을 밟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또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재벌 해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다음에 정부는 성과를 과시하기 위하여 너무 서두는 감이 있다. 목적을 명시하고 그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놓고 실행을 감시하는 체제를 확립하면 기업은 그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정부는 그들의 적응에 필요한 시간과 편의를 제공하는 데에 역점을 두면 된다. 현실을 무시하고 조급하게 기업들을 몰아 세우면 그들은 편법으로 규제를 회피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예컨대 500% 이상의 부채비율을 불과 2년에 200%까지 낮추라고 하니까 순환출자, 주가 조작 등의 편법을 쓰는 사례가 나타난다. 퇴로를 열어 놓고 적을 공격해야 작전에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같은 이치로 은행들에게 자본 비율 (BIS Ratio)을 불과 1-2년 내에 8%로 낮추라 할 때 당시로서는 대출 감축 밖에는 별다른 길이 없었다. 그 결과 극도의 금융경색으로 수 많은 괜찮은 기업들이 도산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부에서 일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정책 당국자는 이상과 현실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마련이다. 시장원리를 강조하다가 현실적 장벽에 부디치면 정부 개입을 변호하게 되고, 부실기업을 폐쇄했다가 지방민의나 정치적 압력에 못 이겨 조업재개로 돌아서는 경우도 있다. 결국 이러한 현실이 말해주는 교훈은 원리 원칙을 소리 높게 노래하다가 현실과 타협하기 보다는 처음부터 현실을 감안한 정책 처방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야 정책의 일관성이 없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고 시행착오에 따른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정책상의 일관성이 없으면 금융기관과 정부의 부담이 필요 이상으로 늘어나게 마련이다.

  외국 인사들은 언필칭 시장 원리에 따라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잘 이해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의 예를 들기로 한다. 금융기관이 독립해 있고 자주적 경영을 하는 상태하에서는 부실기업이 생기면 은행은 조용히 기업주를 불러서 은행의 입장을 설명하고 필요한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 한 융자를 계속할 수 없다고 통고 할 것이다. 이것은 금융기관이 시장경제하에서 자기가 살아 남기 위한 자위 수단에 불과하다. 기업주는 어쩔 수 없이 부실 기업을 처분하거나 혹은 증자를 위하여 백방으로 원매자 또는 출자자를 찾고 교섭을 벌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정부가 어떤 기업은 부실 기업이고 앞으로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공언한다. 그러면 그 기업은 삽시간에 붕괴하고 말 것이다. 대외적으로 교섭조건이 불리해지거나 교섭이 중단되는가 하면 외국의 판매망이 일시에 붕괴되어 수출의 길이 막히게 된다. 국내적으로는 계열 기업들이 동요하여 거래질서가 마비되고 연쇄 부도사태가 일어난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금융기관에게 계열기업에 대한 융자 확대를 독려하고, 은행들은 또 다시 정부 간섭으로 부실 대출을 껴안게 된다. 그 결과 금융기관의 BIS 자본 비율이 문제가 되면 공적 자금의 투입이 불가피하게 된다. 결국 부실 기업은 시장의 작용에 의하여 도태되기 이전에 공권력에 의하여 붕괴되고 그의 부수되는 비용을 정부가 떠 맡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시장 원리를 무시한 구조조정의 양상이라고 외국인들은 보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정부가 나서, 어떤 기업에게 부실기업이라는 낙인을 찍고 그것을 내외에 공언하는 예는 선진국에서는 보기 어렵다. 금융기관과 기업이 자신들의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고 정부는 기업 매매를 쉽게 하고 파산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으로 시장의 작용을 가로막는 제도적 장벽을 제거하는 동시에 금융기관을 엄정하게 감독하는 것이 본래의 기능이다. 그러지 않고 정부가 조급히 서둘러서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행정적 조치를 취하고 그에 따르는 비용을 정부(=국민)가 부담하는가 하면 외국인 에게 교섭의 칼자루를 넘겨 주어 헐값으로 국부를 유출시키는 것은 정부가 할 일이라 할 수 없다. 이 점에 관련하여 정부가 직접 개입하여 강압적 수단을 쓰지 않는 한 재벌개혁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투명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놓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김없이 원칙을 관철해 나가는 방법과 비교할 때 그러한 방법은 그 자체의 문제를 파생시킬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후환을 남길 우려가 있고 개혁의 가치를 손상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재벌 기업이라 하여 모두 죽여야 할 기업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그를 살리기 위하여 은행 융자를 출자로 전환 할 수 밖에 없게 되는데 그러면 경영권은 은행으로 넘어 간다. 그러나 필자 자신의 경험에 의한다면 부실기업을 은행 관리에 맡겨 성공한 예가 없다. 왜냐하면 은행은 채권 확보를 위한 자금관리에만 신경을 쓰지, 기업 소생을 위한 역동적 경영에는 관심도 없고 능력도 없다. 그래서 나는 세계은행, 금융기관 등이 주주로 참가하는 경영전문의 지주 회사를 만들어 그로 하여금 부실기업 경영을 전담케 하라고 제안 한 일이 있다. 세계 은행, IFC와 같은 외국기관이 참가하면 이 회사는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전문 경영인을 초빙하여 창의적인 경영을 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3)

 경제의 불안 요인

    3/4분기의 비약적 성장률에 불구하고 우리는 몇 가지 불안 요인에 직면해 있다. 그 동안 구조개혁을 이룩했다는 노사관계가 가장 걱정스러운 불안 요인이다. 소비자 물가는 1-11월에 0.8% 상승한데 비하여 1-9월에 명목 임금은 10.6% 상승하였다. 이러한 추세가 지속되면 또 다시 물가상승과 대외 경쟁력의 약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임금 상승 압력이 가중될 것이고 노사 분규가 또다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금 노조 퇴임 임원들에 대한 임금 지급 문제를 놓고 노동법 개정 시비가 재연되고 노조가 총 파업을 계획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금년 2월 8.6% 까지 상승했던 실업률은 10월 현재 4.6%로 감소하였다 하나 상용 근로자수는 줄고 임시 또는 일용근로자 수가 증가하여 고용의 불안정도가 높아지고 있다.

    둘째로 시설 투자와 기술개발 투자가 2년 동안 저조하였기 때문에 앞으로 지속적 성장력이 약화될 우려가 있다. 시설과 기술 투자는 몇 년이 지나야 생산효과를 발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투자의 懷姙기간). 참고로 금년 분기별 GDP성장률을 전년 동기 대비가 아니라 前분기 대비로 비교하면, 1/4 분기 4.1%, 2/4분기 3.9%, 3/4분기 3.0%로 둔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어쨌든 장래에 대비하는 투자가 없으면 지속적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셋째로 대외 경제에 불안 요소가 많다. 지금과 같이 수입 증가율이 수출 증가율을 앞서 가면 2년 후에는 또 다시 경상수지 적자로 전락할 공산이 크다. 뿐만 아니라 수출 품목이 반도체, 자동차, 전자 제품에 편중되어 있어서 (3품목이 전체 수출의 30%이상 차지) 동 품목의 수출이 부진하면 전체 수출이 급락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달러 환율은 금년 10월 이후 계속 내림새를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경상 수지흑자에도 있겠지만 외국자본의 유입이 또 하나의 요인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앞으로 환율과 금리, 물가, 임금 등의 거시적 변수를 교묘하게 조절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에 직면할것이다. 뿐 만 아니라 외국 자본의 유출, 유입이 주가를 좌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금년 98년 6월 이후 주식 시장이 활기를 띠었으나 총거래 대금의 76%를 차지하는 개인 투자가들이 거래한 종목의 주가는 평균 30% 가량 상승한데 반하여 기관 투자가와 외국인들이 매매한 종목들의 주가는 5배 이상 상승하였다. 결국 빈부 격차 확대와 국부의 유출이 있다는 말이 된다. 요컨대 대외경제의 운영 솜씨 여하가 우리 경제운용의 성패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내년과 그 다음해가 고비가 될 것 같다.

  넷째로 그 동안 빈부격차가 크게 확대되었다는 것도 불안 요인의 하나이다. 지금 상위 20%의 소득 계층이 점유하는 소득이 하위 20% 의 소득 계층이 점유하는 소득의 5.4배인데 1994년의 배수는 4.5배 였다. 소득 격차가 확대되면 형평의 견지에서 문제 될 뿐 아니라 소비 증가율의 둔화로 경기 후퇴를 가져 온다는 견해도 있다.

  끝으로 재정 적자 확대, 석유가 인상, 임금 상승 등이 물가 불안의 요인이 되고 있다. 특히 농산물 가격 상승이 도시민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맺음 말  

    요컨대 최근의 경기 회복세가 빠르다 하여 그것이 구조조정의 기대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아니 된다. 구조조정의 여정은 아직도 멀고 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더욱 먼 후 일에나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 서둘지 말고 착실하게 그리고 어김없이 구조조정을 추진 해야 한다. 경제개혁의 궁극의 목적은 지속적 경제발전을 통하여 국민의 생활수준을 고르게 치켜 올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실업자가 늘어나고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 문제가 현저하게 개선되는 날 경제개혁의 기대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자랑 해도 좋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21세기의 문턱에 서게 되었는데 개혁에 관련하여 금세기를 회고할 때 감개 무량한 바가 없지 않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20세기를 줄곧 외세에 시달리고 외세에 의존하면서 살아왔다, 금 세기 초 자주 독립을 위한 개화 운동이 있었지만 우리의 힘으로 개혁을 단행하지 못하고 甲午更張의 경우처럼 외국의 압력과 강요에 의해 개혁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백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도 우리는 외압에 의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1백년 전 조상들이 내세웠던 개혁의 이념과 지금의 개혁 이념 사이에는 계속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兪吉濬(유길준), 金玉均(김옥균) 등의 開化주의자들은 法治주의, 민주주의, 자유민주적 경제체제를 개혁의 목표로 내세웠는데 백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도 이들 목표는 未完의 과제로 남아있다.

  개혁의 방법에 관해서도 지금과 비슷한 문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예컨대 兪吉濬은 「虛名的(허명적) 開化와 「實狀的(실상적) 開化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虛名的 개화는 남의 것을 보고 앞질러 헤아릴 능력도 없이 무조건 이에 따라서 재물을 소비하는 것이고, 實狀的 개화는 사물의 이치와 근본을 살펴서 자기 나라의 실정에 합당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4)

  21세기를 눈앞에 둔 우리는 비단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교육 등 국민생활 전반에 걸쳐 개혁을 꾀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의 교훈에 따라 자주적 능동적으로 개혁의 목적을 실현해야 하고 허명적 개혁이 아니라 실상적 개혁으로 우리의 자강(自强)을 도모 해 나가야 한다.   끝



    1) 이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별고 "IMF 1년을 평가한다."에서 볼 수 있다.

    2) "to give confidence to members by making the general resources of the Fund temporarily available to them under adequate safeguards thus providing them with opportunity to correct maladjustments in their balance of payments without resorting to measures destructive of national and international prosperity." (The Italics are mine)

    3) 별고 "기업갱생공사" 에 보다 상세한 설명이 있다.

    4) 이기백, 한국사신론 (일조각, 1997 )  pp.349-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