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시대의 정부의 역할

1997년 9월 24일 한림대학교, 한림 과학원에서 


Lehmann 교수는 정부의 경제 관리 방식을 세 가지 모델로 분류하고 있다. 지금 세계적 추세는 어떠한 모델을 따르고 있는 것일까? 우리도 살기 좋고 사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부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때가 왔다.


 

때는 바야흐로 3화(化) 시대라 한다. 즉 정보화, 개방화, 민주화라는 3중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그에 적응하기 위하여 적지 않은 진통을 겪고 있다. 지금 사회 어느 구석을 막론하고 변혁이 필요치 않은 곳이 없으나 그 중에서도 정치, 정부, 금융기관 및 기업의 구조 개혁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오늘은 이중에서 3화시대의 정부의 기능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정부의 세가지 모형

먼저 정부의 경제적 역할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가에 관하여 스위스 IMD(International Management Development Institute)의 Jean Piere Lehmann 교수의 논문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1) 레만 교수는 정부의 경제적 통치방식을 세가지 모델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첫째는 관리형(型) 정부, 둘째는 코치형 정부, 셋째는 레프리형 정부이다.

첫째의 관리형 정부는 경제적 국가주의(nationalism)와 보호주의를 표방하고 민간경제 활동에 깊이 간섭하며, 국가적 선수 기업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시장을 관리한다. 공공부문의 비중이 막강하고, 공공행정, 기업경영에 투명성이 적고, 정경유착과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것이 특징이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중국, 싱가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1986년 이전의 대만, 1990년 이전의 한국 정부가 이에 속한다고 그는 보았다.

둘째의 코치형 정부는 행정 면에서 기업을 지도하고 각종 지원책과 보조정책을 시행하며, 정부와 기업이 밀접한 협력관계에 있다. 시장관리에 있어서는 조직화된 경쟁과 인적관계를 중요시하며 금융과 산업이 유착 상태에 있다. 공공부문의 비중이 크고 공공행정, 기업경영의 투명성이 적고 부정부패도 적지 않다. 독일, 스칸디나비아 제국, 일본, 태국, 1986년 이후의 대만, 1990년 후의 한국 등이 이 모델에 속한다.

셋째의 레프리형 혹은 심판자형 정부는 경제에 대하여 비교적 중립적인 위치에서 위법을 감시, 예방하고 징계(懲戒)하는 데에 역점을 둔다.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 질서를 떠받들고, 금융기관은 산업으로 부터 독립해 있으며 공공부문의 비중이 적다. 공공행정과 기업경영에 있어서 투명성과 책임 소재가 분명하고 부정부패는 적은 편이다. 미국, 영국, 홍콩,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주로 Anglo-Saxons 문화권의 나라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레만이 부언한 대로 개별 국가의 현실이 각 모델에 꼭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1990년 이후의 한국은 코치형 국가로 분류되었지만 아직도 민간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많고 문민 정부하에서도 부정 부패로 세상이 들끓고 있다. 그러나 개략적 경향을 기준으로 하면 레만의 정의와 분류는 그런대로 뜻이 있고, 사실상 많은 나라들이 자율화, 자유화, 규제완화, 작은 정부 등의 구호를 내걸고, "시장의 실패" 보다 "정부의 실패"를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세계적 추세이다. 그러한 만큼 종래의 관리형 혹은 코치형 정부가 점차로 레프리형 정부를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부기능의 제약

레프리형 정부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정부기능이 여러모로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보화, 세계화에 민주화가 겹친 우리 나라에 있어서는 정부의 관리능력이 큰 도전을 받고 있다. 민주화에 따라 사회가 다원화하고 정부가 시도하는 정책마다 이익집단의 반대에 부딪치고 좀처럼 국민적 합의를 끌어내기 어렵게 된다.

정부 기능에 대한 제약은 밖으로부터 오기도 한다. 일례로 이제 경제정책의 입안자는 WTO의 규제를 무시할 수 없고 그밖에 여러 가지 국제적 협약이 정부의 정책적 자유를 구속할 것이다. 이제 정부의 전략적 산업을 위한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지원정책이나 보호 정책은 WTO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모든 정책의 투명화가 요구되고 있다. EU의 회원국들은 경쟁력 강화를 위한 개별적 산업정책을 시행할 수없게 되었고 앞으로 EMU(European Monetary Union)에 따라 유럽 중앙은행이 설립되면 회원국들은 금융정책의 독립성마저 잃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개방화 시대에는 설사 개별 국가가 국내적 목적을 위해 어떤 정책을 시행한다 하더라도 그 효과가 외부로 누출(漏出)되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경기 부양을 위하여 재정 금융면의 확대 정책을 쓰면 그것은 곧 바로 수입증가로 연결되어 국내 생산에 미치는 확대 효과가 그 만큼 상쇄된다. 또 다른 예로 국내에 다국적 기업이 많아지면 산업정책의 수혜자가 누구인지 분명치 않게 된다. 가령 산업정책의 결과로 다국적 기업의 주가가 올라가면 외국인 주주들은 좋아하겠지만 해외 생산 확대로 조업률 감축에 직면한 국내 노동자들은 좋아할 까닭이 없다. 그러므로 정부는 산업정책의 효과를 다시 보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정보 통신기술의 발달에 따라 정부가 통제하기 어려운 분야가 많아지고 있기도 하다. 일례로 인터넷을 통하여 음란물(淫亂物)이 지구상에 무차별로 전파되지만 정부가 단독으로 그를 통제하기 어렵고, 매스컴을 통하여 정부의 부정부패, 인권유린 등의 보도가 세계적으로 전파될 때 해당 정부가 그것을 통제할 방법은 없다. 결국 그 정부는 폐쇄 정책이나 국민 탄압을 강화하던가 아니면 자기 개혁 혹은 혁명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정보화는 독재정권의 몰락과 민주화를 재촉하는 효과를 가질 것이다. 그런가 하면 범죄조직 - 마약, 도박, 무기 밀매, 음란물 등 -이 위성 통신망을 활용하여 국제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오늘에 있어서는 개별국가가 단독으로 그것을 다스릴 수 없게 되었고, 앞으로 국제경찰조직의 출현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국제화, 세계화는 인간 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국민국가 주권의 약화를 불가피하게 만들 것이다.

국가의 목표

국민국가의 주권이 약화하는 추세라면 국가 목표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1870-1940년대의 국가주의는 영토의 확장을 목표로 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약 반세기 동안의 국가 목표는 경제 혹은 산업적 지배였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는 세계화 시대이요 "국가의 후퇴"의 시기라고 Susan Strange는 말하는데2) 그러면 21세기의 국가목표는 무엇이 될 것인가? 레만에 의하면 새로운 패러디임(paradigm)에 있어서의 국가 목표는 과거와 같은 침략적인(aggressiveness) 것이 아니라 국가의 매력성(attractiveness)을 높이는 일이라 한다.3) 달리 말하면 다국적 기업들은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서로 경쟁할 것이고 정부는 국내로 투자를 비롯한 성장 요인을 유치하기 위하여 매력적인 나라를 만드는 데에 서로 경쟁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필자는 21세기의 국가목표가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해 왔는데4) 이 말은 레만의 "매력적인 나라"와 일맥 상통하는 개념이다. 살기 좋은 나라는 어떠한 나라일까. 그것은 생활, 지력(智力), 문화, 도덕 수준이 높고 환경이 깨끗하고, 법과 정의가 존중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정부의 역할이 후퇴하는가?

정부의 기능이 여러 가지 제약을 받고, 국민국가의 주권이 약화하며 21세기의 국가 목표가 침략적인 것이 아니라 매력적, 혹은 살기 좋은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라면, 그에 상응하여 정부의 권능은 어떻게 달라지는 것일까? 얼른 보기에는 정부의 역할이 후퇴하고 흔히 말하는 "강력한 정부"란 과거의 관념처럼 보여질지 모른다. 아닌게 아니라 레만의 논문은 그러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에도 정부의 적극적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학자도 있다. 예컨대 John Halligan 교수는 "세계화의 장기적 효과는 나라, 정책분야, 정책의 종류 그리고 계층에 따라 달라지므로 세계화의 개념을 지나치세 일반화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했고 "세계화가 반드시 국가의 역할을 절대적으로 축소시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양자는 공존하고 상호이익의 관계가 될 수 있다"5)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여기에서 강력한 정부의 "강력"이란 말의 의미를 밝혀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는 "강력한 정부"라 하면 과거의 군사 정권을 연상케 된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강력"이란 그런 뜻이 아니라 민주적이고 "작은 정부"도 강력할 수 있다는 의미의 "강력"이다. 우리 속담에는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있는데 작은 정부라 할지라도 법을 엄정히 시행하여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고 국가 목표를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독재정치가 겉으로는 강력해 보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민주정치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것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각국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다.

필자 또한 지금이야말로 강력한 정부가 필요한 때라고 믿고 있다. 달리 말하면 정부의 역할이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달라질 뿐이다. 그 단적인 이유로 매력적인 나라를 만드는 것 자체가 강력한 정부의 기능 없이는 실현되기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제언하면 관리형 혹은 코치형 정부에서 레프리형 정부로 이행하자면 그것 자체가 강력한 정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영국은 1950년대 이후 이른바 "영국병"을 앓고 있었고 그 때문에 경제가 오래 동안 침체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이 높고 매력적인 투자환경의 나라로 지목되고 있고 경제도 활기를 되찾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우연한 변화가 아니라 "대처리즘"이라고 하는 강력한 정부의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자율화에 관한 몇 가지 오해

요즈음 자율화 혹은 자유화가 강조되는데 규제완화라는 말에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자유로운 시장을 창출하자면 새로운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게임을 공정히 하자면 그를 위한 새로운 규제, 그리고 규제를 실시하기 위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흔히 규제는 자유의 반대라고 생각하고 자유시장을 실현하자면 규제 철폐가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물론 철폐해야 할 규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나, 다른 한편 규제가 있어야 비로소 자유로운 시장이 확보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대기업이 지배하는 독점, 혹은 과점시장이 되어 버린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건전한 자유시장을 만들 수 있는 기본 조건은 게임 규칙을 엄정히 집행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의 존재이다.

규제의 의미를 오해하는 데에서 막연히 자율화, 자유화가 기업경영을 쉽게 만든다고 착각하는 경향도 있는것 같다. 물론 자율화가 기업경영 능률의 향상을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냉엄한 시장 규율과 정부의 엄정한 심판자의 역할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레프리형 정부는 무엇보다도 불법의 예방과 응징을 집행하는 책무를 중시하는 정부이다.

금융기관의 예를 들어 이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선진국에서는 금융기관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격한 감독을 하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영업정지 명령을 불사하기도 한다. 은행이 문을 닫으면 다수의 예금자가 피해를 보게 되는데 그에 대비하여 소액 예금자를 보호하는 예금보험제도를 두고 있다.(우리나라에도 같은 제도가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소액 예금자는 보호하지만 다액 예금자는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에 필요한 자금 부담이 문제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액 예금자를 보호하면 그들 스스로가 은행 감시를 소홀히 한다는 시각이 깔려 있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다액 예금자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그들은 항상 은행을 감시하고 은행 신용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예금을 다른 은행으로 빼돌리게 될 것이다. 은행이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면 큰 일 나므로 은행은 항상 적정 자본비율을 유지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이것이 은행의 건전성을 보장하는 안전반의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금융학자 Kaufman 교수는 은행 감독의 요체는 예금자 스스로가 은행을 감시하도록 하고 정부는 그를 보강하는 차원에서 감독 방법을 강구해야 그 효과가 크다고 말하고 있다.6) 정치는 민심을 따라야 하고 정부의 규제와 감독은 시장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경험적 교훈이라 하겠는데, 미국에는 정부의 엄격한 규율과 감독이 있는 반면에 은행의 인사, 예산 기타 경영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국은행은 한편으로 고도의 자율을 누리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 시장의 압력과 정부 감독 하에서 언제나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요컨대 자율화가 반드시 은행 경영을 수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 정부는 강력한 정부인가?

지금의 문민정부가 과연 강력한 정부이냐 하는 데에는 이견(異見)이 있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문민정부의 강력한 측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정의 칼날을 뽑아 두 전직 대통령의 행적에 대하여 법적 심판과 제재를 가하였고 군의 "숙정"을 단행하는가 하면, 사회 각계의 부정부패를 과감히 척결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정부를 강력한 정부로 보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통치권자의 지도력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올 것 같다. 먼저 민주주의 국가에서 통치력을 발휘하자면 국민 대다수의 신뢰와 지지를 얻고 또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거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로 법의 적용이 엄격할 뿐아니라 공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표적 수사"니 "응징수사"니 또는 "수사에 성역이 있다"는 등의 말들이 유행한다. 이러한 말들의 진부는 알 수 없으나 그러한 일반적 인식이 통치자에 대한 신뢰와 통치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둘째로 통치자는 도덕성에 있어서 국민의 의심을 받지 않아야 한다. 지난 날의 비위를 심판하는 통치자가 자신도 심판의 대상으로 지목된다면 그것은 법 집행의 공평성 이전에 도덕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자고로 말로 도덕성을 내세우는 정치가는 자가당착에 빠지기 쉽고 그것으로 자신의 무능을 가리려 하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도덕성에 중대한 흠이 있는 통치자는 국민의 신뢰를 잃고 지도력을 발휘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셋째로 통치자는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는 뚜렷한 경륜과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의와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추진력은 정부조직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데에서 생겨난다. 정책에 관한 식견이나 열의도 없이 그때 그때의 매스컴의 논조나 정치적 편의에 따라 빈번히 내각을 개조하면 행정에 안정성이 없어지니 거기에서 강력한 정책추진력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경륜이란 결국 우선 순위에 관한 것인데 국가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너무나 많고 모든 것을 일시에 해결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통치자는 국민 대다수가 가장 간절히 요구하는 문제부터 해결해 나가야 한다. 사실상 이러한 셋째의 기준이야말로 통치력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건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첫째와 둘째의 요건은 중요하기는 하나 상대적인 것이고, 동서고금의 모든 성공적 지도자가 이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민생과 직결되어 있지도 않다. 클린턴 대통령은 끈임 없는 여성 스캔들 보도에 휘말리면서도 그의 경제정책과 경제의 호전 때문에 재선에 성공하였고,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과 경제발전에 전념하는 그의 경륜이 국민의 공감을 얻었기에 첫째와 둘째의 요건상의 하자(瑕疵)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첫째, 둘째의 요건보다 셋째의 요건이 더 결정적인 것이고 셋째의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첫째와 둘째 요건의 결함을 상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두 가지 결함이 더욱 부각되고 과장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지금의 사태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끝으로 의회정치 하에서는 정당정치의 기반이 없으면 대통령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집권당이 대다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면 행정부의 정책이 국회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정당이 어떠한 정책 이념으로 결속되어 있기보다는 공천, 지연, 인관 관계 등 비정책적 요인에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하고, 공천권, 사정, 세무사찰과 같은 비민주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당내 통솔이 어려운 실정에 있다. 최근에 집권당의 당내 민주주의가 실현되는가 하였더니 그 결과는 당내의 무절제한 분열과 혼란상뿐이었다. 다시금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목격하고 쓸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집권자가 위에서 말한 세가지 요건을 굳건히 갖추고 있다면 그의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는 일이 훨씬 쉬워질 수 있을 것이다.

국민적 바탕

그러나 통치력은 통치자뿐만 아니라 국민적 바탕에 의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국민적 바탕이란 과거로 부터 물려받은 관행과 의식구조를 말함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사회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근본 이유는 매사에 법과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선거법이 있지만 법대로 선거를 치르는 의원은 거의 없다고 한다. 헌법에는 국무총리가 각부 장관임명을 대통령에게 제청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지로 그렇게 한 일은 거의 없다. 주식회사의 의사결정은 주주를 대표하는 이사회가 행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주주를 대표하는 이사와 집행부의 업무를 관리하는 임원이 혼동된 상태에 있고 따라서 책임의 한계가 불분명하다. 은행장은 주주총회 또는 주주를 대표하는 이사회에서 선출하는 것이 원칙인데 주주들이 은행장들을 옳게 선출할 만한 양식(良識)이 없다고 하여 정부 지시로 은행장 추천위원회를 두고 있는 것도 변태이다. 공인회계사 제도가 있기는 하나 기업이나 금융기관의 재무 상태를 사실대로 보고하는 회계사는 거의 없다. 은행이나 재벌을 감독하는 법률이 있지만 실효를 거둘 만큼 집행이 엄격하지도 않고 정부의 재량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이 외에도 예를 들자면 한이 없는데 이와 같은 원칙과 행동의 괴리(乖離)가 우리 문화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규제가 많은 것도 따지고 보면 원칙을 무시하거나 법을 제대로 운용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즉 정부가 제정한 법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인데, 또 다른 법을 만들어 그것을 "보완"하려 하는 것이다. 토지 관련법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볼 수 있다. 원래 토지 투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다른 목적도 있지만) 양도소득세를 도입하였는데 그것이 실효를 거두자면 먼저 양도차익을 사실대로 파악하는 기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방 자치단체는 주로 정치적 이유 때문에 과세 목표가 되는 땅값을 (課標라 한다) 시가(時價)에 비하여 지나치게 낮게 평가한다. 때문에 양도차익의 대부분을 국고로 환수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민간 업자가 볼 때에는 투기는 언제나 수지 맞는 장사가 된다. 그런데 정부는 토지투기가 시정되지 않는다 하여 종합토지세, 개발 이득세등 새로운 세법을 입법화했다. 새로운 세법의 모순이 명백해지자 정부는 법을 시행하기도 전에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추태를 보였는데 결국 이 개정안에 대하여는 지금도 시비가 많다. 이와 같이 법을 윈칙 대로 시행하지도 않고 거기에서 문제가 생기면 다른 법이나 규제로 "보완"하려 하는 데에서 규제가 중첩되고 그 결과 우리는 법과 원칙이 무시되는 무질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구습을 청산하고 모든 일을 원칙과 법대로 처리하는 관행을 확립해야 한다. 이것이 모든 개혁의 출발점이요 강력한 민주정부를 가질 수 있는 기본 조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개방화와 정부의 역할

개방화, 자유화 시대의 정부의 역할을 이해하자면 개방화, 자유화의 의미와 한계부터 똑똑히 알아 둘 필요가 있다. 필자 자신은 줄곧 개방과 자유화를 주장해 왔다.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 경제의 손익 계산에서 플러스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가와 문제점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금융개방을 예로 들기로 하자. 일본은 내년(1998년) 4월부터 외환거래를 완전 자유화하기로 되어 있다. 외환거래를 자유화하면 국내 거주자가 은행에 예금을 하려 할 때 자국은행에 할 수도 있고 외국은행에 할 수도 있고 엔화로 할 수도 있고 달러로 할 수도 있다. 외국 여행에 필요한 환전이나 해외 송금에 제한도 없다. 국내에 외국은행들이 들어와서 외국화폐 혹은 엔화 표시의 각종 금융 상품을 팔 수 있다. 내국인은 외국의 증권을 사고, 팔고, 외국 보험에 가입할 수도 있다. 그 결과 일본인들의 자산 보유상태가 엄청나게 달라지고 외국은행에 고객을 빼앗기는 국내의 일부 은행들은 존폐(存廢)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외국 투기 자본이 국내외 금리와 환율변동에 따라 빈번히 드나들고 외환관리가 한층 더 복잡해질 것이다.

일본이 이러한 엄청난 변화를 예견하면서 외환거래의 완전자유화를 결심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세계화 추세 하에서 외국의 개방압력이 가중되는 가운데, 그에 응하지 않으면 동경 금융시장의 국제적 지위가 떨어지고 국민경제에 손실을 가져온다는 것, 둘째는 엄청난 외화자산(외환보유고 포함)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개방 후에도 외환관리에 별문제가 없다는 것, 그리고 셋째로 자유화 과정에서 문제가 파생하면 정부의 "행정지도" 혹은 "비공식규제"로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감 등이다. 세번째의 "행정지도" 혹은 "비공식 규제"는 완전 자유화가 아니라 하여 외국인의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러나 일본은 이 전통적인 "비법"을 버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버린다면 일본 경제는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우리 정부도 외환거래 자유화를 추진하고 있고 또 추진해야 한다. 서방 선진국들의 개방압력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개방의 전제조건이 존재하고 있는가를 냉정히 판단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일본과 같은 순외화자산의 축적도 없다. 우리에게는 일본과 달리, 안보, 정치, 경제면에서 불안 요소가 많다. 가령 지금의 상태에서 외환 거래를 완전 자유화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안보상의 불안, 정치의 불투명, 그리고 실명제를 회피하기 위하여 외환 유출이 유입을 크게 능가하게 되어 일시에 외환관리가 어렵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부 통제가 불가피하게 될 것이니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본 자유화의 일정을 늦추고 우선 국내 금융 산업의 자율화와 구조 조정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대외적으로 정직한 태도이고, 우리가 구조조정에 성의를 보인다면 국제사회도 우리를 신뢰하게 될 것이다. 하기야 구조조정을 촉진하자면 개방화의 압력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금융개방 속도는 대내적 구조조정을 촉진할 수 있을 정도로 빨라야 하되 심한 부작용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점진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컨대 외국 압력에 굴하지 말고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는 견지에서 치밀한 행동계획을 수립하고, 때로는 기득권 세력의 반대를 물리치면서 단계적으로 우리의 시스템을 고쳐 나가야 할 것이다.

경제 회생을 위한 정부의 역할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세계화시대의 정부는 결코 힘없는 정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력하고 능률적인 정부를 필요로 하고 있다. 특히 지금의 경제적 침체를 극복하기 위하여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그 중에서 필수 불가결하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가려내도 아래와 같이 적지 않다. 시간의 제약으로 설명을 할 수 없으나 설명이 없더라도 너무나 잘 알려진 문제들이다. 먼저 재정수지, 통화량, 금리, 환율을 적정선으로 유지하여 물가, 국제수지, 경제성장율 사이의 균형을 도모하자면 종래의 단편적 대증요법식의 거시정책 운영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를 위하여 선진국과 같이 명실상부한 독립성을 가지는 중앙은행을 창출할 필요가 있다. (이점에 관련하여 정부가 마련한 한국은행 개혁안은 미비점이 많은것 같다.) 정부는 금융기관, 기업들의 구조조정을 촉진하기 위하여 불필요한 규제를 완화 내지 철폐하는 동시에 금융기관의 효율화와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엄격한 경영기준과 감독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대내적 개방과 자율화가 대외적 개방의 전제 조건임을 명심해야 한다. 국내 투자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사회간접 시설을 대폭 확충하고 공해 없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침체와 좌절에 빠져 있는 중소기업을 소재, 부품 등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과학기술과 인적자원 개발(근로자의 교육훈련 포함) 시스템을 보다 명확히 정립해야 한다. 세계화 시대에 적응하는 국민의 의식개혁과 지식집약형 산업사회를 지향하는 교육제도를 창출해야 한다. 지가(地價) 안정을 위한 토지정책을 재정립해야 한다. 노동의 이동이 가능한 노사제도를 창출하는 한편 실업자의 재교육 및 최저생활보장책을 강구해야 한다.

맺음 말

힘없는 정부가 위와 같은 벅찬 과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다. 탁월한 통치자가 영도하는 강력한 정부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세계은행 문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세계화는 힘없고 일관성 없게 다스려지는 나라에게는 일대 위협이 될 것이다... 지금 제국이 직면한 도전은 정부가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위축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시장을 지배하지도 않는 것이다."7)  결국 힘있는 레프리형 정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제언하거니와 강력한 정부는 강력한 지도자를 전제로 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강력한 지도자란 스스로 법과 원칙을 수호하고, 도덕성에 큰 하자가 없고, 무엇보다도 국가의 우선 과제에 도전하는 경륜을 펴 나갈 수 있어야 하며, 그를 위하여 의회주의의 정치기반을 확보할 수 있는 지도자를 말함이다. 오는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위의 기준에 가까운 지도자가 당선되기를 바랄 뿐이다. 끝


1) Jean-Piere Lehmann, "Government-Business Interface in the Age of Globalisation, EWC/KDI Conference on Restructuring the National Economy, held in East-West Center, Honolulu, August 7-8, 1997.

2) Susan Strange, The Retreat of the State: the Diffusion of Power in the World Economy,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UK, 1996

3) Lehmann은 매력적 국가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IMD내의 그의 동료인 Stephan Garelli이고 그가 매력도를 측정하는 기준을 설정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IMD는 World Competitiveness Yearbook를 발간하고 있다.

4) 남덕우, 국제화시대의 한국경제, 삼성경제연구소, 1997, pp. 72-73

5) John Halligan, "Role and Structure of Government in the Age of Globalization," a paper presented at the EWC/KDI Seminar on Restructuring the National Economy, East West Center, Honolulu, 7-8 August, 1997.

6) George G. Kaufman, Banking Refform: the Whys and How Tos, EWC/KDI Seminar on Restructuring the National Economy, held in East-West Center, Honolulu, 7-8 August, 1997.

7) World Bank (1997), World Development Report: The State in a Changing World.