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동태(動態)

1998년 4월 10일 기획예산위원회에서 연설.


외환위기는 전면적 경제위기로 치닫고 있다. 금리는 아직도 높고 자금은 투자신탁회사(投資信託會社)로 몰리고 5대 재벌이 그 자금을 독점하는 하는 현상이 벌어지는가 하면 외국에서 정부가 발행한 국채 가격은 계속 떨어지는 추세에 있다. 이러한 악 조정이 위기의 동태이다.


 

외환위기는 일단 넘겼으니 금융기관의 구조조정 조치를 9월말 까지 끝마치고 재벌의 구조조정을 년 말 까지 끝마치는 한편 IMF와 합의한 대로 재정적자를 GDP의 4%까지 확대하고, 한국은행이 통화공급을 다소 늘리면 경제가 다소 호전될 것이라는 것이 관변측의 전망, 아니 소망인 것 같다.

외환위기, 금융위기에서 경제위기로

그러나 작금의 내외 정세는 예측을 불허하는 상태에 있다. 우리는 외환위기에서 출발하여 금융위기로 치달았고 이제는 경제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런데 세계경제 또한 전반적 침체국면으로 접어들어 우리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아마도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약 70년의 주기로 되풀이 되어온 대 불황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국내의 사정을 보면 혼란과 침체의 터널에서 빠져 나오고 있다는 증후는 찾아보기 어렵다. 금리가 외환위기 이전의 수준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하나 기업들이 직면한 금융비용 (이자율, 보증료, 감정료 등등)은 아직도 20%선에 머물러 있고 그나마도 담보가 없는 중소기업은 은행 대출에서 거의 완전히 외면 당하고 있다. 콜 금리가 한자리수로 내려 왔지만 그것은 은행들이 들어오는 자금을 기업에 대출하기 보다는 보다 위험도가 적은 투자신탁회사에 맡기고 투자신탁회사들은 그것을 대부분 콜론으로 운용하기 때문이다. 기업에 대한 대출에는 자신이 없어 하루살이 돈놀이에 치중하는 투신사(投信社)들은 거액자금의 예입을 아예 거절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한편 재벌에 대한 여신 편중을 시정하는 것이 개혁의 목적이련만 그실 은행 대출, 회사채 발행, 투신사의 단기 여신 등은 5대 재벌로 집중되고 있는가 하면 정부는 재벌에 대한 융자 한도를 설정하여 그들의 목을 조이고 있다. 지금의 상태가 지속되면 금리는 더욱 내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금리 인하가 무슨 의미를 갖느냐가 문제이다.

외평채의 기현상

지금 기묘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즉 외국에서 발행한 외평채(外平債)1)의 수익율 보다 국내 금리가 오히려 더 낮다는 이외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외평채의 발행금리는 고정되어 있다. 그런데 외평채는 발행이후 금융시장에서 자유롭게 매매되고 팔리는 값에 따라 이문율은 달라진다. 가령 년 8%의 금리로 발행한 100달러 채권이 시장에서 50달러에 매매되면 이문율은 16%로 상승하는 것이다. 지금 뉴욕에서 외평채의 가격이 형편없이 떨어지고 있고 따라서 이문율은 발행당시의 이율보다 약 7-8%가 더 높아졌다고 보도되고 있다.

왜 외평채의 가격이 떨어지는가? 외국 투자가들의 한국에 대한 신인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정부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하겠다고 공언했지만 현대 노사분쟁 사태의 결말은 그와 달랐다. 재벌의 big deal을 소리 높게 외쳤지만 그 논리와 결말은 불투명하다. 말썽 많던 기아 사태도 아직 끝장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부의 정책 의도에 관해 정부내의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분명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세계은행이 한국정부의 구조개혁 방법에 실망하여 구조조정 금융을 꺼린다는 소문도 있다. 정부와 IMF는 금년의 GDP하락을 마이너스 1-2% 정도로 전망하다가 마이너스 4%로 수정하더니 이제는 마이너스 6%의 전망치를 내놓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악재에 불안감을 느낀 외국 투자가들이 외평채에서 손을 떼기로 한 것이다. 닥쳐오는 원리금 상환을 비롯하여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하면 환율이 다시 뛰지 않을까 걱정이다.

지금 외국인이 내다 파는 외평채를 국내에서 한국인들이 사고있다. 국내에서 외평채를 사면, 첫째로 안전하고, 둘째로 은행 담보로 최상이고, 셋째로 세금이 면제되고, 넷째로 자금 출처도 조사하지 않는다 하고, 다섯째로 만기가 되면 정부가 달러로 갚을 것이니 환율이 올라가면 환차익도 생길 것이다. 개인을 물론 금융기관이나 투신사들이 그것을 사 모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외평채를 외국인으로 부터 살 때에는 달러를 주고 사야 되므로 외평채가 국내에서 팔리게 된 이면에는 누군가가 그 대가로 달러를 지불했을 것이고 따라서 직접 간접으로 채권 만기 이전에 외환의 유출이 따르게 된다. 이것은 외환 보유고를 늘리기 위한 외평채 발행의 당초 목적을 무색케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국인이라도 외평채를 사지 않으면 국제가격은 더욱 떨어지고 외환은 계속 유출 될 것이다. 하기야 아주 바닥까지 떨어진 다음 그것을 전부 사드리면 국가적으로 상환 부담을 줄이는 결과가 되겠지만 지금의 형편으로는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금융기관이 선호하는 것은 비단 외평채 만이 아니다. 위험성 자산(대출 채권)을 무위험 자산(정부증권 등)으로 바꾸어 놓으면 BIS 자본 비율이 올라가기 때문에 은행들은 기업에 대한 대출을 줄이고 정부증권을 사려고 한다. 그래서 한은이 기업의 자금 경색을 완화하기 위하여 금융기관에 자금을 추가적으로 공급해도 그 자금이 한은으로 되돌아 온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자금으로 한은에 팔았던 무위험 유가증권을 다시 사오면 자본 비율이 개선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은행의 통화 발행고는 금년 1월 이후 매월 전년 동기 대비 마이너스 7-9%의 감소를 보이고 있다.

악조정의 현주소

위에서 말한 일련의 역리 현상들을 경제학에서는 악조정(maladjustment) 현상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러한 현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구조개혁이 요구하는 과도적 현상인가 아니면 정부와 IMF의 무리한 정책에서 오는 것인가. 필자가 보기에는 전자의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나 후자의 이유가 더 큰 것이 아닌가 한다. 먼저 외환위기 초기에 금리인상이 지나쳤고 둘째로 금융기관에게 BIS 자본비율 8%를 불과 2년 내에 실현하라고 요구한 것부터 무리한 정책이었다.

외환위기를 수습하기 위하여 고금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필요는 없다. 고금리의 정도와 기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수만은 기업들이 파산하거니 폐업했다. 어차피 도태 되어야 할 부실기업이 파산하는 것은 시장경제의 생리로 돌리면 되겠지만 괜찮은 기업마저 대량으로 죽이는 금리는 외환위기를 고려하더라도 적정하다고 할 수 없다. 양약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것을 IMF에게 말할 필요가 있다. 뒤늦게 금리는 내림세를 보이고 있다. 너무나 많은 기업이 쓰러진 연후에 내리고 있는 것이다. 기업이 계속 망하면 금리는 더 내려 갈 수 있다.

다음에 BIS 자본비율이 문제인데 이미 몇달전의 일이지만 KDI는 우리 은행들이 8% 자본비율을 달성하자면 어느 정도의 자본증자가 필요한지를 추정한 일이 있다. 당시의 추정에 의하면 현존 부실채권을 정리하고 나면 금융기관은 50조원 이상의 막대한 매각손실을 보게 되는데 대손 충당 적립금 15조원을 충당한 후 자본 비율 미달 부분을 보충하자면 39조원의 증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쯤은 이 금액은 더욱 불어났을 것이다.) 이 중 정부가 계획한 대로 16조원을 지원(우량은행이 퇴출 금융기관을 인수하는 대가로) 한다 해도 나머지 23조원은 금융기관이 자력으로 주식을 공모해야 한다. 그러나 이 공모액은 현 상장주식 총 평가액의 40-50%에 해당하는 수치인데 지금의 주식시장의 형편으로는 2-3년내에 그만한 주식을 소화 할 가망은 전혀 없다. 주식을 외국 투자가에게 팔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한국외환은행 외에는 매각한 실적이 없다. 결국 은행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최대한 대출을 회수하고 무위험 자산을 늘리는 길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출기피는 자금경색을 격화하고 부실기업을 양산하여 자본비율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반면에 실물경제는 불황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참고로 미국에 있어서도 자본-부채비율(leverage ratio- BIS ratio와는 악간 다르다)이 1980년대 중반의 약 6%에서 1990년 중반의 8%에 도달하는 데에 약 10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도 우선 4%를 일차적 기준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 BIS 기준 8%가 너무 높다고 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한국의 금융풍토를 생각하면 10%의 기준도 낮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좀 더 장기에 걸쳐 연차적으로 접근할 과제이지 불과 2년 후인 서기 2000년 3월까지 실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한다.

금융 정상화가 최우선 과제

어쨌든 우리 경제는 중대한 위기에 처해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부가 총체적 개혁이라 하여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물론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경제 정치 사회전체를 흔들어 놓고 그를 수습하지 못한다면 그에 따르는 혼란은 것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동료가 한 말이 그럴 듯하다. 여러 사람의 의사들이 한 사람의 환자를 놓고 제각기 자기분야의 완벽한 수술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의사들이 그들의 완벽한 처방에 따라 신체 각부를 동시에 수술하다가 환자는 죽고 말았다. 지금 각분야마다 수술이 필요치 않은 곳이 없고 그에 대한 처방도 개별적으로는 훌륭하다. 그러나 모든 수술을 함께 하다가 경제가 죽을까 걱정이다.

필자는 당초부터 금융개혁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정부의 역량을 그곳으로 집중하라고 역설해 왔다. 왜냐하면 금융은 경제의 혈맥이므로 그것을 수술하여 검은 피를 빼고 나면 다른 병도 보다 쉽게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대문이다. 먼저 새로운 감독 기준과 방법을 설정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은행들은 업무방법을 고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일례로 어떤 기업의 만성적 경영부실에 불구하고 대출을 계속하면 그 은행이 망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러한 감독 기준과 방법을 확립하는 것이다.

만약 금융기관이 감독 기준이 무리라고 판단되면 단계적으로 기준에 접근 시키되 기준 달성은 반드시 보장되도록 엄격해야 한다. 국제기준이 제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병약자에게 뛰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기준은 실정에 맞게 정하되 엄정을 기하면 된다. 엄정한 감독을 하자면 감독기구의 정치적 중립이 보장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점을 강조해 왔던 것이다.

금융기관이 확고한 위치에 서게 되면 기업은 정부의 간섭 없이도 스스로 새로운 금융질서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실정을 보면 널리 알려진 부실기업들이 있는데 그에 대하여 대출이 중단되었거나 도산하였다는 소식은 들은 일이 없고 정치적 또는 사회적으로 힘없는 기업들만이 정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어디엔가 구조개혁에 허점이 있는 것 같다. 금융부실과 기업부실은 표리의 관계에 있으므로 기업의 구조개혁 없이 금융의 정상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여기에도 논리적 전후관계는 있는 법이다. 금융 감독 기준과 질서가 아직 확립되지 않고 금융의 기업에 대한 대응이 애매한데 정부가 금융과 기업의 문제를 동시에 파헤쳐 놓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데에서 필요이상의 혼란이 따르고 있는 것 같다.

부실과 건실을 격리시켜야

구조개혁에 따르는 금융 혼란을 최소화하자면 건강한 자와 병든 자를 격리시켜야 한다고 나는 주장해 왔다. 즉 부실채권, 부실기업을 은행으로 부터 완전히 격리시켜야 살아 남는 은행들은 새로운 자세로 금융의 정상기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성업공사가 채권을 발행하여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매수한다 하지만 아직도 반 이상이 금융기관에 남게 된다. 재정부담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으나 지금 비상 대책을 세워 그것을 일거에 해결하지 않으면 금융 기능을 되살릴 길이 없는 것이다. 부실기업 정리도 아직 궤도에 오르지 않고 있다. 필자는 국제 금융기관이 참여하는 일종의 지주회사를 세워 부실기업을 그곳으로 집중하여 정리하는 방안을 제시한 일이 있는데 하여튼 환자를 병원으로 격리시켜야 건강한 가족들이 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상태는 응급환자와 일반 환자가 뒤범벅이 되어 혼란에 빠진 병원을 연상케 한다. 격리된 부실채권이나 기업의 정리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고 걸려도 좋다. 그러나 은행업무의 정상화가 늦어지면 경제적 손실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정부는 경기후퇴가 심각해지자 이제는 거시정책의 초점을 경기회복에 두고 재정적자를 확대하고, 금융을 완화하고 금리인하를 유도하며 소비 내구재에 대한 물품세를 30% 인하 한다는 대책을 발표하였다. 17조원의 재정 적자를 가급적 사회자본 확충과 환경 개선에 투입하기 바란다. 그러나 금융이 조속히 정상화되지 않고서는 경기회복은 기대하기 어렵다. 제아무리 문제가 어렵고 복잡하다 하더라도 구조조정의 논리적 순서에 따라 착실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갔으면 하는 것이다. 끝



1) [외국환 평형기금]이 외화조달을 위해 뉴욕에서 발행하는 정부공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