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과 신용사회
 

한은소식, 1998년 5월호 


[왜 이 나라가 불신사회로 되었을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금융과도 관련이 있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썼다.]


 

우리 사회를 흔히 불신사회라 한다. 세상에 믿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국민은 정치와 정부를 믿을 수 없고 학생은 스승을 믿을 수 없고 소비자는 생산자와 상인을 믿을 수 없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외세가 싫다는 사람들도 국산을 못 믿어서 외제를 산다. 신용은 금융의 대명사인데 금융기관은 IMF 한파 속에서 기업을 믿을 수 없어 대출을 기피하고 그 때문에 수많은 기업들이 부도를 내고 신용질서가 붕괴된 상태에 있다.

왜 이 나라가 불신사회로 되었을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금융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신용이 금융의 생명인데 금융에서 신용과 정직히 존중되지 않으면 다른 분야도 그렇게 물들게 마련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경제 생활은 기업에게 의존하고 있고 기업은 금융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금융에서 정직과 신용이 중시되지 않는다면 기업경영은 물론 그의 상부 구조인 사회생활 전체가 부정직과 불신에 물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 관련하여 미국의 어느 유명한 기업가의 일화가 생각난다. 그는 원래 무척 가난한 청년이었다. 그는 기업으로 성공하겠다는 대망을 품고 어느 회사에 취직하여 정성껏 일을 했고 얼마 안되는 월급을 쪼개 열심히 예금을 했다. 그는 그 예금을 밑천으로 처음으로 1만 달러의 융자를 받을 수가 있었다. 그는 그 1만 달러를 한푼도 쓰지 않고 장롱 속에 넣어 두었다가 상환기한이 오면 이자를 보태 은행에 상환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또다시 1만 달러의 융자를 받고 이번에도 그 돈을 한푼도 쓰지 않고 상환 기일이 오면 빚을 갚았다. 이러한 일을 10여 차례나 반복하니까 은행은 그의 신용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이제 독립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여 사업 계획을 세우고 은행에 가서 이번에는 거액의 융자를 신청했다. 은행은 그의 사업 계획이 그럴 듯하고 언제나 빌려 간 돈을 제때에 갚는 그의 신용에 감복하여 그의 융자신청을 받아 들였다. 그는 그 자금으로 사업을 일으켜 마침내 크게 성공하였는데 지금도 그는 신용이 최대의 자산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기업가의 행동은 다소 책략적인 데가 있지만 미국의 금융이 얼마나 신용을 중시하였기에 이 기업가가 그러한 책략을 썼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금융이 제대로 된 사회에서는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는 것 자체가 신용을 의미하고 그래서 융자(loan)와 신용( credit)은 동의어가 된 것이다. 은행이 담보가 아닌 사람을 믿고 융자를 하는 반면에 만약 은행돈을 갚지 않거나 세금을 탈세한 사람은 "요 주의인물" 기록(black list)에 오르게 되고 일생동안 불명예의 꼬리표가 붙어 다닌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정직과 신용이 생존의 조건이 되고 바로 그것이 사회전체의 기강과 도덕성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의 실상은 어떠한가? 은행은 사람을 믿고 융자를 하기보다는 담보와 "빽"을 믿고 융자를 한다. 그러므로 신용만으로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릴 수 있는 기업은 희귀한 반면, 담보가 있고 빽이 있는 사람이나 기업은 신용이나 자금 용도와 관계없이 천문학적 숫자의 융자를 받을 수 있다.

프랑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부동산 담보를 취득하는 일이 거의 없고 차주(借主)의 신용과 경영의 건실성이 최우선의 융자기준이 된다. 필자는 한때 우리 금융의 고질을 교정하기 위해 부동산 담보 취득을 법적으로 제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 일이 있다. 그러면 은행들은 어쩔 수 없이 신용조사와 위험관리에 신경을 쓰게 되고 현대적 금융기법을 배우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다. 이제는 쓸만한 부동산은 모두 은행 담보로 들어가 있고 남아 있는 부동산은 많지 않으므로 어차피 앞으로 담보 대출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신용은 은행 고객만의 문제가 아니다. 은행 스스로가 신용 위기에 빠져 있다. 은행들이 정경유착에 말려들었고 방만 경영과 재무제표 분식을 일삼아 오다가 국제금융계의 신뢰를 잃고 말았다. 금융의 부정직과 기업의 부정직이 결탁하고 그것이 사회전반으로 파급되어 오늘의 불신사회를 만들어 내는 데에 한 몫을 했다면 지나친 망언일까? 하여튼 신용 타락과 부실경영이 우리나라 금융의 구조적 약점이고 그것이 오늘의 금융파탄을 자초한 원인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제 IMF압력하에 금융의 구조개혁이 진행 중이다. 그것은 금융의 기강을 바로 잡고 건전성을 회복하기 위한 경제적 차원의 시도이지만 한편 정직이 지배하는 신용사회를 재건하기 위해서도 필요 불가결한 개혁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번의 구조개혁은 옳게 이루어져야 하고 또 반듯이 성공시켜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