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사태의 원인과 대책

1998년 7월 삼성 경제연구소, "IMF 사태의 원인과 교훈"에 수록된 논문, "위기의 한국경제: 그 원인과 대책" 중 중복을 피하기 위해 일부분을 삭제하였음


IMF사태의 원인과 대책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정부의 대책과 IMF의 구제 금융과 구조개혁 방안의 허점을 비판한다.


 

1. 금융 파탄의 원인

우리 금융에 구조적 취약점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왜 갑자기 금융이 파국을 맞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 의문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직접적인 원인은 해외에서 과다하게 차입한 단기 투기자본을 장기 시설투자와 증권투자에 투입한 결과 유동성 부족에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 이면에는 이 나라 경제의 구조적 결함이 내재하고 있었다. 즉 정부와 국민이 민주화의 진통 속에서 개방화, 정보화의 세계적 추세에 대응하는 산업 및 금융의 구조조정을 게을리 하여 국제수지 악화를 예방하지 못했고, 그러던 중 동남아 국가들의 외환위기를 계기로 하여 우리 경제의 취약점이 표면화되고 국제금융사회에서 신뢰를 잃게 되어 외환위기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민주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1987년의 이른바 6.29 선언을 기점으로 하여 민주화시대로 접어들었다. 물론 이것은 지난 30여년의 눈부신 경제발전의 터전 위에서 이룩된 자랑스런 정치적 발전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민주화의 진통을 겼고 있을 때 국제 경제환경은 나날이 변화하여 세계화의 추세는 우리의 무역과 자본시장의 개방을 요구하고 있었고 이에 대응하자면 우리경제의 전면적 구조개편이 불가피했다. 특히 국제경쟁력을 약화하는 요인으로 이른바 4고(고임금, 고금리, 고지가, 고물가) 3저(저기술, 저능률, 저부가가치)의 구조적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면 한국경제는 살아 남기 힘들다는 것이 식자들의 일반적 인식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민주화의 양상은 외국 사람이 평한 대로 "술에 취한 운전자"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격렬한 노사분규로 임금이 급상승하였고 이 나라의 경제 실력(생산성)이 지탱할 수 없는 보수수준이 일반화됐다. 부동산 투기는 지가(地價) 상승을 부채질하여 일확천금한 졸부들을 양산하는가 하면 집단 이기주의가 교통, 항만 등의 공공시설 확장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산업과 기업의 국제 경쟁력이 약화하는데 기업들은 새로운 진로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고, 환율마저 고평가 (저환율) 상태를 지속하여 수출을 더욱 불리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우리경제의 취약점은 1990년 이후 만성적 국제수지 적자로 집약되었고, 1996년에는 사상 최대의 경상적자(237억불)를 기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민정부"는 세계화의 구호를 내 세웠으나 그에 대응하는 구체적 시책을 일관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다. 오히려 구 중앙청 건물 철거, 외인 아파트 철거, OECD 가입, 월드컵 유치, ASEM 유치 등으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짐을 자랑하였고, 경제가 침체하여 여론이 악화되면 경제 각료를 경질하는 것으로 국면 전환을 꾀하였다. 김영삼 정부 5년 동안에 경제 부총리가 일곱 번이나 바뀌었으니 행정이 항상 불안정한 상태에서 정책 추진력이 약화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것이다.

한편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략적 차원의 부정부패 청산이 정치 일정으로 등장하였고 그 과정에서 전직 두 대통령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가 하면, 한보(韓寶) 그룹의 부도를 계기로 하여 정경유착의 연결 고리가 백일하에 드러나, 은행장, 국회의원 등 공직자와 재벌 총수들이 줄줄이 법정에 서게 되었고 현직 대통령의 아들 마저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국민들의 실망은 고사하고 국제 금융계에 비친 한국의 이미지가 어떠했는지는 상상조차 하기 싫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정치 드라마의 충격으로, 금융기관장 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이제는 잘못하면 철창신세를 지게 된다는 것을 실감한 금융기관장 들은, 불황 국면에서 기업들이 가뜩이나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는 때에 여신 업무를 조이기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금융력이 비교적 약한 중소기업과 기업 집단들이 먼저 부도를 냈고 드디어 기아(起亞)그룹이 그 뒤를 따르게 된다.

이러한 사태를 앞에 놓고 정부 당국자는 딜레마에 직면하였다. 즉 민간기업 부도사태에 정부가 개입할 일이 아니라는 자율화의 이상론과, 대량 실업과 금융기관 파탄을 예방하기 위하여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현실론이 엇갈린 상태 하에서 결단과 처리가 늦어져서 불안 상태가 장기화했다. 그 때문에 경제 분위기가 급속도로 악화하는 한편 외국 채권자들의 한국에 대한 신뢰가 더욱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상과 현실이 교착하는 과도기에 정부의 일 처리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해 주는 대목이다.

개방화의 과정에서

1990년대초 이후 상품시장 개방과 함께 자본시장을 요구하는 외국의 압력이 점점 더해 갔다. 식자들은 자본시장을 개방하자면 그에 앞서 국내시장을 먼저 자유화하고, 부실채권을 정리하여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국내금리와 국제금리 사이의 격차를 좁혀 놓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외국 단기 투기자본이 일시에 유입하여 환율을 왜곡하고 통화 증발과 인플레 압력으로 작용하다가 국내외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일시에 외국으로 빠져나가 1995년 멕시코 금융 위기와 같은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1)

그러나 금융의 구조조정은 지지부진하였고 그러다가 외압에 못이겨 1990년대 초부터 외환거래를 단계적으로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한국의 고금리에 현혹된 외국 투자가들은 해외에서 6-7%의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하여 한국에 가지고 와서 원화로 환전하여 12-3%의 고금리로 운용하면 환율이 안정되어 있는 한 두 곱 장사가 된다는 묘미를 맛보게 됐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이 자본시장을 더욱 개방해야 한다고 본국 정부를 통해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한편 외국 투자가들은 우리의 주가가 일반적으로 저 평가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주식시장에서 많은 주식을 매입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1991년 이전에는 미미했던 외국인 증권 투자가 1991-1996년 사이에 갑자기 610억불이나 늘어났다.2)

뿐만 아니라 자율화, 개방화의 바람을 타고, 은행, 종금사와 대기업들은 외국의 저리 단기자본을 차입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국내외 장기 투자에 투입하는가 하면, 해외 투자에 경험이 없는 종금사들은, 높은 기대 수익률에 현혹되어 인도네시아 혹은 러시아의 부실 채권을 사 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만성적 국제수지 적자나 단기자본 유입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단기자본 유입을 반영하여 환율(달러의 원화가격)은 안정적 추세를 보였는데3) 환율 결정은 시장기능에 맡겨야 한다는 시각 때문에 개입을 꺼려했고, 국제수지 적자에 관하여는 세계화 시대에는 국제수지의 국경적 의미가 달라진다고 하여 그를 걱정하는 필자를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비웃는 당국자도 있었다.

해외자본 유입에 따른 통화 증발과 인플레 압력을 상쇄하기 위하여 정부와 한국은행은 불태화(不胎化) 정책, 즉 유입한 외화를 외국으로 다시 내보내는 정책을 시도하였다. 예컨대 해외 여행자들의 환전 한도를 5,000달러에서 10,000달러로 상향조정하는가 하면, 외환 보유고 일부(40억 달라)를 은행을 통해 종금사에 예탁하여 그들이 해외 증권에 투자하는 길을 텄다.

이와 같이 정부는 개방화, 자율화의 추세에 안주(安住)하여 단기자본 도입과 그 용도를 방관해 오다가 외환위기가 터진 이후에 비로소 금융기관 및 기업의 해외차입 실태를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조사 결과 단기 부채가 무려 800억불에 달한다 할 때 그를 모르고 지내 오던 사람들은 아연(啞然)할 수밖에 없었0다. 결국 정부 당국자들은 개방화 자율화는 외채 관리 및 금융 감독의 부재 내지 소홀을 의미한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동남아 금융 위기와 신뢰의 붕괴

한편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제국들이 외환위기에 봉착하고 그것이 홍콩, 싱가폴에 까지 파급되는가 하면 일본에서도 잇따른 은행 파탄이 일어나자 서방의 투자가들은 과연 한국이 예외가 될 수 있느냐고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정보화 시대에는 국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순간적으로 세계 금융시장에 전파된다. 국제수지 악화로 1996년에 환율이 상승세로 돌아서자 외국 투자가들은 투자 수익의 환차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위에서 본 정치 드라마와 정경유착과 금융 비리로 한국 금융의 치부가 드러나자 한국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 국제수지가 만성적으로 적자이고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해외 단기 차입에 열중했는데 과연 대외지급에 문제는 없는 것일까?
  • 대기업들의 차입에 의한 자동차, 제철, 석유 화학 등에 대한 중복 투자가 과연 경쟁력이 있는 것일까?
  • 기업 집단들이 잇따라 도산하는데 한국 금융기관들의 부실 채권은 얼마나 될까?
  • 각 재벌들이 정치권에 바친 수백억 원의 비자금은 재무제표 어디에 숨겨져 있는 것일까?
  • 한국 금융기관이나 기업의 분식결산과 재무제표를 믿을 수 있는 것일까?
  • 현정부는 지금의 위기를 관리할 능력이 있는 것일까 ?

드디어 외국 채권자들은 한국으로부터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주식을 투매하자 주가가 폭락하고, 일시에 자금을 회수하니 환율이 폭등하고 드디어 외환 보유고는 바닥이 났다. 금융 파탄이 온 것이다.

이상을 종합하건대 민주화 과정에서 고임금, 고보수, 고지가, 과소비 현상이 미만(彌滿)하였는데 정부는 위상과 만불 소득(1인 당)을 자랑하며 국민들의 해이(解弛)를 바로 잡지 못했고, 기업들과 금융기관은 해외 금융의 냉혹함을 모르고 단기 차입으로 무모한 업무확장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거품에 불과했고 그것은 꺼지게 마련이었다.

요컨대 우리는 민주화에 슬기롭지 못했고 국제화, 정보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고 할 수밖에는 없다. 그런데 지난 10여년 동안 정치, 정부, 국민이 다같이 잘못한 일을 불과 수개월 재직한 경제부총리에게 그 파탄을 예방하지 못했다 하여 형사책임을 묻는다 하니, 개명된 어느 나라에서 이러한 예를 볼 수 있단 말인가!

IMF 거시정책의 공과

1997년 12월 3일, 드디어 우리 정부는 IMF로 부터 긴급 구제금융 580억3천500만 달러를 차입하는 약정서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우리 경제운영은 IMF체제로 넘어 갔다. IMF는 한국에 대하여 그의 전형적 거시정책 처방을 적용하여, 대외 자금거래를 정상화하고, 외환보유고를 축적하고, 인플레 압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환율의 무제한 유동화, 파격적 고금리 정책, 그리고 금융 및 재정 긴축을 강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거시정책 운영과 함께 일련의 구조조정 정책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 주요내용은 금융기관과 기업의 자본을 충실화하고, 경영을 시장원리에 맞고 투명하게 하는 동시에, 정부의 금융감독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동안 IMF가 주선한 580억 달러의 차관 중에서 금년 4월말까지 한국에 입금된 액수는 240억 달러에 불과하다. IMF와 그의 차관단은 한국정부가 IMF와 약정한 정책사항을 이행하는 것을 보아 가며 부분적으로 돈을 내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IMF의 지원으로 금년 3월에 31개국의 123개 금융기관으로부터 단기채무의 기한 갱신 또는 연장 동의를 받은 바 있고 정부는 지난 4월에 뉴욕 시장에서 외환평형기금채권을 팔아 40억 달러의 장기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금년 초부터 수입이 격감하여 국제수지 흑자 누계가 150억 달러 이상이 되어 외환보유고 증가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외환 사정의 호전으로

  • 환율은 1996년말의 840원에서 한때(1997년12월23일) 1,962원까지 폭등하였다가 지금은1,300원대로 내려왔다.
  • 외환보유고는 1997년말 불과80억 달러로 바닥을 드러냈으나 금년 3월말에는 300억 달러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 IMF가 정의하는 한국의 외채(External liabilities)는 금년 4월말 현재 1,552억 달러로 잠정 집계되었는데 이것은 종래의 세계은행 정의의 외채보다 약 300억 달러가 더 많은 숫자이다. 그러나 질적 측면에서 외채총액 중에서 단기부채가 차지하는 비율은 1997년말의 63.5%에서 4월말에는 27%까지 내려 왔다.
  • 금리는 한때 콜금리가 40%를 초과하였으나 지금은 22%까지 내려왔고 회사채 금리도 29%에서 18%선 까지 내려 왔다.
  • 이와 같이 외환 수지, 환율, 금리 등의 금융 변수는 상대적 안정을 회복하고 있는데, 반면에 실물경제는 심한 후퇴를 보이고 있다.
  • 산업생산은 금년 들어 계속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1월에 11%가 감소하였고 3월에도 2%가 감소하였다.
  • 급격한 환율(달러의 원화 가격) 상승에도 불구하고 수출이 그다지 늘지 않고 있다.
  • 소비자 물가지수 상승률은 1997년말 4.5%에서 금년 3월말에는 9,0%로 높아졌다.
  • 작년 12월 이후 금년 5월말 현재 15,000개 이상의 기업이 부도를 냈고, 정상기업의 조업률도 60%이하로 떨어져 있다.
  • 실업자가 150만명 혹은 6.5%의 실업률을 보이고 있고 앞으로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 주가는 1996년 평균 833원에서 지금은 340원대로 하락하였다.
  • IMF와 정부는 금년도 GDP의 성장률을 당초의 2-3%에서 마이너스 1-2%로 하향 조정하였는데 민간연구소들은 마이너스 3%를 전망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실물경제면의 위기현상은, 불황국면과 때를 같이한 고환율, 고금리, 신용수축, 통화긴축 등의 IMF 거시정책의 결과인데, 그것은 앞에서 본 정도의 구제금융과 그에 의한 외환사정 호전의 대가로서는 너무나 큰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정작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금융과 기업 부문의 구조조정은 이제부터인데 말이다.

하기야 그 대가는 교정(矯正)적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지금의 혹독한 시련을 겪으므로 해서 경제의 거품이 거두어지고,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지금까지의 잘못된 경영방식을 반성하여 자구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정부 또한 미루어 오던 구조개혁 정책을 이제는 추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것들은 IMF의 약효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좀 더 차분하게 사태를 수습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 점에 관하여는 나중에 재론하기로 하고 우선은 이제부터 본격화하는 금융과 기업 부문의 구조조정의 문제를 보기로 하자.

2. 금융부문의 근본문제

우리 금융 시스템의 근본문제는 (1)금융기관의 자주성 상실, (2) 책임경영체제의 부재, (3) 정부감독의 부실의 세 가지로 요약 될 수 있다.

자주성의 상실

무릇 금융의 사회적 기능은 경제 단위로부터 예금을 받아 들여 그것을 각 용도에 합리적으로 배분하여 경제 발전과 국민생활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금융은 독자적으로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해 왔다. 이것은 이른바 "관치 금융"의 구습에서 유래하는 것이라 하겠는데 1990년대 초이래 정부가 금융의 자율화를 추진해 온 지금에 있어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금융의 큰 부분이 기업집단과 밀착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유착 관계는 금융의 자원 배분과 위험 관리방식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예컨대 금융기관들은 재벌의 재무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하여 연결 재무제표를 요구해 본 일이 없다. 중복 투자라는 여론이 있어도 그 투자 사업의 경제적 타당성을 검토해 본 일이 없다. 대기업이 해외에서 그토록 많은 현지금융을 해도 그 상환 능력을 평가해 본 일이 없다. 차입금으로 본업과 관계없는 사업에 투자하거나 문어발 식으로 사업을 다각화해도 은행은 방관할 따름이었다. 재벌 총수의 말 한마디로 대형 투자가 결정되고, 정치권에 수 백억 원의 돈을 바쳐도 은행은 아무 말 없이 융자를 했다. 자금의 용도나 경제적 타당성은 아랑곳없이 다만 기업집단의 상호 지급보증을 받아 두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금융기관은 선진국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기형(畸形)이다. 한마디로 동원된 금융 자금의 합리적 배분이라는 금융 본래의 사명을 완전히 포기하고 만 것이다.

책임경영 체제의 부재

주식회사에는 주주가 있고 그를 대표하는 이사회가 있어서 회사의 경영방침을 결정하고, 집행부의 경영을 평가하고, 감사를 통하여 재무상태를 검증하는 책임을 진다. 그런데 우리 금융기관이나 기업에는 이사회의 기능이 죽어 있다. 이사회와 관계없이 정부나 재벌 총수의 말 한마디로 기업의 의사가 결정되고 그들은 결과에 대하여 아무런 법적 책임도 지지 않는다. 금융기관에는 부장 위에 이사가 있는데 주주를 대표하는 이사와 혼동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집행부의 부행장(vice president)에 해당하는 것이고, 주주를 대표하는 이사는 따로 있어야 한다. 이사회의 기능이 유명무실하다면 책임경영은 바랄 수 없다. 즉 방만 경영과 위험관리의 소홀로 부실채권과 손실이 누적되고 재무상태의 투명성이 없어도 그를 시정하는 내부 장치가 없고 책임을 지는 사람도 없다.

감독의 부실

금융이 이렇게 된 데에는 관치 금융 탓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관치 금융 하에서도 은행에 대한 엄정한 감독 기능이 있고 기업집단을 다스리는 적절한 정책이 시행되어 왔다면 금융이 지금처럼 타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찍이 박정희 정권 시대에는 재벌의 부실경영과 금융의 부실채권을 문제시하여 각종 시정조치를 취하였고 청와대 내에 부실기업 정리반을 운영한 일도 있다. 이러한 시정조치의 대표적인 예가 1974년 대통령 특별 지시에 따른 이른바 5.29 조치인데 그 내용은 현재 IMF가 정부에게 요구하고 있는 시정 조치와 매우 흡사하다.4) 그러나 이러한 획기적인 시정조치는 일관적으로 시행되지 못했고 박 정권 이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 주요 이유는 재계의 거센 반발이 있는 동시에 경제 사정이나 정치적 분위기가 달라지면 정부는 기본 정책의 당위성을 잃어버리거나 포기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 기능도 크게 해이되었다. 은행, 보험, 증권 분야의3대 감독원이 있으나 위에서 예시한 문제들을 거론하거나 사전적 시정 조치를 취한 예가 거의 없었고, 종금사는 재경원이 직접 감독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몇몇 공무원으로는 30여개의 종금사의 실태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리고 감독기관이 항상 정치적 영향하에 있었으니 엄정한 감독을 하려고 해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부실 금융의 경제적 효과

금융의 구조적 결함은 우리 경제에 여러 가지 부정적 영향을 끼쳐 왔다. 기업집단으로의 대출 편중, 기업집단의 과다차입과 방만 투자, 문어발식 다각경영, 중소기업 및 중소기업형 산업의 위축, 재무구조 악화와 부실기업의 만연 등인데 그것들은 모두 금융기관의 방대한 부실채권 누적으로 귀결되었다. 재경부 발표에 의하면 금융기관의 협의의 부실채권은 금년 3월 말 현재로 68조원 (작년 GDP의 16%)에 달하였고, 광의의 부실채권 (3개월 이상 6개월 미만 연체여신으로서 담보가 있는 여신 등을 포함)은 118조원 (작년 GDP의 28%)에 달한다 한다. 그리고 앞으로 협의의 부실채권은 100조원에 이를 것이라 한다.

한가지 부언할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고금리가 항상 문제되어 왔는데 그 원인 중의 하나는 부실기업과 부실채권이 많기 때문이다. 대기업 혹은 특종 업체의 부실 상태가 끝없이 지속되기 때문에 그 연명에 필요한 자금수요가 막대하다. 그것은 결국 건전 기업에 갈 자금의 몫을 잠식할 뿐 아니라 금리 수준을 구조적으로 높게 만든다. 금융기관의 방만 경영과 부실채권 손실은 궁극적으로 대출금리에 전가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 금융부문 개혁의 기본과제

금융개혁 관련법의 문제점

우리 금융의 근본문제가 이러한즉 금융개혁에 초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는 자명하다. 즉 그것은 금융의 자주성과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하고 금융감독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년말 국회에서 통과된 13개의 법률 개정안의 내용을 보면 그것만으로 우리 금융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강화되고 통합 금융감독원의 설립을 보게 된 것은 그런대로 큰 개선이라 하겠는데 그 내용을 보면 문제의 핵심을 피했다는 느낌을 준다.

예컨대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강화한다 했지만, 외환 관리법에 의하여 외환과 환율은 여전히 재경부 소관으로 남아 있다. 금리와 환율을 연계적으로 운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데 한국은행의 금리정책과 정부의 환율 정책을 양립시키는 것은 시대 착오적이라 할 수 있다. 그밖에 타성과 고정 관념에 사로 잡혀 개혁이 미진한 점이 적지 않다.

금융의 소유구조를 어떻게 할 것인지도 분명치 않다. 정부는 국내 재벌의 은행 주식 보유한도 (4%)를 계속 유지하되 외국인과의 합작일 경우에는 1개 은행에 한하여 외국인 지분과 동일한 만큼의 지분을 가질수 있게 하고 감독 당국의 승인을 받도록 하고 있다. 당국자가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데 그렇게 복잡한 세부적 규제보다는 외국인, 내국인 할것 없이 가급적 산업자본과 금융업을 분리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 가야 한다. 국내 기업집단의 경우에는 종래와는 달리 연결 재무제표상의 자본-부채 비율을 따져 그것이 불량하면 재벌이건 아니건 직접 간접으로 지배적 주주가 될 수 없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이 원칙은 종금사와 같은 제2금융권 금융기관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끝으로 행정 당국의 허가 사항의 재량 범위를 최소화하여 행정의 투명성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

금융감독에 관하여도 재고할 점이 있다. 앞으로 금융기관이 잘못하면, 사전시정조치, 영업정지, 폐쇄 등의 조치를 가차없이 취해야 되는데 그러자면 감독원이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감독원을 감사원과 같은 헌법 기관으로 만들던가 아니면 무자본 특수법인으로 입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필자는 주장해 왔다. 그런데 새로이 제정된 [금융감독기구의 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금융감독원 자체는 무자본 특수법인으로 되어 있으나 금융감독위원회는 국무총리 소속으로 2원화 되어 있다. 사견으로는 금융감독위원회를 금융감독원 내부에 두고 두 기관을 단일 무자본 특수법인으로 하는 것이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한다는 견지에서 합당하지 않았나 한다.

한편 감독기구가 부실 금융기관의 폐쇄를 건의하면 재경부 장관은 공청을 거쳐 그 가부를 결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고서야 어떻게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서 엄정한 감독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차라리 폐쇄 요건을 법으로 명시하고 그에 해당되면 특별한 사유(전쟁, 금융공황 등)가 없는 한 즉각 폐쇄해야 금융의 기강이 설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문화적 구습 때문에 권력층 내지 공직자의 사적 청탁으로 금융 경영진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 비추어 금융감독원법에 정부의 인사 간섭을 법적으로 배제하고 공직자의 융자에 관한 간섭이나 사적 청탁을 처벌하는 규정을 둘 필요가 있다. 우리의 실정으로 보아 이러한 규정 없이 금융의 독립은 기대하기 어렵다.

주주이사회의 활성화

한편 금융기관의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하자면 주주이사회의 기능을 활성화해야 한다. 경영의 궁극적인 책임을 주주이사회가 지도록 하고 엄정한 감사기능을 위하여 재무제표의 투명성과 공인 회계사의 공신력을 높이는 제도개선이 병행되어야 한다. 정부가 사외 이사회의 영입을 제도화하고 소액 주주들의 누적 투표제도를 도입한 것은 이사회의 기능 활성화를 위한 것인데 앞으로는 주주가 경영책임 (유한 책임이지만)을 지는 실례를 보여주어야 이사회의 태도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금융계의 각성

무엇보다도 금융기관 자신이 이 기회에 철저한 자기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담보 위주의 금융방식에서 탈피하여 신용조사, 대출심사 능력을 강화해야 하고 비수익 점포를 정리하고 잉여 인원을 감축하는 등 국제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한 경영혁신을 이룩해야 한다. 그리고 금융 본래의 기능과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모든 부당한 외부 간섭을 거부하고 자주성을 견지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이 기회에 구제하기 어려운 부실 금융기관은 퇴출 혹은 합병이 불가피하다.

부실채권 정리와 자본 증자

금융개혁의 당면 과제는 부실채권을 조속히 정리하고 금융기관의 자본비율을 충실화하여 국제금융시장이 신뢰하는 건전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금융기관이 이 두 가지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지 못하면 지금과 같은 대출기피와 자금 경색이 계속되어 기업의 흑자 도산이 속출하고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이 더욱 늘어나는 악순환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정부 통계에 의하면5) 작년 12월부터 금년 4월말까지 상업어음 대출은 매달 감소를 계속하여 누계로 약6조원이 감소하였고 신탁 대출 및 보험대출도 금년 1/4분기에 약3조원이 감소하였으니 기업의 자금난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한 자금난에 고금리가 겹쳐서 동기간에 16,425개의 기업이 부도를 냈다. 물론 이 기회에 어차피 도태되어야 할 한계 기업들이 정리된 것도 사실이지만 이른바 "흑자 도산"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런데 부실채권을 정리하려면 담보물 혹은 기업을 팔아 넘겨야 하는데 이 시기에 그것들을 사려는 투자자가 거의 없다. 둘째로 부실채권을 정리하고 나면 금융기관에는 엄청난 매각손이 발생하고 그로 인하여 자본을 대부분 까먹게 된다. 금융기관이 건전성을 유지하자면 자본증자가 필수적인데 증권 시세가 바닥을 헤매는 이 시기에 은행 주식을 사려는 사람이 많지 않다. 외국은행에게 은행을 팔아 넘기려 해도 지금의 부실상태를 그대로 두고서는 찾아오는 외국은행이 많지 않을 것이다. 결국 가급적 원매자 혹은 출자자를 구하되 안 팔리는 부실채권과 주식을 일시적으로라도 정부가 사 주지 않으면 금융의 구조조정 작업의 매듭을 지을 수 없는 실정이다.

외국에서도 금융파탄이 발생하면 어쩔 수 없이 민간 금융에 정부자금을 투입하는 것이 상례였다. 미국도 그러했고, 멕시코도 그러했고 최근에 일본도 금융 구조개혁을 위하여 추가적으로 30조엔(약300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한다고 한다. 결국 재정자금으로 (1)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은 매수하고, (2) 그로 인한 자본 잠식을 보충하기 위하여 증자지원을 하고, (3) 파산은행의 예금을 대불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보다 큰 불행을 막기 위하여 국민들은 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5월 20일 정부는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을 촉진할 목적으로 이미 국회의 발행 동의를 얻은 14조원에 추가하여 약50조원의 채권 발행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부실채권매입에 25조원, 증자지원에 16조원 퇴출은행 예금대불에 9조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계획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먼저 25조원의 부실채권은 금융기관이 자체적으로 매각 정리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또 금융기관 자력에 의한 증자를 20조원 정도로 보고 있는데 이것 또한 가능할지 의문이다. 참고로 이 증자액수는 현 상장주식 평가액의 20-26%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한편 재벌기업의 자본 부채비율을 200%까지 낮추자면 약40조원의 증자가 필요한데 은행과 기업부문의 증자소요를 합쳐 60조원의 증자를 실현하자면 현 상장 주식 평가액의 60-80%에 해당하는 주식발행이 증권 시장에서 소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자본 증가에는 유상증자, 후 순위 채권 발행, 외국인에 대한 지분 매각 등의 방법이 있는데 외국인 투자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한다 하더라도 정부가 기약한 대로 1-2년 내에 상기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한 반면 부실채권을 말끔히 정리하지 못하고, 자본 충실화가 늦어지면 지금과 같은 금융기관의 불안정과 자금경색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재정 부담이 커지는 한이 있더라도 차제에 발본적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은 해결에 난관이 있다고 하여 고식적 혹은 호도(糊塗)적인 대책을 세울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 하나 하나에 대하여 끊고 맺고 끝장을 보는 결단이 필요하지 않은가 한다.

부실금융기관의 처리

부실 금융기관을 어떻게 정리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정부의 기본 방침은 부실 금융기관은 합병 또는 퇴출시키고 살아 남는 은행들에 대하여는 부실채권 정리와 자본 증자를 지원한다는 것인데 아직 구체적 프로그램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 몇 가지 생각나는 점을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금융과 산업사이의 유착관계가 지금의 사태를 초래한 구조적 결함이었던 만큼 산업자본과 금융 분리의 원칙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 대기업이 금융업을 겸영할 수 있게 한다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것은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무시한 견해라 할 것이다. 겸영(兼營)을 시키더라도 동일인 대출 한도를 엄격히 규제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데 과거에 그러한 규제가 없어서 금융과의 유착이 이루어 졌던 것은 아니다. 은행에 주인이 없어서 은행이 잘못 되었으니 재벌에게라도 은행을 맡기는 것이 옳지 않으냐 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재벌소유의 종금사들이 망한 것은 주인이 없어서 였나? 미국,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시장원리를 중시하는 나라에서는 산업과 금융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공통적 현상이다.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는 실질적으로 산업과 금융을 분리하기 어렵게 된다는 견해도 있으나 아직은 결론을 내릴 단계는 아니라 생각한다.

둘째로 금융의 현대화를 위해서는 외국 금융기관과의 합작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외국 투자가들은 먼저 부실은행의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노조와 노동법을 걸림돌로 여기고 있다. 필자가 만난 미국 은행연합회 회장의 말로는 미국에는 노조가 있는 은행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어떻게 "화이트 컬러"들이 노조를 결성하게 되었느냐고 씨는 오히려 반문하면서 노조만이 종업원의 복지를 보장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하여튼 이점은 금융계와 정부가 함께 해결할 문제이다.

셋째로 은행을 서로 합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냐 하는 것이다. 하기야 차제에 부실한 군소은행은 합쳐야 한다. 그러나 큰 은행을 합치면 과도적 혼란이 심할 것이고 한국의 문화적 토양에서는 합병 후에 파벌적 내분이 계속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차라리 외국은행과 내국인이 합작하는 지주회사를 세우고 그 산하에 부실은행을 흡수한 다음 제각기 거듭나게 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예컨대 지주회사가 각 은행의 새로운 경영진(외국인 포함)을 지휘감독하고, 점포정리, 인원정리 등은 지주회사가 조정하여 통괄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복수 은행이 하나가 되지 않더라도 보다 평온하고 간편하게 각자가 재생의 길을 걷게 되지 않을까 한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김 우중 회장이 내외 합작의 선도은행 설립의 개념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을 여기에서 말하는 지주회사의 개념으로 발전시킴이 어떨까 한다. 재벌들이 외국은행과 공동으로 출자를 하되 재벌들은 경영권을 갖지 않고 후일에 주식을 판다니까 그렇다면 재벌이 은행소유를 목적하는 것은 아닌것 같다. 재벌이 무슨 돈이 있어서 거액의 출자를 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만약 그것이 어려우면 우선 정부나 한국은행이 출자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합병에 따르는 번잡과 엄청난 혼란을 생각한다면 위의 방식이 훨씬 손쉽고 조속한 시일 내에 금융을 정상화하는 지름길이 되지 않을까 한다.

4. 기업부문 개혁의 기본과제

기업집단의 문제점

금융기관의 부실경영과 기업의 부실경영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니 기업 경영의 혁신 없이 금융의 정상화를 바랄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 기업집단은 그동안 이 나라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구태 의연한 경영 방식에 대하여 내외로부터 피판을 받아 왔다. 이미 위에서 금융면에 반영된 문제점들을 예시하였거니와 그 밖에도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지적되어 왔다.

  • 자본금에 대하여 차입금이 너무나 많다.
  • 분식결산이 유행하고 재무제표를 믿을 수 없다.
  • 이윤보다 외형(총매출액)과 위세 확장에 중점을 둔다.
  • 총수를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의사결정 체제하에서 임직원의 창발력과 자율에 의한 효율적 경영이 저해되고 있다.
  • 재벌 총수는 의사결정을 독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 투자의 경제적 타당성 검증보다는 재벌 총수의 개인적 판단이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
  • 정치 사회적 영향력을 추구하여 손익을 무시하고 본업과 관계없는 사업을 확산한다.
  • 일부 부실기업의 손실을 다른 사업의 이윤으로 보전(補塡)하기 위하여 사업을 무원칙하게 다각화한다. 따라서 집단 내에는 언제나 부실기업이 존재한다.
  • 정치권에 秘자금을 공급하여 정치적, 사회적 물의(物議)를 일으킨다.

재벌에 대한 시정조치

지금까지 알려진 재벌 대책으로는 상호지급보증의 금지, 연결재무재표의 공개 및 외부감사의 의무화, 집단내 부실기업의 정리 등이 있다. 그러나 정부는 재벌의 자발적 구조조정이 가시화 되지 않고 있다고 불평이고 재벌은 정부가 무리한 계획을 밀어 붙이려 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단 금융정상화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엄정한 금융감독 기능이 일상화한다면 위에서 말한 조치만으로도 재벌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금융의 기강 확립과 엄정한 금융감독이 기업 구조조정의 전제조건이 된다. 만약 금융이 정상화된다면 앞으로는

  • 기업의 업적은 외형이나 사회적 위세가 아니라 이윤이라는 단일 지표로 평가될 것이고 기업의 건전성은 자본-부채비율로 평가될 것이다.
  • 기업집단의 경우에는 결합재무제표상의 순 이윤과 통합 자본-부채비율이 경영평가의 기초가 될 것이다.
  • 재무제표는 공신력 있는 공인 회계사의 외부 감사를 받게 되고 그것이 금융기관의 융자 결정의 기초 자료가 될 것이다.
  • 경영과 재무 상태의 투명성이 없으면 국내외에서 융자받기가 어렵게 될 것이다.
  • 상호지급보증을 법적으로 금지한 이상 재벌이 부실기업을 무작정 끌고 갈 수도 없을 것이다. 집단내의 부실기업은 금융기관에서 부실채권으로 분류되어 융자의 제한을 받거나 성업공사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 은행은 연결 재무제표를 보고 통합 자본-부채 비율이 너무 낮으면 본업과 관련이 적은 기업을 정리할 것을 요구할 것이고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대출을 중단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시장경제 원리에 따른 은행의 당연한 권한 행사이고 정부의 간섭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 결과적으로 집단 내에는 주력기업과 관련이 있는 계열 기업들만이 남게 되고 문어발식 경영에 제동이 걸릴 것이다.
  • 재벌 기업 안에는 주주를 대표하는 이사회와 경영진을 대표하는 임원회가 확연히 구분되고 그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할 것이다. 주주도 아닌 임원들이 재무 부서에 도장을 맡겨 두고 금융기관으로부터 융자를 받을 때마다 보증을 서게 되는 관행도 없어질 것이다.

부실기업 정리의 모델

지금 정부는 재벌에 대하여 부실기업을 빨리 정리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재벌이 일부자산이나 기업을 매각하려 해도 국내에서는 살만한 기업이나 투자가가 없고, 외국인에게 팔려고 해도 그 교섭에 적지 않은 시일이 걸린다는 것은 사실이다. 기업을 팔자니 사는 사람이 없고 가지고 있자니 금융기관과 정부로 부터 냉대를 받고 사회의 지탄까지 받게 되니 당혹하고 있는 기업주나 재벌이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도덕적 해이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하여 부실기업주의 책임을 묻고 기업 회생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 먼저 금융계, 정부, 세계은행 또는 외국 금융기관이 출자하는 가칭 "기업갱생공사"라는 지주회사를 설립한다. 성업공사를 확대 개편할 수도 있다.
  • 금융기관은 미리 정한 기준에 따라 구제 불능이라고 판단되는 기업에 대하여는 대출을 중단하고 그 기업은 청산절차로 들어간다. 기업 해체에 따르는 심한 고통이 따르지만 별 수가 없다. 단호히 끊을 것은 끊어야 한다.
  • 금융기관이 회생이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기업은 기업주가 기업을 자체 처분하던가 아니면 갱생공사에게 매도토록 종용한다. 금융기관은 어차피 대출을 계속할 수 없을 것이니 기업주는 기업 매도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을 것이다.
  • 갱생공사와 부실기업은 부실기업의 자산 부채를 투명화하고 그를 시가로 평가하여 매매가격을 결정한다. 만약 순 부채가 자본금과 동일하면 감자조치를 취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무상매매도 있을 수 있다. (순 부채가 자본금을 크게 초과하면 (2)항에 해당한다.)
  • 갱생공사는 지주회사로서 매입한 부실기업의 경영자를 선임하여 구조개선을 추진하도록 한다. 종래의 경영진은 기업 부실화의 책임을 지고 모두 물러난다. 다만 예외는 있을 수 있다.
  • 채권 금융기관은 인수기업에 대한 채권의 일부 혹은 전부를 출자로 전환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구조조정의 실적을 감안하여 협조융자도 할 수 있다. 주식 소유 비율에 불구하고 금융기관은 갱생공사와 의사결정권을 공유한다.
  • 부실기업의 새로운 경영진은 보다 안정된 재무상태 하에서 기업경영을 개선하고 (대외합작 포함) 경영이 정상화되면 금융기관은 증권시장에서 주식을 매각하여 채권을 회수한다. 그리고 새로운 자본주와 경영주체가 기업을 인수 경영하게 된다.

이 모델을 적용하면 도덕적 해이의 문제를 회피하고 기업을 살릴 수 있다. 최근에 은행들이 동아건설에 협조 융자를 한 것에 대하여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만약 위의 모델에 따른다면 동아건설집단중의 부실기업을 기업갱생공사에 팔아 넘기고, 금융기관이 채권일부를 출자로 전환하여 공사가 경영권을 장악한 다음 주주와 경영주와 경영진을 교체하고 나서 협조융자를 했을 것이다. 그러면 도덕적 해이를 범한 무원칙한 조치라는 내외의 비판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매사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처리하지 못하면 구조조정에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델하에서는 재벌이건 아니건 금융기관이 부실기업으로 판정하면 그 등급에 따라 청산 절차를 밟거나 아니면 기업 갱생공사에 매도되어 채권은행 또는 갱생공사가 대주주가 될 것이니 그 기업은 이미 재벌의 손을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재벌의 무성의 혹은 부작위(不作爲)를 시비할 필요가 없다. 그 후 부실기업이 정상화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것은 이미 재벌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수술할 환자를 수술하지 않기 때문에 병세를 놓고 말이 많은 것이지 수술을 하고 나면 사람들은 회복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기업갱생공사에 외국기관의 참여를 바라는 이유는 정치적 영향을 배제하고 공정하고 엄격한 업무처리를 위해서이다. 앞으로 부실기업 정리에 정치 적 영향이나 비리가 개입한다면 기업 구조조정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금. 기. 감의 3각 관계

만약 지금의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금융기관, 기업, 감독기관 사이의 3각 관계가 어떻게 달라질까? 하나의 이상형(理想형)을 그려본다. 가령 어떤 기업이 정당한 사유 없이 대출금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한다 하자. 은행은 지체없이 부도처리 할 것이다. 최근에 정부가 도입한 부도유예나 상법상의 화의 같은 미봉책은 사라져야 한다. 그것은 금융의 기강을 문란케 하고 사태수습을 지연시키는 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령 금융기관이 어떠한 외부의 간섭이나 압력 때문에 이 기업에게 융자를 계속 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은행의 BIS의 자본 비율(건정성 기준)이 악화한다. (자본비율의 분모가 되는 대출금은 위험도에 따라 분류되고 연체기업에 대한 대출은 가중치가 크기 때문에 분모 전체의 값을 크게 만들어 자본 비율을 낮게 만든다.) 은행은 틀림없이 금융감독원으로 부터 지적을 받게 될 것이다. 감독원은 누구의 압력으로 은행이 그러한 융자 결정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따질 필요도 없다. 다만 재무제표에 나타난 결함을 지적하면 되는 것이다. 금융기관은 자본금을 늘리던가 아니면 다른 위험 자산을 감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만약 금융기관이 시정 지시를 이행하지 않거나 사실을 은폐하고 BIS기준을 조작한 것이 드러나면 감독원은 영업정지와 같은 준엄한 제재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해당 은행에 예금자가 몰려오고 예금 뢰취 현상이 일어난다. 정부는 예금자보험법에 따라 일정금액 이하의 소액 예금자는 보호하지만 나머지는 보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정부의 자금 부담도 문제려니와 그래야 거액 예금자가 항상 거래은행을 감시하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거액 예금자는 거래은행의 건정성에 의심이 가면 언제라도 예금을 다른 금융기관으로 옮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은행은 존립이 위태롭게 되고 당해 금융기관의 이사회는 경영진에 대하여 부실 대출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한 금융기관의 경영진은 외부 압력 때문에 부실 대출을 하기 어렵게 되고, 항상 융자에 조심, 또 조심을 하고 자본 충실화와 지불 준비에 만전을 기하게 될 것이다. 참고로 홍콩의 은행들은 예금 유치 전략으로 "언제든지 예금을 내 드리는 은행" 이라는 역선전을 한다고 한다. 자기 은행의 안정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상은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금융체제의 모델인데 이러한 모델하에서는 은행 감독을 위해 복잡한 규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몇 가지 경영지표를 감시하고 결함이 보이면 가차없이 조치를 취하면 된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1982-1992동안 1429개의 크고 작은 은행들이 감독기관으로 부터 영업허가 취소 처분을 받은 바 있다.

이점에 관련하여 미국의 저명한 금융학자 Kaufmann교수는 흥미있는 보고를 하고 있다.6) 즉 미국에서는 감독 규제가 많았던 때에 오히려 은행 파탄 건수가 많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예금자들은 정부가 규제와 감시를 하고 있으니 별일 없을 것이라고 방심하는 동시에 은행들은 정부가 하라는 대로했으니 별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구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와 같은 감독원리를 철저히 실행에 옮긴 것이 1996년의 뉴질랜드의 금융개혁이다. 뉴질랜드는 중앙은행의 은행감사제도 자체를 폐지하고 그대신 3개월마다 은행 재무상태를 공시케 하고 그 문서에는 사실과 다름이 없음을 보장한다는 은행장의 서약과 서명을 하게 했다. 만약 허위 사실이 발견되면 은행장은 법적 처벌을 받게 된다.

이상은 금융기관 감독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 주는 것인데 그것이 실현되려면 금융의 자주성과 금융감독원의 정치적 중립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건만 충족된다면 부실기업과 재벌 문제도 대부분 해결 될 수 있는 것이다.

5. IMF체제의 문제점

위에서 한국의 금융파탄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개관하였는데 그러고 보니 IMF에 대하여도 할 말이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IMF는 동남아 국가들과 한국의 경험을 거울 삼아 앞으로 금융위기를 예방하기 위하여, 그리고 일단 어느 나라에 금융위기가 발생하면 그를 신속히 수습하기 위하여 어떻게 개입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지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 같다.

한국적 위기의 정체

먼저 한국외환 위기의 정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부터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한국의 외환위기에는 구조적 요인이 깔려 있으나 직접적 요인은 단기자본의 과다 차입으로 인한 유동성 부족에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구조적 요인으로 말한다면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종류와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구조적 문제를 지니고 있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다. 따라서 구조조정은 항시적인 정책 과제이다. 우리의 경우에도 구조조정의 필요성과 방향에 관해 광범한 인식과 합의가 형성되어 있었고 정부의 시책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외환 위기 발생이전에 이미 13개의 금융개혁 법안이 국회에 나가 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 다만 필요한 구조조정이 기득권자들의 저항과 위정자들의 무능으로 신속히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한국의 실무경제면의 거시적 기본지표(fundamentals)가 나쁘지 않고 다만 유동성 부족이 문제라면 유동성을 주입하는 것이 가장 긴요한 응급 대책이 된다. 만약 IMF 개입 직후 한국 정부가 약300-500억불 정도의 긴급자금을 조달하여 임의로 사용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위기의 양상이 크게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즉 환율과 금리를 그토록 폭등시켜 기업 도산, 부실채권을 양산할 필요도 적었을 것이고 그로 인하여 구조조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IMF는 다른 방법으로 한국정부에 대하여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압력을 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IMF와 약정한 사항을 이행하지 않으면 구제금융 금리를 상향조정한다던가 그밖에 다른 방법도 있을 것이다.

IMF 자금력의 한계

그러나 한국은 그러한 자금을 일시에 조달할 수 없었다. IMF는 한국을 위하여 580억불의 구조금융을 주선했지만 자기자금 210억 불을 제외한 나머지는 몇몇 국제금융기관과 G7국가들로 부터 긁어모아야 했다.7) 그리고 그것은 무조건 내주는 것이 아니라 공여자의 사정에 따라, 그리고 한국 정부가 IMF와 협정한 사항을 이행하는 속도에 따라 단계적으로 내주는 자금이었다.

IMF는 어떠한 경우에도 금융위기에 처한 나라의 자금소요를 모두 충족할 수는 없는 것이고 구제금융은 다만 민간 자본의 환류를 유인하는 보조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IMF가 제공하는 구조금융의 크기와 지원속도에 따라 민간자본 유치의 긴급도가 달라지고 따라서 그를 위한 환율 및 금리정책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IMF는 자신의 구제금융 규모와 지원 속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민간 자본을 한국으로 환류(環流) 시키는 것이 최대의 급선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IMF는 개입 즉시로 환율을 완전 유동화 하는 동시에 한국은행의 환매채 금리를 일시에 40%선까지 치켜올려 초고금리시대를 불러 왔다.

사실상 IMF의 가용자금은 지금의 국제금융의 규모에 비하여 너무나 적다. 지금 세계화된 국제금융시장에서는 매일 1조 달러 이상의 단기 투기자본이 거래된다고 한다. 국제통화시스템의 안정성을 위하여 이러한 국제 단기자본 이동을 감시하고 규제하는 것은 국제통화체제를 관리하는 IMF의 기능이 아닐 수 없다. 아마 앞으로도 아시아 제국에서 발생한 금융위기가 다른 나라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런데 지금의 IMF는 자본이동을 감시하는 장치와 조기경보체제를 가추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위기발생시에 신속히 대처할 만한 유동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IMF가 쓸 수 있는 주요무기는 고환율, 고금리 정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IMF체제의 문제점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IMF가 1997년 9월에 900억 달라 상당의 회원국 출자 쿼터를 늘리기로 한 것은 당연한 조치라 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회는 미국 출연분(180억 달러)을 아직 승인하지 않고 있다.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 이유는 IMF 긴급구조는 회원국의 도의적 해이를 수반하여 시장 원리에 반하고, 자국 납세자들의 부담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금융 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싫건 좋건 IMF가 세계 중앙은행의 기능을 닮아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무시한 의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금리정책의 허실

IMF가 파격적 고금리정책을 고집하는 이유는 널리 알려져 있다. 즉 한국 자력에 의한 외자 조달을 극대화하자면 먼저 환율을 높게 하여 국내 외환 시장에서 외환 공급 증가를 유도하는 동시에 금리를 파격적으로 높게 하여 금리차를 노리는 외국자본의 유입을 유도하는 한편 국내에서 외환 보유의 금리비용을 높게 함으로서 외환 매각을 촉진하는 동시에 국내저축을 늘려 재정안정에 기여케 하자는 것이다.

물론 IMF의 분석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초기에 고금리가 외환 공급증가를 유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금리가 파격적으로 높다 하더라도 이 때에는 금리보다 위험을 중시하는 것이 투자가들의 심리이다. 외환위기 발생 이전에도 한국의 금리는 이미 국제금리 보다 2배나 높았고 그것을 3배로 높인다 하여 외국 투자가들의 불안심리를 극복하기 어려운 반면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일대 혼란과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러한 위기 상황은 외국 투자가들을 더욱 불안케 하고 고금리의 이점을 도외시하게 만든다. 이 때에는 충분한 유동성을 확보하여 외국 투자가들이 언제라도 원하면 자금을 회수해 갈 수 있다고 믿게 하는 외에는 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IMF의 긴급구조가 필요한데 IMF는 그에 대응하기에 충분한 유동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물론 우리는 고금리의 긍정적 효과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역효과도 경시할 수는 없다. 년율 20-30%의 금리를 부담하면서 살아 남을 기업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기자본 비율이 낮은 개도국의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외채를 지고 있는 다수 기업들은 원리금의 환차손과 금리부담이 2중으로 몰아 닥치니 제아무리 건실한 기업이라 할지라도 일시에 부실 기업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고금리 정책은 단기에 그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 부도가 속출하고, 부실채권이 증가하여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이 매우 어렵게 된다.

한편 고금리가 저축증가에 기여한다 하지만 그 실 은행들의 금리경쟁은 기존 예금의 금리인상과 예금의 구좌이동을 유발할 뿐 저축증대에 기여하였는지는 의문이다. 참고로 금융기관 총예금은 1997년 말의 198조원에서 금년 3얼말 에는 195조원으로 줄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고금리정책은 사회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민노총(民勞總)이 지난 5월말 파업을 감행했는데 그것은 매우 유감된 일이지만 그들 주장에 일리 있는 대목이 있다. 즉 그들은 IMF한파 속에서 가진 자들은 고금리의 혜택으로 오히려 더 잘 살게 되고, 임금 삭감, 정리해고 등으로 노동자에게만 구조조정 부담이 강요되고 있다고 외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는 할 말이 없다.

BIS 기준 8%

고금리 외에 또 한가지 문제의 숫자가 있다.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의 중심과제는 BIS의 자본-여신 비율 [감독 규정상으로는 위험가중자산대비 자기자본 비율] 8%를 충족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금융기관이 대출을 기피하고 부실기업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은 위에서 본 바와 같다. 뿐만 아니라 중요 고객의 위험자산은 줄이지 않고 다만 총자산 규모를 축소함으로서 명목상으로 자본 비율을 높이려 하기 때문에 무고한 중소기업이 희생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하여는 감독당국의 적절한 대비책이 필요하지만 무리하게 8% 기준을 강요하면 재무제표 분식(扮飾)의 유혹은 더욱 커진다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원래 BIS 자본 비율은 1988년 G12 중앙은행 총재회의에서 합의된 일종의 정치적 숫자이고 거기에 어떠한 절대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BIS 기준 충족의 시한을 짧게 하여 금융기관, 기업 그리고 정부의 재정부담을 너무 크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한다. 1980년대의 미국의 금융개혁의 경험을 보더라도 은행의 자기자본 비율이 1990년의 6.4%에서 1995년의8.0%에 이르는 데에 5년의 세월이 경과하였다는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8)

결론적으로 IMF는 융자조건의 이행을 보장하고 도의적 해이를 방지하는 방법을 선택하되 긴급구조 자금의 규모와 집행 속도를 높이는 동시에 거시정책과 구조조정 정책간의 조화를 도모하는 방향으로 개입방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IMF의 당면 과제

금년 4월에 개최된 IMF 잠정위원회 (Interim Committee of the IMF)에서는 아시아 금융위기에 자극되어 집행부가 제출한 여러 가지 업무개선 방안을 채택하였다. 예컨대 1995년 멕시코 외환위기 후에 개발한 "자료공개특별기준" (Special Data Dissemination Standard)을 보완하여 단기자본의 이동 추적과 조기경보체제를 만들겠다고 한다. IMF 집행부의 의견은 국제수지상의 경상계정을 다루는 것이 WTO라면 자본계정을 다루는 것은 IMF의 기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IMF의 유동성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금년 1월 총회에서 의결된 자본 증자와 New Arrangements to Borrow의 집행을 촉구하기도 했다.

한편 "금융 투명성 및 건전관행에 관한 장전(章典)" - Code of Good Practices on Fiscal Transparency-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투명성은 채무자에게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채권자에게도 똑같이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기 투기자본의 이동에는 각종 불건전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IMF가 개도국의 자본자유화에 있어서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자본 자유화에 앞서 먼저 국내 금융시장을 자율화하고 국제 금융시장과의 거래 경험을 쌓고 현대 금융기법에 친숙해지고 국내금리와 국제금리의 격차를 줄이는 단계가 필요하다는 것은 한국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명백한데 이점을 무시하고 국내 구조조정을 게을리한 한국이나 조급하게 자본 자유화를 요구한 선진국은 다같이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아직 IMF 잠정위원회에서 언급되지 않은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변동환율제의 맹점에 관한 것이다. 원래 변동환율제는 회원국의 경상수지를 조절하는 시장 메커니즘을 상정한 것이었다. 즉 일국의 경상수지가 악화하면 외환 수요 증가 환율(달러의 원화가격)상승 수출증가, 수입 감소, 경상수지 균형화라는 자동적 조절기능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금융시장에서는 환율은 각국 경상수지의 변동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금리차를 노리는 단기자본 이동을 반영하는 면이 훨씬 더 우세하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 1990년 이후 국제경상 수지의 만성적 적자에 불구하고 단기자본 유입 때문에 환율이 안정되는 왜곡 현상을 보였고 다른 나라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회원국간의 경상수지를 조절하는 메커니즘이 없어지거나 약화되어도 좋은 것인가? 이것이 지금 국제통화체제가 직면한 근본문제 인데 IMF는 아직 이에 대한 만족할 만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시대의 국제통화체제를 어떻게 재건해야 할 것인지 참으로 엄청난 문제가 해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6. 정부 개혁

지금 금융계 및 기업계가 지니고 있는 문제가 그들만의 책임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그들은 정부가 만들어 놓은 기업환경 속에서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다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금융, 기업의 구조개혁과 함께 정부 개혁이 있어야 한다. 그동안 정부는 행정개혁위원회를 설치하여 정부 조직을 개편하였고 규제완화 작업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결과에는 문제가 남아 있는것 같다.

정부조직 개편의 문제점

구조개혁에 성공하자면 먼저 능률적인 행정조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개편된 정부조직에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는것 같다.

한가지 예로 예산 기능이 청와대, 재경부, 예산청의 3중구조로 분화되었는데 이것은 앞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청와대 내에 공식 기구인 기획-예산위원회가 있어서 거기에서 예산 편성의 방침이 결정된다 하는데 동위원회 위원장은 국무위원이 아니므로 국회에 나가 질의에 답변하지 않거나 할 수도 없다. 따라서 재경부 장관이 위원회와 사전 협의를 거쳤다는 구실 하에 대신 답변해야 하는데 이것은 정치적으로 반론에 부디칠 소지가 있다.

사견으로는 예산기능은 재경부로 일원화하고 그대신 금융에 관한 업무는 대부분 한국은행으로 이양하는 것이 개혁 목적에 부합되는 개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하더라도 대통령은 얼마든지 재경부의 재정운용을 지휘할 수 있고 행정을 보다 간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예산 기능 3분화는 현 대통령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국회 심의과정에서 정치적 흥정의 결과로서 그렇게 된 것인데 이것은 정치권의 개혁의 비전이나 목적의식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개혁에는 주도세력과 주도기관을 필요로 한다. 개혁의 중심체가 있어야 각부처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여 유기적 개혁 프로그램을 편성할 수 있고 그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신속히 보완할 수가 있다. 그런데 지난번 정부조직 개편에 있어서는 각 부처 경제정책을 조정하는 메커니즘이 빠져 버렸거나 혹은 분명치 않은것 같다.9) 청와대, 기획예산위원회, 국무총리실의 국무조정위원회 등이 있는데 어느쪽이 조정업무를 맡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대통령이 정책조정위원회를 직접 주재하고 있는데 그것은 정책 결정을 신속화 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사전 검토가 충분치 않으면 독단 혹은 속단에 빠질 우려가 있다. 대통령이 단안을 내리기 전에 각 부처의 의견과 문제점을 조정, 정리해 주는 하부기관이 필요치 않은가 한다.

이점에 관련하여 재경원의 해체를 다시 한번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재경원을 해체한 것은 외환위기를 예방하지 못한 실책과 관련이 있는것 같은데 그러나 정작 잘못은 종전에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합친 데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두 부처를 합친 결과 재경원은 금융업무에 매몰되어 경제 전반의 동태를 파악하여 정책을 기획. 조정하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던 것이다.

어쨌든 개혁 업무를 통괄 조정하는 강력한 기능이 필요한데 그것은 현업 행정을 맡지 않고 국회에 나가 답변 할 수 있는 기관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각 부처 장관이 개혁 업무 중 자기 부처 소관 사항에 대하여 국회 질의에 답변하고 책임을 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경제 운용 전반에 관한 사항이나 정책 조정에 대한 책임은 개별 부서장에게 물을 수 없다. 내각책임제 하에서는 국무총리가 그 기능을 담당하는데 지금의 총리는 그러한 위치에 있지 않다. 실권없는 총리가 대통령의 방탄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 헌정의 전통인데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총리서리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하여튼 개혁추진의 중심체를 두지 않는 한 대통령의 리더십이 실효를 거두기는 힘들 것이다.

PMS

행정개혁에 관련하여 필자는 가칭 PMS (Policy Monitoring System)를 제안한 일이 있다. 즉 일체의 경제 법령과 규칙의 각 조문을 정책 목적별로 분류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컨대 공장 용지 매수에 관련된 각 부처의 규제사항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그것을 놓고 규제완화의 범위를 논할 수 있을 뿐더러 기업과 관계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PMS를 개발하면 우리나라 경제정책의 전모를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개혁의 내용과 범위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업을 하나 또는 복수의 연구소에 위임할 수 있을 것이나 각 부처가 법령, 시행령, 부령 규칙들을 변경하였을 때에는 반드시 그것을 연구소에 통보하는 것을 의무화해야 한다. 지금 경제단체와 정부 당국자들은 다같이 규제완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 실규제의 내용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것 같다.

뉴질랜드 개혁의 성공 사례

그 밖에 정부 개혁이 어떠한 것인가에 관하여 필자가 여러 말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1984년에 시작한 뉴질랜드의 개혁 경험을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가장 모범적인 경제개혁으로 알려진 뉴질랜드의 구조개혁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0)

  • 정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제외하고 모든 사업을 민영화한다는 원칙 하에 1987년 -1995년 사이에 21개의 국영기업 및 정부자산이 주로 외국자본에게 매각되었다. 단 소비자보호 등의 국가 목적을 위한 간섭의 여지를 남기기 위하여 정부가 민영화된 기업의 주식 1주를 (key share라 한다) 보유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영이 불가피한 기업에는 철저한 상업주의를 도입하였다.
  • 시장원리와 경쟁원리를 최대한 존중한다는 견지에서 환율, 금리결정을 시장에 일임하고 외환관리도 실질적으로 철폐하였다. 그리고 1987년에 제정된 [상업 법]에 의하여 규제의 요건을 명시하고 이에 해당되지 않는 규제는 모두 철폐하였다. 비근한 예로 택시업의 인허가도 철폐하였다.
  • 국내에 투자한 외국기업과 내국기업 사이의 차별을 철폐했다.
  • 중앙은행은 물가안정을 유일한 목표로 하고 정부와 물가 안정 목표를 계약하되 그를 위한 정책 수행에는 행정부가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
  • 기업 의욕을 자극한다는 견지에서 소득세의 최고 세율을 66%에서 33%로 인하하고 법인세의 최고세율도 48%에서 33%로 인하하였다.
  • 재정을 균형화 하기 위하여 상기 세율을 인하하는 동시에 물품-서비스세(GST)-- 일종의 부가가치세의 세율을 당초 10%에서 12.5%로 인상하여 세수의 증대를 도모하였다. 한편 국민 연금, 실업 보험금, 과부 보험금도 하향 조정하였다.
  •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한다는 방침하에, 고용계약법에 의하여 노동조건을 중앙에서 교섭, 결정하던 종래의 제도(산별노조)대신에 개별 회사 차원에서 결정될 수 있는 제도(기업노조)로 재편하였다. 생산 기여도에 따라 임금이 결정되고 인원 감축도 간단하며 파트타임 고용을 장려했다. 노조가입 근로자 수는 1991년의 70만 명에서 1995년에는 37만 명으로 감소하였고 노동조합수도 1989년의 168개에서 1993년에는 67개로 감소했다.
  • 농업을 비롯한 모든 산업에 대한 정부 보조와 특혜를 철폐했다.
  • 중앙 정부 관서를 38개로 통폐합하고 공무원 수를 88천명에서 34.5천명 (39%)으로 감축했다. 운수성의 경우는 4500명에서 60여명으로 감축했다. 해직 공무원에 대하여는 1년치의 봉급을 지급했다.
  • 사무차관은 장관과의 5개년 계약으로 정부 내 혹은 각계에서 공채 하기로 했다.
  • 공무원 연금 제도를 폐지하고 민간보험회사의 연금 상품을 사도록 했다.
  • 교육 제도를 개혁하여 공공학교의 운영권을 개별 학교에 이양했다.

이상과 같은 혁명적 개혁으로 뉴질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규제가 적은 나라로 변신하였고 그 결과 1980년대 종반부터 경영효율과 생산성 향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수출산업이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경기는 1992년 이후 회복으로 돌아서서 오늘까지 2-6%의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다. 재정은 1995년 이후 흑자기조로 돌아섰고 1996년에는 사상 최대 규모의 감세 조치를 단행하였다. 개혁 과정에서 실업률이 한때 12%까지 올라가서 큰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하였으나 95년에는 6%로 감소하였고 이것은 OECD내에서 4-5번째로 낮은 실업률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뉴질랜드 국민생활의 질이 크게 개선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개혁 이전에는 전화를 가설하자면 7주일이 걸렸는데 지금은 하루면 충분하고 우편 배달이 1주일에서 2일로 단축되었고 전화료, 항공료, 택시 요금도 인하되었다. 이제는 일요일에 상점을 닫아야 하는 규제도 없어져서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편익을 누리게 되었다.

물론 개혁의 고통도 적지 않았다. 대량 실업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고, 환율을 자유화하자 외국자본 유입으로 뉴질랜드 달라가 평가 절상됨에 따라 수출이 타격을 받고 1991년의 불황을 격화한 일도 있었다. 국민들의 불안감과 기득권세력의 반발 때문에 집권 정당이 의석을 크게 잃기도 했다.

그러나 주목할 일은 여당과 야당의 정권 교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개혁을 일관적으로 추진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먼저 개혁을 시작한 것은 1984년에 집권한 노동당인데 개혁 한파로 인기가 떨어져서 1990년 선거에서 국민당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는 노동당 정부의 개혁 정책을 계승하여 인기없는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갔다. 그러한 국민당도 1993년 11월 총선에서는 과반수보다 겨우 1석이 많은 신승을 거두게 되었으니 개혁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실감케 한다. 국민당 James Bolger 수상은 뉴질랜드 경제개혁에 언급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개혁에는 강한 저항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찬성할 때를 기다리다가는 그 기회를 놓치고 만다. 개혁에 성공한 것은 정부가 명확한 목표를 내걸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를 국민 앞에 명백히 제시하고 자신을 가지고 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이다."11)

실로 우리 지도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정치권은 여. 야를 초월하여 개혁에 동참한 뉴질랜드의 모범을 배워야 한다.

8. 결 론

이제 결론을 맺자. 우리는 아픔을 참고 이 기회에 전반적 경제개혁을 이룩해야 한다. 우리가 만약 이처럼 모진 시련을 겪으면서 개혁다운 개혁을 하지 못하면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 것이다. IMF주도의 금융개혁은 그런대로 획기적인 것이다. 그러나 개혁의 범위와 내용을 IMF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체적으로 필요한 개혁을 수행해야 한다. 개혁에 있어서 필자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개혁의 요건

  1. 금융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모든 경제개혁이 효과를 거두거나 지속할 수가 없다. 금융개혁은 금융의 자주성 회복, 책임경영체제의 확립, 엄정한 감독 기능을 3대 지주로 한다.
  2. 개혁은 시장 원리를 존중하고 활용해야 성공할 수 있다.
  3. 모든 개혁은 민주적 합법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직감적 사회정서에 좌우되어서는 아니 된다.
  4. 외국 기업의 진입을 무서워하지 말고 그들과 공생하고 경쟁할 각오를 해야 한다.
  5. 개혁과정에서 무고한 기업이 희생되지 않도록 안정망 (Safety Net)을 마련하는 것은 IMF와 정부의 책임이다.
  6. 21세기 한국의 미래를 개척하자면 동북아의 중심국가로서 주변 국가는 물론 세계 도처로 부터 성장요인을 끌어당기는 국내체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것은 자유롭고 공정하고 사업하기 좋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개혁의 목적이다.

제2의 도약을 위하여

우리는 비록 민주화 개방화 과정에서 넘어지고 말았으나 그러나 역사적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변화의 과도적 진통이라 볼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은 발전적인 것이다. 예컨대 민주화에 따르는 정치적 드라마는 한국이 어차피 겪어야 할 정치 발전의 과정이었고 그 긍정적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계기로 하여 선거법, 정당법, 정치자금법이 개정되어 지난 대선 (大選)은 비교적 돈이 적게 들고 큰 말썽 없이 끝날 수 있었으며 사상 처음으로 정권이 평화적으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넘어간 것도 정치발전상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할 것이다.

한편 경제면에서는 지금의 경제적 고난도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왜냐 하면 지금 추진중에 있는 개혁은 잘만 하면 보다 자유롭고 청정하고 공정경쟁이 지배하는 새로운 경제 질서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날 한때 한국의 경제 발전이 개도국의 성공 사례로서 세계의 각광을 받은 일이 있다. 이번에는 아시아 발전국가 중에서 가장 빨리 민주화, 국제화에 성공한 나라로서 또 다시 세계의 각광을 받는 날이 올 수 있게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제2의 도약을 위해 우리 모두 다시 한번 뛰어 보자! (끝)



1) 필자의 국제화 시대의 한국경제, (삼성 경제연구소, 1997)중 "개방화 시대의 경제정책" p. 125-58

2) 한국은행, IMF 신기준에 의한 개편 국제수지 통계 해설, 1998년 5월, p.42. 이 신기준 이전의 외국 증권 투자액은 420억 달러로 되어 있었다.

3) 경상수지 적자가 지속되는 1991-96년 사이 환율은 11%가 상승하였으나 그중 9%는 1996년 한해에 이루어졌고 그 전에는 미 상승 또는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다. 한국은행, 경제통계년보 1997년, p.232

4)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기업집단의 경영상태를 투명화하기 위하여 연결재무제표의 작성과 외부감사를 의무화했고, (2) 기업 경영의 투명화를 위하여 기업집단의 여신, 외자도입, 자금 운용, 납세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를 신속히 처리하기 이하여 국세청과 감독원의 컴퓨터 (EDPS)을 대폭 강화하기로 했다. (3) 다음에 기업의 구조 조정을 촉진하기 위하여 재무구조가 열악한 기업집단에 대하여는 지급보증, 기업의 신설, 매입, 소유나 주식투자, 비업무용 부동산의 취득을 금지하는 한편, 3년내에 재무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계획서를 은행감독원에게 제출케 하고 그 계획을 이행하지 못할 때에는 모든 정책금융을 중지한다는 것이었다.

5) 1998년 5월 19일, 재경부 자료 "중소기업 자금난 해소대책"

6) George Kaufmann, "Banking Reform : The Ways and How-tos" EWC/KDI Conference on Restructuring National Economy, 7-8 August 1997, Honolulu Hawaii.

7) The IMF 구제금융 공여자별 내용은 다음과 같다. IMF $210억 ; IBRD $100억 ; ADB $40 ; 일본 $100억 ; 미국 $50억 ; 기타 선진국 $80.35억.

8) 한국은행 조사제1부, "주요국의 금융개혁 사례와 시사점" 1997년 9월, p.14

9) 재계에서는 자기들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누구를 만나야 되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10) 뉴질랜드 개혁의 가장 평이한 설명은 일본의 "뉴질랜드 행혁 이야기" 1996년 PHP연구소 간행에서 볼 수 있다.

11) 상기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